조안 리

Kdga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4월 8일 (월) 13:44 판 (→‎자녀)
조안 리
Joanne Lee
인물 정보
본명 이영자
다른이름 요안나(세례명)
출생 1945년 3월 8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사망 2022년 9월 16일 (향년 77세)
미국 로스앤젤레스
국적 대한민국
학력 혜화초등학교
성심여자중학교
성심여자고등학교
서강대학교(철학과 → 영문과)
일리노이대학교(시카고캠퍼스) 대학원 심리학 석사
직업 기업인
종교 가톨릭
신체 168cm
배우자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前 신부
가족 아버지, 어머니, 오빠 1명, 여동생 1명
장녀 안젤라 킬로렌(길성미), 차녀 에이미 킬로렌(길현미)
큰사위 포웬, 작은사위 로랑
외손자 가브리엘
외손녀 니나, 다프네

개요

대한민국의 1세대 여성 사업가. 1990년대 홍보업계의 전설. ‘성공한 여성’의 한 사람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서강대학교 재학 중에 만난 은사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와의 파격적인 사랑결혼으로도 유명하다. 두 사람의 사랑과 결혼은, 도저히 극복 불가능해 보이는 어마어마한 장벽을 1가지도 아닌 무려 4가지나 뛰어넘은 파격적인 것이었다. (귀화했다지만) 케네스는 미국인이었으며, 조안은 한국인이었다. 또한 케네스는 조안보다 무려 26년이나 연상이었다. 케네스는 서강대 설립자 중의 하나이자 교수였고, 조안은 서강대의 학생이었다. 그러나 앞선 3가지의 커다란 어려움들을 순식간에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가장 중대한 문제가 있었으니, 바로 ‘가톨릭 신부와 여성의 금지된 사랑’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1960년대 중후반 당시 가톨릭교회를 온통 떠들썩하게 뒤흔들어놓은 어마어마한 스캔들이었다.

아래 내용들은 그녀가 1994년에 출판한 회고록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을 상당 부분 참조했다.

유년기와 성심여자중고등학교 입학

조안 리의 본명은 이영자(李英子)로, 194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모 경제신문사의 편집국장이었고, 형제로는 5살 위의 오빠와 5살 아래의 여동생 이영숙(李英淑)이 있었다.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8.15 광복을 맞이했고, 유아기에 한국전쟁을 겪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녀는 공부를 빼어나게 잘했지만, 몸은 썩 건강하지 못하여 체육은 잘하지 못했다. 체육시간에는 거의 열외되어, 다른 아이들이 운동하는 것을 견학하며 보냈다고. 또한 또래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에는 별로 취미가 없었으며, 혼자서 책 읽기를 좋아하는 내향적인 소녀였다. 훗날 조안 리는 자신의 학창시절 모습에 대해 ‘그늘 아래의 외톨박이’라고 묘사하며 회상했다.

당시 공부를 잘하는 여학생은 한국 최고의 명문학교인 경기여자중학교와 경기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로 진학하는, 일명 ‘KS 마크’[1]라는 코스를 거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따라서 국민학교에서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았던 이영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학교와 가정과 주변 사람들 모두가 기대했고 본인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학교 입학지원서를 제출하기 불과 며칠 전, 그녀는 완전히 마음을 바꾼다. 우연히 친구를 따라 가벼운 마음으로 구경해본 성심여중고에 온통 마음을 빼앗겨, 당시 개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설학교였던 성심여중에 진학하겠다고 마음먹은 것이다. 새로 지어져 깔끔하면서도 아늑한 건물들, 아름답고 성스러운 분위기의 교내 성당[2]과 수녀원, 예쁘고 깜찍한 모양새의 교복, 검은색 수도복베일 차림의 서양인 수녀들[3] 등등, 성심여중고의 모든 풍경들은 12세의 어린 소녀였던 이영자에게 마치 동화 속의 풍경처럼 신비스럽고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당연히 그녀가 재학 중이던 혜화국민학교의 선생님들[4]과 부모님은 깜짝 놀라서 다들 반대했으나 그녀는 끝끝내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고, 결국 원서접수 마감 직전에 겨우 입학원서를 제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영자는 우수한 성적으로 1958년 성심여중에 입학했고, 1961년에는 성심여중을 졸업하고 같은 재단의 성심여고로 진학한다.

용산구 원효로에 위치한 성심여중고는 가톨릭 수도회성심수녀회에서 설립한 미션스쿨이었다. 교육사업을 주로 하는 성심수녀회는 전세계에서 성심학교를 운영하고 있고, 한국에도 성심여중고뿐 아니라 성심국민학교(여학교)[5]성심여자대학교[6]까지 설립했다. 초창기 소규모의 소수정예 사립학교였던 성심학교에서는 교사들이 학생 개개인에게 많은 관심을 쏟아주며 세세하게 지도했고, 성적 못지않게 인성교육을 중시했다.

또한 성심학교는 당시로서는 특별하고 획기적인 방법으로 영어교육에 힘썼다.[7] 원어민 교사가 글자와 문법보다 발음과 회화를 먼저 가르쳤고, 적은 수의 학생들이 원어민 외국인 수녀들과 영어로 대화를 주고받으며 자연스럽게 영어회화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성심학교 특유의 영어교육 방식을 전적으로 따르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못미더워하며 (보통의 다른 학교들이 하는 것처럼) 따로 문법 위주로 공부하는 학생들도 있었는데, 시간이 흐르자 전자(前者)의 학생들이 후자(後者)의 학생들을 압도적으로 앞질렀다. 이영자는 당연히 전자에 속했다.

특히 또래 아이들과 별로 어울리지 않았던 그녀는 외국인 수녀들과 영어로 대화를 많이 나누었고, 영어 원서도 즐겨 읽었으며, 그로 인해 다른 학생들보다도 한층 더 영어를 잘하게 되었다. 중학교 3학년쯤 되자 영어회화 실력이 부족한 학생들과 원어민 선생님 사이에서 한국어와 영어를 자유자재로 오가며 동시통역사 노릇을 해낼 정도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한참 이전부터 영어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어려움이 없었으며, 종종 원어민으로 오해받을 정도로 영어를 잘했다. 그녀가 성심여중고에서 쌓은 영어실력은 이후 그녀에게 큰 자산이 되었으며, 서강대학교에 진학한 이후로 무엇보다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와 가까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성심여중고 시절 이영자는 교장 주매분(朱梅芬)[8] 수녀로부터 각별한 보살핌과 총애를 받았다. 이영자는 교장실에 드나들면서 당시로서는 굉장히 희귀하고 비싼 사무기계였던 타자기 사용법도 배웠고, 타자기로 문서를 작성하는 심부름을 도맡아 다른 학생들로부터 부러움과 시샘을 동시에 잔뜩 받았다. 그리고 이때 익힌 타자 실력은, 훗날 그녀가 미국에서 처음으로 직장을 구하여 가난한 신혼살림을 꾸려가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되어준다.

성적은 더없이 우수했지만 ‘고분고분 말 잘 듣는 아이’와는 거리가 멀고 자아(自我)가 강했던 이영자를, 주 수녀는 있는 그대로 포용하며 이끌어주었다. 성심여중에 입학할 당시 이영자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지만 주 수녀는 그녀에게 종교를 강요하지 않았고, 결국 이영자는 중학교 3학년이 되자 스스로 마음을 열고 자청하여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이때 ‘요안나’라는 세례명을 스스로 택했는데, 당시 그녀가 무척 좋아했던 성녀 잔 다르크의 이름 ‘잔(Jeanne)’을 라틴어로 발음한 것이며 영어로는 ‘조안(Joanne)’이라고 읽는다. 그녀의 주보성인과 새로운 이름 ‘조안 리’는 이렇게 정해진 것이었다.

무엇인가를 명명한다는 행위가, 때때로 그것의 운명을 좌우하기도 한다. 나는 나의 이름을 ‘조안’이라고 지으면서, 나의 삶도 잔 다르크처럼 ‘드넓은 세계에서 온갖 고난들을 극복하면서 용감하게 살아가는 여자의 삶’이 되기를 기원했다. 나는 내가 지은 나의 이름을 사랑한다. 나는 나의 이름이 표상하는 바처럼 살아가기를 열망했고, 또한 그렇게 살아왔다고 자부한다. 다만 그때는 몰랐다. 잔 다르크가 오직 성녀로 추앙받는 영광과 명예만을 누린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너무도 빼어난 존재였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시기심 많고 사악한 무리들의 모함에 휩쓸려 결국에는 마녀로 단죄를 받아야만 했다는 사실을.
— 조안 리, 자서전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1> 중에서

공부는 잘하지만 사교적이지 못하고 내성적인 성격으로 외톨이를 자처했던 이영자 요안나에게, 주매분 수녀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아들ㆍ작은딸과 달리 고집불통인 큰딸을 통제하기 힘들었던 부모도 주 수녀에게 의지했다. 또한 요안나의 가정형편도 주 수녀가 요안나를 더욱 각별히 챙겨주게 만들었다. 본래 요안나 일가는 혜화동의 넓고 번듯한 기와집에서 가정부까지 두고서 제법 유복하게 살았지만, 요안나가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 아버지가 직장을 그만두고 병석에 눕게 되면서 급속도로 가난해진 것이다. 아버지의 치료비와 생활비를 감당하느라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심지어 집을 팔고 금호동 달동네의 단칸방으로 이사해야 할 정도로 어려워졌다. 가뜩이나 ‘귀족학교’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부잣집 딸들이 많았던 성심학교에서 행여 한창 사춘기인 요안나가 상처를 받을까봐, 주 수녀는 더욱 신경을 써주었다.

요안나가 중학교 3학년이 되던 1960년에 4.19 혁명이 일어났다. 1960년 4월 19일, 성심여중고에서는 요안나를 포함한 학생 몇몇을 불러 “오늘은 하교하지 말고, 교내 수녀원에서 하룻밤을 묵도록 해라.”라고 지시했다. 불려온 아이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어른들의 말씀을 잘 듣는 얌전한 아이’와는 거리가 멀었던 ‘말썽꾸러기’들이었다는 것이다. 어째서인지 자세한 설명이 없어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색다른 경험에 소녀들은 하룻밤을 재미있게 보냈고, 다음날에야 이유를 알게 되었다.

학교 측에서는 위험한 시위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취한 조치였지만[9], 요안나는 ‘역사적인 현장’에 참가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과 뜻을 같이하는 학생들과 함께 거리 청소와 부상자 위문 등의 활동을 했다. 또한 4.19 혁명을 계기로 하여 처음으로 정치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고, 훌륭한 정치로 역사에 이름을 날리고 나라를 편안하게 했던 왕이나 관료 등의 위인전을 탐독하게 된다.

그러나 이듬해 일어난 5.16 군사정변으로 세상이 다시 한 번 바뀌었고, 그 변화는 고작 고등학교 1학년이던 요안나도 학교에서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불과 작년에 4.19 혁명으로 인해 주목받았던 집안의 딸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풀죽어버렸던 것이다. 그로 인해 ‘정치’와 ‘정치가’에 대한 요안나의 관심은 시들해져 버렸고, 그녀의 관심사는 ‘정치’보다 ‘인간’ 그 자체와 ‘인간의 심리’로 옮겨진다. 그러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하여 그녀는 다방면의 독서를 했다. 고등학교 내내, 심지어 대학입시를 코앞에 둔 3학년이 되어서도 그녀는 온갖 책들을 읽곤 했다. 그리고 ‘심리학과에 진학하여 인간과 인간의 심리에 대해 깊이 탐구해보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되었다.

서강대학교 진학과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와의 만남

주 수녀의 따스한 보살핌과 가르침 속에서 요안나는 성심여중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고, 1964년 3월 서강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다. 사실 요안나는 성심여자대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지망했지만 (중학교 진학 때와 마찬가지로) 일련의 사건을 겪은 끝에 생각지도 못한 학교로 진학하게 되었으며, 우연처럼 보이는 진학은 그녀의 인생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았다.

요안나가 대학에 입학하던 1964년부터 성심여대가 개교되었는데, 성심여고에서는 ‘성심여대 4년 전액 등록금+생활비’를 지원해주는 장학생을 딱 1명 선발했다. 다들 언제나 전교 1등을 독차지하는 요안나가 당연히 선발될 것이라고 믿었고, 요안나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요안나는 탈락했고 요안나보다 공부를 못했던 다른 학생이 선발되었다.

요안나는 무척 충격을 받았고 창피해서 한동안 학교에도 가지 못했지만, 주 수녀님의 꾸중과 격려로 다시 기운을 차리고 공부하며 다른 대학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울대학교 심리학과를 지망했지만 주 수녀는 그녀에게 서강대 진학을 권했는데, 아직 신앙심이 깊지 못한 요안나를 가톨릭계 대학에 보내어 신앙심을 더욱 키우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또한 주 수녀는 당시 서강대 초대 학장(총장)이던 미국인 케네스 신부와 친분이 있었는데, 자신이 성심여중고에서 요안나를 지도하고 보살폈던 것처럼 서강대에서 케네스 신부가 요안나를 돌봐주길 바랐다.

주 수녀는 내켜하지 않는 요안나를 데리고 서강대에 가서 케네스 신부에게 인사시킨다. 그러나 이 만남이 훗날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케네스 신부도, 주 수녀도, 요안나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만약 케네스 신부와 요안나가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주 수녀는 결코 두 사람에게 서로를 소개해주지 않았을 것이다.)

케네스 신부는 주 수녀와 요안나를 친절하게 맞이해주었고, 그녀들을 이끌고 캠퍼스 이곳저곳을 다니며 안내해주었다. 서강대 설립 멤버인 케네스 신부는 누구보다도 서강대 구석구석을 잘 알았기에 열의와 자부심에 차서 열심히 설명해주었고, 학생식당에서 손수 커피까지 대접했다. 그리고 요안나에게 “혹시 마음이 바뀌어 우리 학교로 온다면 대환영이다.”라고 말하며 캠퍼스투어를 마쳤다. 케네스 신부로부터 강렬한 인상을 받은 요안나의 마음은 짧은 시간 동안 180도로 바뀌었고, 당시 서강대에는 심리학과가 없었으나 요안나는 지망 학과를 철학과로 바꾸면서까지 서울대 대신 서강대에 입학원서를 제출한다. 그리고 차석으로 합격한다.[10]

1964년 3월, 이영자 요안나는 서강대학교에 입학한다. 신입생들 중에서 성적우수자들은 학장인 케네스 신부와의 다과회에 따로 초대되었다. 케네스 신부와 한참 신나게 수다를 떠는 다른 학생들과 달리, 요안나는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타고난 내성적인 성격도 있고, 수석을 놓쳐서 못내 아쉬워 기분이 그다지 유쾌하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몇 달 전에 고작 1번 만났던 케네스 신부가 자신을 알아볼지 확신이 없었다. 하지만 케네스 신부는 몇 달 전에 교복 차림으로 주매분 수녀를 따라왔던 요안나를 알아보고 ‘조안 리’라고 부르며 그녀를 반겨주었고, 다과회가 끝나자 다른 신입생들은 조안에게 “케네스 신부님을 잘 아느냐”고 질문하며 부러움과 호기심과 약간의 질투심이 섞인 시선을 보냈다. 아침에 속상한 마음으로 등교했던 조안이었지만, 케네스 신부와의 서강대 캠퍼스투어 때 그랬던 것처럼 조안은 180도 마음이 바뀌어 한껏 행복해진 기분으로 하교했다.

입학 직후부터 조안은 케네스 신부의 제안을 받아, 그의 원고 번역을 돕게 되었다. 당시 학장직을 존 데일리(John Daly) 신부에게 내주고 학생처장직을 맡고 있던 케네스 신부는 한국의 여러 신문잡지칼럼을 연재하고 있었는데, 영어가 모국어인 그로서는 한국어한국인만큼 완벽하게 글을 쓸 수 없었고, 그래서 ‘영어를 잘한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한국인 학생인 조안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것이다. 케네스 신부와 조안은 아침마다 만나서 함께 영어-한국어 번역 작업을 했고, 서로에게 각자의 모국어를 가르쳐주곤 했다. 두 사람의 영어-한국어 실력은 날이 갈수록 일취월장했고, 그에 비례하여 두 사람의 친분도 점점 깊어졌다.

대학생이 되어서도 ‘공부 잘하는 외톨박이’라는 조안의 캐릭터는 여전했고, 친구를 사귀기보다는 학교 도서관에 틀어박혀 혼자서 책 읽는 것을 즐겼다. 그런 그녀를 위해 케네스 신부는 “이번 여름방학 때 캠프에 참가해보라”고 권했다. 조안은 내키지 않았지만 존경하며 따르는 스승인 케네스 신부의 충고를 받아들여, 여름캠프에 참가했다. 장소는 강원도 양양군 하조대의 바닷가에 있는 서강대학교 연수원으로, 케네스 신부가 직접 한참 발품을 팔아 한국의 여러 경치 좋은 지역들을 탐방한 끝에 땅을 매입하여 건립한 시설이었다. 하조대로 떠나는 버스 안에서까지 조안은 시큰둥했지만, 며칠간 바닷가에서 또래 학생들과 어울려 뛰어놀며 그녀는 자신도 놀랄 정도로 마음을 열게 되었고, 몸도 마음도 한층 건강해져서 서울로 돌아왔다.

1학년 2학기가 되어 다시 캠퍼스에서 만난 케네스 신부에게 조안은 여름의 추억들을 들려주다가 문득 바다에 빠져 물을 잔뜩 먹었던 이야기를 꺼냈고, 조안이 수영을 못한다는 사실에 놀란 케네스 신부는 그때부터 직접 조안에게 수영을 가르치기 시작한다. 실내수영장뿐 아니라 해수욕장까지 데리고 다니며, 케네스 신부는 조안에게 수영을 가르쳤다.

우리가 즐겨 찾았던 수영장은 인천의 송도해수욕장이었다. 때마침 1964년은 송도해수욕장이 최초로 문을 열었던 해였기에, 바다는 더없이 깨끗했고 찾아오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었다. 케네스 신부님은 그곳에서 내게 수영을 가르쳤다. 팔을 움직이는 법, 숨을 내쉬고 들이쉬는 법, 다리로 물장구치는 법… 아무리 버둥대도 앞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자꾸 가라앉기만 하고 온몸에 힘이 빠져 더는 허우적거릴 수도 없을 즈음이 되면, 나는 마치 어린 딸아이처럼 신부님의 등에 올라타 두 팔로 그분의 목덜미를 꼭 껴안고 있었다. 그러면 신부님은 “그래, 좀 쉬었다 하자.”라고 고개를 끄덕거리면서, 나를 업은 채로 저 드넓은 바다 한가운데로 자꾸만 나아갔다.

“조안, 보이지? 저기 저 돌섬. 저기까지 가는 거야. 그때까지 손을 놓으면 안 돼?” 그분이 팔을 휘저어 앞으로 나아갈 때마다, 나의 시야는 바다의 표면 위로, 또 아래로 부드럽게 넘나들었다. 두 손을 꼭 깍지 낀 채로 킬로렌 신부님의 목덜미에 귀를 밀착시키면, 그 튼실하고 힘찬 육체의 저 밑바닥에서는 건강한 심장박동 소리가 흡사 발동선의 기적소리처럼 들려왔다. 눈부신 한여름의 태양은, 무수히 만들어지는 파도의 골과 산마다 은빛 축복들을 하염없이 꽃피워놓고 있었다. 해변을 버리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가면 갈수록 사람들의 목소리는 가물거리고, 이윽고 사방은 파도소리와 그분의 심장박동 소리와 노처럼 휘저어지는 힘찬 팔놀림 소리만으로 가득해져 버린다.

그리고… 내 몸의 저 깊은 곳에서 들려온다. 그분의 넓은 등을 대지만큼이나 든든하게 여기고, 그곳에 엎드려 하염없이 편안한 잠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행복한 숨결들… 참말이지 어디까지라도 그렇게 갈 수 있을 듯했다. 자꾸만 코앞으로 다가오는 그 돌섬이 조금만 더 멀리 가주었으면 하는 염치없는 소망이, 찬 바닷물에 맞닿아 있는 나의 얼굴을 아무도 모르는 사이 붉게 물들이곤 했다.
— 조안 리, 자서전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1> 중에서

케네스 신부와의 사랑, 주변의 반대

수영뿐 아니라 두 사람은 매주 일요일마다 함께 등산을 즐기고, 영화를 보고, 식사를 하면서 점점 더 가까워지고 친해진다. ‘우리의 관계를 뭐라고 정의해야 좋을지 모르겠다’고 말하는 조안에게, 케네스 신부는 너무도 간단하게 ‘친구’라는 답을 내놓는다. 조안이 대학에 입학하여 처음으로 맞이한 1964년의 크리스마스 때는, 케네스 신부가 새벽부터 조안의 집을 찾아와 그녀를 불러내기도 했다. 두 사람은 함께 아무도 없는 고요하고 적막한 한강변을 산책하며 추억을 만들었다.

2학년 2학기부터 조안은 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어느 외국 사회사업가로부터 등록금 전액과 용돈까지 지원해주는 장학금을 받게 되었고, 영어 번역 아르바이트 등으로도 용돈을 벌고 있었기에,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던 ‘혼자서 자취하기’라는 꿈을 드디어 실행에 옮긴 것이다. 이후 케네스 신부는 종종 그녀의 자취방에 들러 함께 저녁을 먹고, 를 마시며, 밤이 이슥하도록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제관으로 돌아가곤 했다. 케네스 신부가 순대만두 같은 주전부리를 사들고 오기도 했고, 조안이 어설픈 솜씨로 찌개를 끓이고 생선을 구워 밥상을 차리기도 하는 등, 두 사람은 마치 소꿉장난이라도 하는 것처럼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우정이 점점 더 깊어질수록 주변에서는 좋지 않은 시선과 말들이 오갔고, 특히 케네스 신부가 조안의 자취방에 드나들자 소문은 더욱 심해졌다. 케네스 신부가 늦은 밤에 조안의 자취방에서 나오는 모습을 여러 서강대생들이 수차례 목격했고, 그들에 의해 “케네스 신부와 조안이 아예 살림까지 차려버렸다”는 소문이 학교에 널리 퍼졌다. 조안은 너무나도 억울해하며 분통을 터뜨렸지만, 급기야는 학장 존 데일리 신부가 케네스 신부에게 정식으로 “한 제자와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으니 주의하십시오.”라는 경고문을 보내기까지 했다. 결국 케네스 신부와 조안은 ‘단둘이서 만나는 것은 자제하되, 다른 여러 사람들과 함께하는 자리에서는 자연스럽게 어울리자’고 합의했지만, 막상 그렇게 하니 이전의 만남과 교류가 너무도 그리웠다.

1966년, 대학 3학년이 된 조안은 철학과에서 영문과로 전과한다. 케네스 신부와의 관계는 여전했다. 매일 아침마다 했던 한국어-영어 강습과 번역은 중단된 지 오래였고, 캠퍼스에서 마주치면 가벼이 인사만 나누고 각자 갈 길을 갔고, 강의실에서 만나면 수업에 관한 이야기만 주고받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단정하고 건전하게 정돈되자 다른 사람들은 모두 만족했지만, 조안은 마치 억지로 무대에 불려나와 마음에도 없는 연기를 하는 듯한 기분, 마치 꼭두각시가 된 기분이었다. 그리고 케네스 신부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여름방학이 되자 조안은 농활에 참가했다. 고된 육체노동으로 몸을 지치게 하면 어지러운 마음도 가라앉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케네스 신부를 그리는 그녀의 마음은 농활이 끝날 때까지도 진정되지 못했고, 그녀는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다음 행선지로 떠났다. 1학년 여름방학 때도 참가했던 여름캠프로, 장소도 그때와 같은 서강대학교 연수원이었다. 캠프에는 케네스 신부도 참석했지만, 여러 사람들이 어울린 행사에다가 작년 2학기에 했던 약속도 있기 때문에, 둘만의 시간을 보내는 것은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러나 캠프가 끝나고 사람들이 잠자리에 들자, 케네스 신부는 조안을 찾아와 그녀를 따로 불러냈다. 조안은 기꺼이 반가운 마음으로 그를 따라갔다.

두 사람은 1964년 크리스마스 새벽에 함께 한강변을 거닐었던 것처럼, 아무도 없는 해변을 걸으며 그간 나누지 못했던 대화들을 나누었다. 케네스 신부는 자신의 마음도 조안과 같음을 고백하며, 이전처럼 조안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며 애정을 쏟아주지 못하는 현실에 대해 아쉬움을 토로했다. 조안은 그런 그를 따스하게 위로해주며, 힘든 가운데서도 서로 같은 마음으로 상대를 그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위안을 얻는다. 두 사람은 밤하늘을 가득 채운 별들을 보며 즐거워했는데, 훗날 조안은 이때의 추억을 영원히 기억하기 위하여 자신이 창업한 회사의 이름을 ‘스타커뮤니케이션(Star Communication)’이라고 짓는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조안은 행복한 마음으로 3학년 2학기를 맞이했지만, 캠퍼스에서 케네스 신부를 더 이상 만날 수 없었다. 2학기부터 케네스 신부는 서강대학교를 떠나 머나먼 전라남도 광주시[11]에 있는 대건신학대학[12]의 제2대 학장으로 부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생처장’에서 ‘학장’으로 부임하는 것이니 좌천은 아니지만, 아직 서강대 학생처장 임기가 한참 남아있는데 다른 곳으로, 그것도 서울에서 한참 머나먼 광주로 옮겨지는 것은, 역시 그리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서로 멀리 떨어져서도 케네스 신부와 조안은 거의 매일같이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를 계속했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오히려 마음으로는 더욱 가까워졌다고 느꼈는데, 직접 대면하여 대화를 나눌 때는 꺼내기 어려운 이야기들까지 편지에는 기꺼이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관계는 ‘out of sight, out of mind’라는 격언과는 정반대로 ‘out of sight, in to the mind’였던 것이다. 또한 케네스 신부는 어쩌다 서울에 올라올 일이 있으면 꼭 조안을 만나곤 했고, 때로는 조안을 만나기 위하여 일부러 없던 일까지 만들어 서울에 올라오기도 했다.

3학년 2학기가 끝나고 겨울방학을 맞이한 조안은, 뜻밖의 반가운 광고를 보게 된다. 한국에 파견된 미국인 평화봉사단 단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줄 강사를 모집한다는 내용이었다. 평화봉사단은 한국의 여러 지역들과 대학들을 순례하는데, 그중에는 대건신학대학도 있었다. 조안은 ‘대건신학대학’이라는 교명을 보자마자 한국어 강사 모집에 지원했고, 어렵지 않게 합격했다. 그리고 지루한 여정 끝에 마침내 대건신학대학에 도착했다. 비록 ‘단 며칠간, 다른 여러 사람들과 함께’라는 조건이지만, 떳떳하게 케네스 신부를 실컷 보며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케네스 신부도 조안을 반겼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조안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평화봉사단과 함께 대건신학대학을 떠나야 했다.

마지막 행선지는 경상북도 경주시였다. 경주에서의 일정도 끝나자 평화봉사단은 뒤풀이 파티를 성대하게 했다. 파티도 끝나고 모두 잠자리에 들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분명 전라남도 광주시 대건신학대학의 사제관에 있어야 할 케네스 신부가, 경주 평화봉사단 숙소에 나타난 것이었다.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며 “무슨 일로 오셨나요?”라고 묻자, 케네스 신부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조안을 만나러 왔습니다. 조안과 함께 겨울 바다를 보러 가려고요.

케네스 신부는 사람들을 뚫고 조안에게 와서 손을 내밀었고, 조안 역시 망설이지 않고 그의 손을 잡고 따라나섰다. 사람들의 경악하는 시선을 뒤로 한 채, 케네스 신부와 조안은 숙소를 빠져나와 강원도 속초시로 향하는 버스를 타고 둘만의 여행길에 올랐다. 두 사람은 케네스 신부의 계획대로 겨울 바다를 실컷 보았지만, 계획에 없었던 일이 벌어졌다. 폭설로 도로가 온통 마비되어, 여행을 마치기로 예정했던 날짜에 속초를 떠나지 못하고 며칠 더 머물러야 했던 것이다. 1966년에서 1967년으로 넘어가던 겨울, 케네스 신부와 조안은 눈이 내리는 고요한 가운데 고립되어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대화들을 실컷 나누었다. 그리고 이 사건은 두 사람에게 기회가 되어주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과연 무엇인지, 두 사람이 서로에게 가지고 있는 감정은 무엇인지, 그리고 앞으로 두 사람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좋을지,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였다.

케네스 신부와의 결혼

만약 발전시키고 완성시킬 수 없는 사랑이라면, 그러한 사랑의 확인은 차라리 ‘종신징역’의 형벌을 선고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 조안 리, 자서전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1> 중에서

속초로 둘만의 여행을 다녀온 뒤로, 케네스 신부와 조안을 향한 시선들은 더욱 따가워졌다. 두 사람이 1965년 2학기 이후로는 ‘필요 이상으로’ 가깝게 지내지 않고 건전하게 ‘스승과 제자’이자 ‘사제와 평신도’로서만 지내고 있다고 여겨지고 있었기에, 세간의 충격과 분노는 더욱 컸다. 하지만 케네스 신부와 조안은 더 이상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하기로 결정했다.

1967년 3월, 조안은 대학 4학년이 되었다. 여름방학을 맞아 모처럼 서울에 올라온 케네스 신부로부터 테니스를 배우며, 조안은 ‘테니스공을 라켓으로 받아치는 것보다, 케네스 신부님의 마음에 제대로 응답하는 것이 힘들다’라고 생각했다. 케네스 신부는 곧 광주로 내려갔고, 며칠 후 조안은 광주 대건신학대학으로 찾아가 케네스 신부에게 “함께 등산을 가자”고 청했다. 예고도 없이 찾아와 졸라대는 조안에게 놀랐지만, 케네스 신부는 반가워하며 그녀와 함께 무등산으로 향했다. 험하고 높은 산을 둘이서 의지하며 끝까지 올라 정상에서 산 아래를 바라보며, 조안의 머릿속을 스쳐가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 우리는 이미 오래 전부터 ‘부부’였던 거야!

조안이 서울로 돌아가고 며칠 후, 케네스 신부는 편지로 그녀에게 청혼했다. 조안은 기꺼이 “Yes!!”라고 응답했다. 두 사람은 이제 ‘스승과 제자’이자 ‘사제와 평신도’라는 관계를 넘어 한 ‘남자’와 한 ‘여자’로서 서로를 간절히 사랑하고 있음을 확인했고, 그러므로 ‘결혼’이라는 관계로 맺어져 영원토록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하나가 되고, 가정을 꾸려 자녀들을 낳아 기르며 함께 살고 싶었다.

물론 케네스 신부와 조안이 결혼한다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말도 안 되는 불가능한 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1919년생인 케네스 신부는 당시 48세의 미국인 출신 중년 교수였고[13], 1945년생인 조안은 토종 한국인이며 고작 22세의 대학 4학년 학생이었다. 무엇보다도 케네스 신부는 평생 독신으로 정결을 지키며 하느님과 사람들을 섬기는 데 헌신하겠노라고 맹세한 가톨릭 신부였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예수회에 입회하여 30년의 세월을 모범적인 수도자ㆍ신부ㆍ교육자로서 살아온 명망 높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오직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하기 위하여 이 모든 것들을, 즉 그동안 자신이 살아온 인생 전체를 기꺼이 버리기로 마음먹는다.

케네스 신부와 조안이 결혼하겠다고 밝히자, 찬성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양쪽 집안, 서강대학교, 예수회, 가톨릭교회 모두 경악하며 강력하게 반대하고 나섰고, 두 사람은 손가락질을 받는다. 케네스 신부는 조안의 집에 방문하여 가족들과 인사를 나눈 적도 있고, 조안의 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문병한 적도 있었기에, 조안의 부모도 케네스 신부를 알고 있었으며 그에 대해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딸의 스승으로서 좋은 분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지, ‘결혼’에 대해서는 “말도 안 된다!!”며 펄쩍 뛰었다. 그럼에도 조안이 끝내 뜻을 꺾지 않자, 아버지는 아예 조안과 의절하겠다고 선언했다. 부성애가 극진하셨던 아버지의 의절 선언에, 조안은 몹시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응은 그나마 양호한 편이었는데, 집안에서 조안은 그저 ‘철없는 딸’일 뿐이었지만 집밖에서는 그야말로 ‘악녀(惡女)’, ‘마녀(魔女)’, ‘요녀(妖女)’, ‘사탄’으로 지탄을 받았기 때문이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유혹이나 강압이 아니라 서로 사랑에 빠진 것이고, 굳이 비판한다면 성직자이고 나이도 인생경험도 훨씬 많아 더욱 지혜롭게 행동해야 했을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 신부의 처신을 비판하는 편이 더 옳았을 테지만, 비판의 화살은 대부분 어린 여학생인 조안에게 집중되었다.

사람들은 조안을 ‘신부를 유혹한 사악하고 요사스러운 악마 같은 여자’, ‘재산과 명예를 탐내어 아버지뻘인 중년 남성과 결혼하려는 꽃뱀’으로 취급했다. 캠퍼스 어디에서나 조안은 차가운 눈초리와 맞닥뜨렸고, 손가락질을 당했고, 험담을 들었다. 그녀의 편은 아무도 없었고, 학교에서는 그녀에게 자퇴를 종용했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잘못한 것이 없다. 나쁜 것은 나를 비난하는 가족, 학교, 예수회, 가톨릭교회이고, 나는 억울하게 핍박받는 가련한 피해자이다.”라고 굳게 믿었던 그녀는, 자퇴 권유를 단호히 거부하고 계속 학교에 다녔다. 하지만 사람들의 비판 앞에 독하게 맞섰던 그녀 역시 연약한 인간에 불과했다. 그녀가 캠퍼스에서 홀로 버틸 수 있었던 유일한 힘은 오직 케네스 신부의 사랑뿐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케네스 신부와의 연락이 단절되었다. “서울에 올라가 예수회의 어른 신부님들께 사실대로 말씀드리고 정식으로 환속 절차를 밟겠다”고 말했던 그였기에, 기다리고 있던 조안은 어리둥절했다. 이리저리 수소문해 보니, 케네스 신부는 성모병원 정신과 병동에 입원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케네스 신부의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생각한 예수회 측의 조치였다. 조안은 병원으로 찾아가 어렵게 감시망을 뚫고 케네스 신부의 병실에 도착했으나, 약기운에 취하여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케네스 신부의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이내 정신을 차리고 조안을 알아본 케네스 신부는 차분하게 “아직까지 나는 사제이고 수도자이므로, 장상(長上)의 지시에 순명하여 내 발로 병원에 왔다”며 조안을 달랬다. 곧이어 병원 보안요원들이 들이닥쳐 조안을 끌어냈다. 조안은 끌려나가는 와중에도 케네스 신부에게 수없이 사랑한다고 눈물을 쏟으며 외쳤고, 케네스 신부 역시 마찬가지였다.

조안이 이렇게 병원까지 찾아와 한바탕 소란을 피우자, 예수회와 성모병원 측에서는 아예 조안이 병원 근처에 접근하지도 못하게 했다. 그리고 예수회에서는 케네스 신부를 미국으로 보내버린다. 케네스 신부의 간곡한 요청으로, 예수회에서는 조안에게 케네스 신부와의 짧은 작별인사를 허용했다. 제대로 먹지도, 씻지도, 머리를 빗지도 못한 채 시체처럼 자취방에 누워있던 조안은 케네스 신부의 출국 직전에야 연락을 받고 김포공항으로 달려갔으며, 케네스 신부가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의 짧은 순간 동안 눈물로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케네스 신부는 조안을 안심시키며 미국으로 향했다.

‘조안 리라는 여자를 너무나도 사랑하게 되어, 환속하여 그녀와 결혼하려 한다’는 케네스 신부에게 예수회 미국 위스콘신 관구장 신부는 ‘잘 생각해 보라’고 거듭 당부했고, 환속과 결혼을 마음먹었지만 아직까지는 사제이고 수도자였던 케네스 신부는 이제까지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장상의 명에 순명한다. 그는 예수회 수도원에 머물며 치열하게 기도하고 묵상하며, 자신과 조안의 결정이 옳은 것일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그래도 그의 마음은 끝내 변하지 않았고, 결국 그는 예수회에서 퇴회하여 30년 만에 ‘일반인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이 된다. 하지만 킬로렌 일가는 일반인이 되어 돌아온 케네스를 환영하지 않았다. 케네스의 동생들은 형/오빠를 가문의 망신거리로 생각했다.

케네스는 갈 곳 없이 방황하다가 간신히 어느 불우 어린이청소년 시설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그가 받는 금액은 월급이라기에는 너무도 민망한 액수였다. 그가 묵고 있던 허름한 숙소의 방세를 지불하면, 남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사제가 아닌 일반 시민으로서 첫 월급을 받은 기념”이라며, 얼마 남지 않은 돈의 대부분을 털어 작은 브로치를 하나 사서 조안에게 선물로 보냈다. 머나먼 한국에서 선물을 받아든 조안은 “아직 몹시 추운 겨울이지만, 나는 전세계에서 가장 먼저 봄을 맞이한 여자”라며 감격했다.

그러는 사이 조안은 1968년 2월 서강대학교 영문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처음에 학교 측에서는 그녀에게 “세간이 시끄러우니 졸업식에 참석하지 말라”고 통보했으나, 며칠 후 입장을 바꾸어 “졸업식에 참석하라”고 다시 통보했다. 우등상을 받기로 되어 있는 조안이 나타나지 않으면 그 역시 어색한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물론 학교의 입장 따위야 어떠하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졸업식에 참석할 생각이었던 조안은 분노로 헛웃음을 지었다. 케네스 신부와의 사랑 때문에 무수한 비판과 손가락질과 적대적인 눈초리를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버티어온 4년을 마무리하는 행사에, 그녀로서는 반드시 참석하리라고 마음먹었던 것이다. 화기애애하고 떠들썩하던 졸업식장은 그녀의 이름이 불리자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싸늘해졌고, 고요한 가운데 단상 위로 오르는 그녀의 하이힐 소리만이 또각또각 울려퍼졌다. 조안에게 우등상을 수여하는 서강대 제2대 총장 존 데일리 신부도, 상을 받는 조안도, 적의에 가득한 시선으로 서로를 노려보았다.

졸업식이 끝나자마자 조안은 즉시 학교를 빠져나와, 자취방을 정리하고 케네스가 있는 미국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러나 간절한 마음과 달리 그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는데, 당시 ‘조안 리에게 여권비자를 발급해주어서는 안 된다’는 탄원서들이 외무부와 주한미국대사관에 무수히 날아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케네스가 억지로 미국으로 내보내진 것과 정반대로, 조안은 아무리 미국으로 떠나려고 해도 발목을 붙잡혀 한국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안은 사방팔방 뛰어다니며 필사적으로 애쓴 끝에, 심지어는 자신과 케네스를 갈라놓으려고 애썼던 존 데일리 신부에게까지 끈질기게 매달려 애원한 끝에, 어렵게 여권과 비자를 발급받아 혈혈단신으로 미국비행기에 오른다. 김포공항으로 그녀를 배웅하러 나온 사람은 어머니뿐이었다.

나는 시카고행 비행기 안에서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편지로 전해온 그분의 근황을 읽어보면, 당신의 몸 하나 누이실 곳도 마땅치 않은 모양이었다. 남들은 자신이 해온 일에서 일가(一家)를 이루고 있을 나이에 돌연 여태껏 해오던 일들을 그만두셨으니, 변변한 일자리 하나를 마련하는 것도 하늘의 별따기처럼만 느껴지시는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결혼 문제는 차치하고서라도, 당장 생활을 영위할 수나 있는 것일까? 혹시라도 내가 생활전선으로 뛰어들어야만 하는 상황은 아닐까? 그럴 용의는 얼마든지 있다. 하지만 어떻게? 아는 사람도 하나 없고, 기껏해야 그곳에서는 휴지조각으로밖에는 소용없을 한국에서의 대학졸업장 하나만을 달랑 가지고 있는 내가 어떻게? 두메산골에서 살던 시골 아가씨가 아무 생각 없이 서울기차를 타고 무작정 상경을 감행했다고 해도, 당시의 나보다는 나았으리라. 그때의 나에게는 눈앞에 그려볼 수 없는 상상과 확신이 하나도 없었다.
— 조안 리, 자서전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1> 중에서

미국에 도착한 조안은 케네스와 천신만고 끝에 재회하여 기뻐했지만, 두 사람은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빈털터리였다. 조안은 한동안 케네스와 함께 시설에서 아이들을 돌보며, 케네스의 옆방에서 지냈다. 케네스는 허름한 숙소에 조안을 안내하며 미안해했지만, 조안이 당황하며 속상해했던 이유는 케네스와 방을 따로 써야 한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케네스는 멋쩍어하며 “아직 우리는 정식으로 결혼하지 못했으니까”라고 설명했다. 두 사람은 얇은 벽을 사이에 두고 아무 어려움 없이 대화하면서도, 하루빨리 결혼하여 한방에서 동침할 날을 손꼽아 기다리며 잠들곤 했다.

소문을 듣고 케네스의 오랜 친구인 부유한 사업가 랭로이즈가 달려와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다. 시설에서 일하고 있는 케네스에게, 랭로이즈는 따끔하게 현실을 자각시켜 주었다.

이제 자네는 사제가 아니고 생활인이야. 그리고 자네가 봉사해야 할 대상은 더 이상 예전처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아니라, 자네만을 믿고 이 머나먼 미국까지 날아온, 곧 자네의 아내가 될 이 어린 외국인 아가씨야.

케네스는 시설에서의 일을 그만두고 조안과 함께 랭로이즈를 따라나섰고, 랭로이즈는 자신의 저택으로 두 사람을 안내했다. 랭로이즈의 아내와 9명이나 되는 자녀들도 모두 케네스와 조안을 환대했고, 특히 조안과 비슷한 또래였던 장녀(첫째)는 케네스와 조안의 사랑 이야기에 열렬히 호응하며 지지해주었다.

케네스와 조안은 한동안 랭로이즈의 저택에 머물며 앞으로의 삶에 대해 계획한다. 랭로이즈는 케네스에게 “미국에 널린 것이 대학인데, 대학을 설립하고 초대 총장에 교수까지 했던 경력을 왜 아깝게 썩히고 있느냐”며 교수직을 알선해주려 애썼고, 케네스도 그의 조언을 받아들여 여러 대학들의 문을 두드렸다. 그리고 그러한 노력이 헛되지 않아, 마침내 시카고에 있는 가톨릭계 대학인 드폴대학교에 부총장으로 부임할 수 있게 되었다. 생계 문제가 해결되자, 케네스와 조안은 본격적으로 결혼 준비에 돌입했다.

가톨릭 신자가 결혼하려면 성당에서 혼인성사[14]를 받거나 관면혼인[15]을 해야 하며, 그러지 않으면 혼인조당(혼인장애)이 되어 정상적으로 성사(聖事)에 참여하며 신앙생활을 할 수 없다. 즉 혼인성사나 관면혼인 없이 사회에서의 혼인신고와 일반 예식장에서의 결혼식만 치른 신자는 성체성사(영성체), 고해성사, 병자성사를 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이미 성품성사를 받아 사제가 된 사람은 사제직을 그만둔 후에도 혼인성사를 받을 수 없다. 사제직을 그만두어도 그것은 사제로서의 권리와 의무에서 면해주는 것뿐이지, ‘사제’라는 신분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16] 환속 사제와 그의 아내가 혼인성사를 받기 위해서는 무려 교황청[17]의 허가가 필요한데, 교황청에서 허가해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이 문제에 대해 가톨릭교회가 이토록 엄격한 이유는, 만에 하나라도 환속 사제가 다시 사제직으로 돌아올 수도 있을지 모르는 가능성 때문이다.

그동안 무수히 많은 따가운 시선과 비판을 받으며 질려 있었던 조안은 ‘가톨릭교회법이나 혼인성사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다. 관청에 가서 혼인신고를 하여 사회법적인 부부가 되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입장이었지만, 조안에 대한 사랑 못지않게 하느님과 가톨릭교회에 대한 사랑도 극진했던 케네스는 ‘반드시 혼인성사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금까지 거의 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지만 케네스는 자신과 조안이 혼인성사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확신하며, 낙담하지 않고 교황청의 이곳저곳에 꾸준히 탄원서를 보냈고, 교계 내의 여러 영향력 있는 인물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정말 기적적으로 탄원이 받아들여져, 마침내 케네스와 조안은 혼인성사를 받을 수 있게 된다.

교황청의 허가에는 ‘공공연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조건이 붙었다. 즉 보통의 결혼식처럼 하객들을 초대하여 성대하게 거행해서는 안 되고, 집전 사제와 그가 부른 두어 명의 증인과 신랑신부만 참석한 가운데 혼인성사의 필수요소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은 모두 생략하고 최대한 간단하고 비밀스럽게 치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몸부림치며 기약 없이 기다려왔던 케네스와 조안은 감격했다.

마침내 두 사람은 1968년 8월 30일 시카고의 록후드성당에서 혼인성사를 받는다. 턱시도도, 웨딩드레스도, 부케도, 결혼행진곡과 축가도, 하객 1명도 없이, 명동성당의 4~5배는 되는 거대한 대성당의 문을 모두 닫아건 채, 집전자인 시카고대교구 추기경과 그가 증인으로 부른 2명의 신부[18]만이 참석한 채였다. 당시 케네스는 49세, 조안은 23세였다. 혼인성사가 끝나자 추기경과 신부들은 순식간에 사라졌고, 그 넓은 성당에 사람이라고는 아무도 없어서, 케네스와 조안은 함께 사진을 찍지도 못하고 서로 각자의 독사진을 촬영해주는 것으로 결혼사진을 대신했다. 하지만 이제 두 사람은 교회법적으로나 사회법적으로나 완전한 부부가 되었다.

결혼생활

랭로이즈 일가는 케네스와 조안의 결혼을 축하하며 성대한 파티를 열어주었다. 랭로이즈 저택에서의 마지막 하루를 즐겁게 보내고, 두 사람은 “밤이 늦었는데 자고 가라”는 랭로이즈의 친절한 권유를 마다하고 둘만의 첫날밤을 보내기 위해 신혼집으로 마련한 작은 임대아파트로 향했다. 마침내 부부가 된 케네스와 조안은 처음으로 동침했고, 밤마다 함께 잠들고 아침마다 함께 눈을 뜨며 하루하루를 감격스럽게 보냈다. 이제 케네스가 드폴대학교에 출근을 시작하기만 하면, 경제적인 문제도 해결될 것이었다. 그때까지 두 사람은 얼마 되지 않는 돈으로 버티고 또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집 근처의 벼룩시장에서 저렴한 가격의 물건들로 신혼 살림들을 장만하면서도, 두 사람은 행복해했다.

그러나 드폴대학교에서 돌연 입장을 바꾸어, 케네스를 부총장으로 초빙하지 않겠다고 통보해왔다. 케네스는 자신이 정식으로 교황청의 허가를 얻어 혼인성사를 받았음을 설명했다. 하지만 케네스가 여성과 (그것도 자신이 가르치던 까마득히 어린 여학생과) 사랑에 빠져 사제직을 버리고 환속하여 결혼한 인물이라는 사실만은 부정할 수 없는 엄연한 사실이었고, 그 때문에 학교 측에서는 그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했다. 케네스는 망연자실했고, 조안은 자신과 케네스의 사랑을 인정해주지 않는 세상에 다시금 맹렬하게 적개심을 불태우며, 보란 듯이 케네스와 행복한 결혼생활을 해내리라고 마음먹는다.

조안은 낯선 외국 땅에서 직업소개소의 도움으로 직장을 구해 일하기 시작했는데,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녀가 스타커뮤니케이션을 창업하는 데 크게 영향을 주었다. 케네스도 일리노이공과대학교에서 강의하게 되었다. 케네스가 강의뿐 아니라 학교 발전기금 모금위원회 책임자까지 맡게 되면서 살림은 더욱 나아졌고, 조안은 일리노이대학교(시카고캠퍼스) 대학원에서 (고등학교 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심리학을 공부하여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1970년에는 시카고에서 큰딸 안젤라(Angela)를, 1972년에는 캘리포니아에서 작은딸 에이미(Amy)를 낳았다. 조안은 병원에 가지 않고 집에서 두 딸을 출산했고, 케네스는 출산하는 아내의 곁을 내내 지키다가 직접 아이를 받았다. 케네스와 조안은 교대로 안젤라를 돌보며 직장과 학업을 병행했다. 에이미가 태어날 무렵에는 조안의 친정부모가 캘리포니아로 찾아왔고, 비로소 조안은 부모와 화해했다. 조안과의 의절을 선언했던 아버지도, 비로소 노여움을 풀고 케네스를 사위로 받아들인다.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이후 케네스는 Metal Deco라는 대기업의 서부지역 판촉책임자로, 조안은 심리학 석사학위를 가지고 캘리포니아주 주정부 민원담당 카운슬러로 취업한다. 크고 넓은 집을 마련하고 아이까지 둘이나 낳아 기르며 행복하고 안정된 가정생활을 즐기던 것도 잠시, 케네스와 조안은 1973년 여름휴가차 어린 두 딸을 데리고 한국을 방문했다가 아예 한국에 정착하게 된다. 케네스는 홍익대학교 특수대학원장과 한미재단 이사장 등을 지냈다. 사업으로 항상 바쁜 아내 대신에 두 딸을 돌보는 것은 주로 케네스의 몫이었다.

케네스는 1986년 7월 3일, 미국 위스콘신주 애플톤에 있는 남동생의 집에서 향년 67세로 세상을 떠났다. 아내 조안은 41세, 큰딸 안젤라는 16세, 작은딸 에이미는 14세 때였다.

자녀

케네스와 조안은 두 딸에게 한국미국을 모두 가르치기 위해 애썼다. 미국에서 태어나 각각 3살과 1살에 한국으로 이주한 자매는, 처음에는 외국인학교에 다녔으나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배워야 한다’는 부모의 뜻에 따라 이화여자대학교사범대학부속초등학교로 옮겼다. 덕분에 자매는 한국어영어를 모두 능숙하게 구사한다. 중학교부터는 미국에서 공부했고, 미국에서 중고등학교와 아이비리그 대학을 졸업하고 각자의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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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차녀 에이미 킬로렌: 한국식 이름은 길현미(吉賢美). 1972년생(51~52세). 브라운대학교를 졸업하고 16세 연상의 프랑스인과 결혼했다. 조안은 그제야 비로소 자신의 결혼에 대하여 부모님이 느끼셨을 충격을 이해했지만, 에이미보다 훨씬 더 파격적인 결혼을 했던 그녀가 에이미의 결혼을 반대할 명분은 없었다. 에이미는 2녀(니나, 다프네)를 두었고, 스위스에서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다.

한국으로의 귀국과 사업

조안은 조선호텔 P.R. 매니저를 거쳐 헤드헌팅 업체인 스타커뮤니케이션을 창업했다. 다양한 국제 네트워킹을 통해 국제 비즈니스상의 난제를 해결하고 고급 인력을 공급하는 일을 했던 스타커뮤니케이션은, 1980년대 한국 경제의 급성장기와 맞물려 급성장했다.

1980년에는 불안한 정세에서도 각국 대사를 설득해 국내 최초로 스위스, 독일유럽 7국이 참여하는 코엑스 국제산업박람회를 유치했다. 1986년 FX 사업(차세대 전투기 사업) 당시, 세계 굴지의 전투기 생산회사인 미국 맥도넬 더글라스F18 한국 판매 홍보를 따낸 일화는 유명하다. 조안 리의 스타커뮤니케이션은 맥도넬 더글라스의 대행사 발탁 공모에 지원하여 당당히 낙점을 받았지만, ‘남성중심적인 한국사회에서 여성에게 전투기 판매 홍보를 맡기는 것은 무리이다’라는 이유 때문에 최종 확정이 차일피일 미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조안은 포기하지 않았고, 마침내 F18 전투기의 국내 판매를 위한 홍보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이 사업을 맡은 배경에 대하여 조안은 이렇게 밝혔다.

저는 저 자신만의 이익을 위해 외국회사의 홍보나 대행해주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제가 F18의 국내홍보를 맡은 것은, 그 기종을 구입하는 것이 우리나라의 국익에 도움이 된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후 조안은 1988 서울올림픽을 홍보하고, 1988년에는 정세가 불안정하던 북아일랜드대우전자 공장을 세우는 데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세계 최대 PR기업인 버슨마스텔러의 한국지사 사장[19]과 전문직 여성들의 국제봉사단체인 존타(ZONTA)의 한국 여성 최초 아시아지역 총재, 여성신문 이사장 등을 지냈다. 국제백신연구소(IVI)의 고문과 한국후원회 부회장을 맡아, 예방접종을 하지 못해 병들고 죽어가는 빈곤국가의 어린이들을 돕는 일에도 매진했다.

1999년부터는 탈북자들의 국제법상 난민 지위 획득을 위해 서명운동 등의 노력을 했다. 500만 명의 서명을 받아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엔인권위원회에 전달했고, 1,000만 명의 서명을 달성했을 때는 직접 뉴욕 유엔본부를 찾아가 코피 아난 당시 사무총장에게 전달했다.

말년과 사망

나이가 많아지면서 조안은 뇌출혈신장질환을 앓는 등 건강이 나빠졌다. 그녀는 현업에서 은퇴하고 대외활동도 줄였고, 2012년부터 큰딸이 살고 있는 미국에서 머무르며 요양했다. 치료와 요양을 겸하고, 손자의 재롱도 실컷 보며, 그녀는 평온한 노년을 보냈다.

2022년 6월에는 회고록 <감사(Gratitude)>를 출판했고, 모처럼 한국으로 와서 서울에서 출판기념회를 열었다. 미국에서 함께 살고 있는 큰딸뿐 아니라, 스위스에 살고 있는 작은딸도 먼 거리를 마다않고 달려와 참석했다. 조안은 지나온 삶을 돌아보면서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로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과의 결혼’을 꼽았다. 관련 기사

2022년 9월 16일,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사망했다. 향년 77세.

저서

  •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1: 주로 남편과의 만남과 사랑, 결혼과 출산에 대해 다루고 있다.
  • 스물셋의 사랑 마흔아홉의 성공2: 사업과 성공, 남편과의 사별에 대해 다루고 있다.
  • 사랑과 성공은 기다리지 않는다
  • 내일은 오늘과 달라야 한다
  • 조안 리의 고마운 아침
  • 감사(Gratitude): 조안 리의 마지막 책으로,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3개월 전에 출간된 회고록이다. 조안의 회고 외에도 차녀 에이미 외 2명이 추천사를 썼다. 고급 양장본으로 컬러 사진도 많이 넣어, 권당 제작단가가 9만원에 달한다. 비매품으로 1,000권만 제작하여 출판기념회에 참석한 130여명의 손님들과 가까운 지인들에게만 제공했기 때문에, 시중에서 구입할 수는 없다. 게다가 출판기념회를 겸해 서울 중구 장충동 반얀트리호텔에서의 점심식사도 제공했기 때문에, 조안으로서는 매우 큰 기부였다.

여담

  • 키가 168cm인데, 오늘날에도 여성의 키로는 상당히 크지만 옛날에는 굉장히 큰 키였다. 게다가 남편 케네스 에드워드 킬로렌도 키가 커서(190cm), 두 사람이 함께 다니면 더욱 눈에 확 띄었다고 한다.
  • 훗날 케네스는 조안에게 끌렸던 이유에 대해 “대부분의 학생들과 신자들은 나를 많이 어려워하는데, 조안은 그런 기색이 없고 자연스럽고 당당했기 때문”이라고 회고했다고 한다. 아무리 그가 권위의식 없이 소탈하고 편안하게 다가가려고 해도, 주변에서는 ‘종교인’이자 ‘교수’인 그를 어려워했던 것이다. 또한 그의 자유분방하고 활달한 성격은 때로 동료 외국인 신부들도 한소리 늘어놓을 정도였다. 때문에 케네스 신부는 동료 신부들의 틈에서도, 평신도들과 학생들의 틈에서도 마음이 꼭 맞는 사람을 찾기 힘들었는데, 그래서 자신을 어려워하지 않으며 역시 또래 학생들과 별로 어울리지 않던 조안과 죽이 맞았던 것이라고.

각주

  1. 남학생은 경기중학교-경기고등학교-서울대학교. 경기중과 경기여중은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면서 1971년 폐교되었다.
  2. 옛 용산예수성심신학교 성당. 신학교는 이후 종로구 혜화동으로 이사했고(現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그 자리에 성심수녀회 한국관구 본원과 성심학교들이 세워졌다.
  3. 1950년대 한국에서는 외국인을 그리 쉽게 볼 수 없었고, 아직 한국 가톨릭의 교세도 그리 강하지 않았다. 따라서 ‘수도복 차림의 서양인 수녀’란 대단히 신기한 존재였다. (다만 오늘날 성심수녀회의 수녀들은 수도복이 아닌 일반 사복을 입는다.)
  4. 당시 국민학교에서는 ‘몇 명을 경기중/경기여중에 진학시켰는가?’가 가장 중요한 실적이었으므로.
  5. 1962년 개교, 1982년 폐교
  6. 1995년 가톨릭대학교와 합병되었다. (現 가톨릭대학교 성심교정)
  7. 당시 국민학교 에서는 영어를 가르치지 않았지만, 성심국민학교에서는 영어를 가르쳤다.
  8. 피천득의 수필 <인연>에 등장하는 ‘주 수녀님’이 바로 주매분 수녀이다.
  9. 4.19 혁명에는 대학생뿐 아니라 국민학생, 중학생, 고등학생들도 여럿 참가했고, 목숨을 잃은 학생들도 많았다. 그중에는 요안나 또래의 여중생도 있었다. (한성여자중학교 2학년 진영숙)
  10. 필기점수만으로는 수석이었지만, 그해부터 대학입시에 반영된 체력장 점수를 합하니 차석으로 밀려났다.
  11. 당시에는 광주광역시가 아니라 전라남도 광주시였다.
  12. 광주가톨릭대학교. 천주교 광주대교구, 전주교구, 제주교구, 마산교구의 사제(신부)를 양성하는 신학대학이다.
  13. 1966년에 한국으로 귀화했다.
  14. 가톨릭 신자끼리 결혼할 경우
  15. 가톨릭 신자와 비신자가 결혼할 경우
  16. 비유하자면 세례와 견진을 받은 가톨릭 신자가 언제부터인가 성당에 다니지 않게 되더라도, 그의 세례와 견진의 효력은 사라지지 않고 유효한 것과 마찬가지다. 가톨릭에서 세례성사, 견진성사, 성품성사를 받으면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인호(印號)가 새겨진다고 하며, 때문에 이 성사들은 일생에 딱 한차례만 받을 수 있다. (성품성사는 부제품<사제품<주교품의 3단계가 있는데, 각 단계의 품은 1번씩만 받을 수 있다.)
  17. 당시 교황바오로 6세였다.
  18. 록후드성당의 주임신부와 보좌신부
  19. 한비야가 버슨마스텔러 한국지사 신입사원이던 시절, 조안 리로부터 큰 격려와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