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


나는 신문 없는 정부보다 정부 없는 신문을 택하겠다.

토마스 제퍼슨


新聞/news, newspaper

개요[편집 | 원본 편집]

랜덤하우스 사전에서는 신문newspaper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정기적으로 그리고 보통 짧은 간격, 특히 일간이나 주간으로 발행되며, 흔히 뉴스, 논평, 피처와 광고를 포함하는 간행물." 또한, 한국에서 신문에 관하여 다루고 있는 신문 등의 자유와 기능 보장에 관한 법률에서는 2조 1항에서 " "신문"이라 함은 정치·경제·사회·문화·시사·산업·과학·종교·교육·체육 등 전체분야 또는 특정분야에 관한 보도·논평·여론 및 정보 등을 전파하기 위하여 동일한 제호로 월 2회 이상 발행하는 간행물로서 다음 각목의 것을 말한다." 라고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두 견해를 종합하면, 동일한 제호를 가지고 최소 월 2회 이상 정기적으로 간행되며, 정치·경제·사회·문화·시사·산업·과학·종교·교육·체육 등에 대한 뉴스, 논평, 피처, 광고를 포함하는 간행물을 말한다. 이때 피처란 뉴스와 광고를 제외한 만화, 사설 등 나머지 모두를 말한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보건데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는 필수적이었으며, 따라서 어느 시기에건 존재해왔다. 이러한 정보 전달 행위는 속보성을 다투는 왕의 칙사와 사건을 판단하고 기록하며, 통사적으로 보는 역사가의 그 사이 어딘가에서 자리잡고 있었다. 기원전 6년, 로마 제국은 '악타 푸블리카Acta Publica'나 '악타 듀르나 포퓰리 로마니Acta Diurna Populi Romani' 등을 발간하였다. 이들은 석고판에 정부의 활동을 기록하여 공고하는 일종의 관보였다. 한편 동양에서도 한나라 시기부터 '저보邸報'라는 관적인 일을 공고하고 전달하는 일종의 관보가 발행되었다. 몇몇 학자들은 이들을 최초의 신문으로 간주하기도 하지만, 근대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신문이 등장한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최근의 일이다.

11세기 말, 서구 유럽에서는 점차 상업활동이 증가하기 시작하였다. 자연히 정보에 대한 요구 역시 팽창하였으며, 전 유럽에 걸쳐 업무용 편지의 유통량이 급속히 증가하였다. 1096년 십자군 전쟁이 터지고, 이스라엘 등지에 파견되어 있던 상인들이 업무용 편지의 말미에 전황을 덧붙여 보내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이것을 '노벨레Novelle, Novela'라고 불렀으며, 근대 신문의 효시인 서한 신문의 탄생이다. 서한 신문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자 일반 사람들에게도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이를 '아비시Avisi'라고 불렀다. 한편 자연스럽게도 이를 여러 장 베껴 판매하는 상인들도 나타났다. 보통 서점을 겸하였는데, 필사 신문으로 불리는 것으로 13세기 무렵 영국에서 처음 등장하게 된다.

그러나 본격적인 근대 신문의 역사는 1447년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인쇄술 발명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신문의 미래[편집 | 원본 편집]

컴퓨터가 탄생하고 인터넷이 보급됨에 따라 종이로 만들어진 신문의 종말은 예고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것에 치명타를 가한 것은 스마트폰의 등장이라고 할 수 있다. 스마트폰 등 모바일 매체는 PC가 가지고 있던 이동성이라는 단점마저 극복함으로써 종이 신문의 비교우위를 거의 없앤것이나 다름없다. 광고 수익으로 연명하던 신문사들은 악화일로를 걷고 있는 종이 신문의 재정상태에 앞 다투어 PC, 모바일로 영역을 넓히고 있으며, 뉴욕 타임즈나 워싱턴 포스트 등 세계적인 매체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이 신문은 통시적으로 사건을 보도하는 그 매체적 특성 상 여전히 일정 지분을 유지할 것이라는 전망 역시 팽팽하다.

어떻게 읽을 것인가[편집 | 원본 편집]

가장 먼저 신문사는, 그리고 기자는 결코 사회정의를 먹고사는 것이 아님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그들은 엄연히 기업으로 윌리엄스(Williams, 2010.)의 말처럼 “신문이나 방송서비스는 광고 같은 여타의 사업을 위한 매체"이다. 따라서 이들은 기사를 선택하고 작성함에 있어서 여러 단계에 걸쳐 여러 가지를 고려하게 된다. 이러한 게이트 키핑(gate keeping) 과정에서는 미디어 내용에 미치는 영향은 기자 개인의 편견bias, 미디어 관행, 조직 내부의 압력, 미디어 외적 압력, 사회 이데올로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언론사는 두 개의 권력이 지배하고 있다. 하나는 사주를 중심으로 하는 경영권이고, 다른 하나는 편집부장을 중심으로 하는 편집권이다. 이들은 각각 보도 작성에 미치는 경제적, 정치적 외압과 내적 관행으로 구체화된다. 이 두 권력은 서로 대립적으로 보도 기사 작성에 개입하는데 이것은 경영진은 이윤의 극대화를 추구하며 편집구조는 전문직주의에 근거하여 기사를 작성하려하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러스브 리저는 “가장 중요한 것은 편집권의 독립을 보장하는 소유구조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 한국의 언론사는 이 두 권력이 서로 밀착하여 작동한다. 경영권은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기의 언론 탄압을 거치면서 인사권과 예산 결정권을 무기로 편집권을 소유할 수 있었다. 이제 이것은 일반화된 관행으로 기실 기자 개인의 영향력보다 데스크와 데스크 뒤에 있는 사주의 입김이 더욱 강력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것은 민주화 이후 더욱 심해져 IMF를 지나고 나서는 상당히 강한 정파성을 띄게 되었다. 조직적으로 신문 기사에 정치적 색채를 입히는 것이다. 조중동과 한경오라는 단어는 모두 이때 탄생한 것이다. 특히 공적 이슈에 대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치고 있는 신문사에서의 의도된 정치편향성은 독자층으로 하여금 좌우를 가르고 서로에 대한 강력한 ‘구분짓기’를 요구한다. 이것은 단순한 보도 이상의 언론사 의도가 개입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대 대한민국의 신문 간 판매부수 경쟁, 논조 경쟁을 단순한 경제적 측면에서 보기는 어렵다. 이미 신문들은 약화되고 대중정당(mass party)화 하고 있는 정당을 대신하여 이데올로기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다. 그리고 신문사들은 이 경쟁 구조에서 경제적, 사회적 이윤을 획득한다.

그러나 "저널리즘은 사업이지만 특별한 종류의 사업이다." 정확한 진실을 알고자 신문을 보는 독자의 입장에서는 신문이 편파적으로 말한다는 것은 결코 좋은 상황이라고 할 수 없다. 따라서 불가피하게도 독자는 스스로 최대한 다양한 시선에서 보려 노력하여야 한다. 따라서 신문을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은, 보수적인 신문과 진보적 신문을 동시에 보는 것이다. 특히 정치적인 이슈에 대해서는 두 가지를 모두 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들은 정치적 문제에서는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하려 한다. 따라서 같은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성향에 따라 서로 전혀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보수-진보를 나누지 않고 동일하다. 이들은 사건의 한 측면 만을 강조하여 부각시킴으로써(framing) 독자의 머리 속에 있는 현실을(pictures in our head) 자기 입맛대로 만들어내고자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신문[편집 | 원본 편집]

한국의 신문은 중세 저보 등 관보에서 시작한다. 서양과는 다르게 중세 한반도의 왕조들은 민간에서 도서를 발행하거나 정보를 유통시키는 행위를 곱게 보지 않았으므로 신문이 발달한 것은 조선 말기에 다다라서였다. 한성순보, 대한매일신보 등이 이 시기에 탄생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지나 군정기, 군사독재기에 들어 탄압을 받았고 민주화에 앞장섰다. 방송에 땡전뉴스가 있었듯이, 신문의 1면에도 전두환 전 대통령이 매일같이 얼굴을 내밀던 시기였다. 1974년의 동아일보 광고탄압사건, 1980년 언론 통폐합 등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1987년의 서울의 봄에서 말미암은 민주화 이후 신문사들의 정치편향성이 강화되었고, 신문이라는 매체 자체도 침체기에 빠져들었다. 한편 인터넷 신문이 급속도로 발달, 대안 매체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이들은 기존의 신문들과 경쟁하며 앞다퉈 사람들에게 정보와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을 제공하고 있다.

관련 문서[편집 | 원본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