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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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ων Ῥωμαίων)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출발하여 지중해패권을 장악했던 국가이다.

역대 황제[편집 | 원본 편집]

수도[편집 | 원본 편집]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제정 수립 이전[편집 | 원본 편집]

왕정 시대[편집 | 원본 편집]

자세한 것은 로마 왕국 문서 참고

공화정 시대[편집 | 원본 편집]

자세한 것은 로마 공화국 문서 참고

공화정에서 제정으로[편집 | 원본 편집]

지중해의 패권국으로 자리잡은 로마는 시민과 원로원계급의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된다. 그러는 와중에 민중파의 일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하여 갈리아를 복속시키고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다.

이를 견제하고자 한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반역자로 규정하였고, 이에 반발한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도하하여 카이사르의 내전을 발발시킨다. 카이사르는 내전에서는 승리하였으나 공화파에 의해 곧 암살당한다. 그러나 뒤이어 벌어진 내전에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가 초대 황제가 되어 실현한 원수정 체제 아래에서 팍스 로마나를 일구었다.

원수정 시대[편집 | 원본 편집]

옥타비아누스원로원으로부터 아우구스투스 칭호를 받은 시점을 공화정이 종식되고, 제정이 시작된 시점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는 라틴어군주를 뜻하는 렉스(Rex)라는 칭호의 사용을 거부하고, 제1시민을 뜻하는 프린켑스(Princeps)를 칭했다. 또한 공식적으로 공화정의 폐지를 선언하지 않고, 오히려 공화정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공화정의 시스템을 교묘하게 이용하며 통치했다. 이렇게 공화정도 아니고 제정도 아닌 애매한 체제라서 프린켑스에서 따온 프린키파투스(Principarus)라고 부르고, 이것의 번역어가 바로 원수정이다. 이 체제는 팍스 로마나라는 전성기를 이끈 원동력이었으나 군인 황제 시대에 이르러 한계를 드러냈고, 3세기 말에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전형적인 군주제라 할 수 있는 전제정을 도입하면서 종식되었다.

팍스 로마나[편집 | 원본 편집]

로마의 평화라는 뜻을 가진 로마 제국의 전성기로, 로마가 강력한 패권으로 주변국들을 제압하여 장기간 평화가 유지된 시대를 뜻한다. 그래서 라틴어로 평화를 뜻하는 팍스는 강력한 패권 국가의 주도하에 형성된 평화를 의미하게 되었다. 이 시대는 아우구스투스 시대부터 오현제 시대까지 200여년간 유지되었으나, 콤모두스의 폭정으로 인해 제국이 쇠퇴하면서 종식되었다.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편집 | 원본 편집]

아우구스투스가 개창한 로마 제국 최초의 왕조인데, 역대 황제들에게 적장자가 없어서, 여러 귀족 가문들의 복잡한 혼맥에 의해 제위가 결정된 시대이다. 이 가문들 가운데 율리우스 가문과 클라우디우스 가문은 왕정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가문이며, 세력도 가장 막강했기에, 이 시대를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라고 부른다.

네 황제의 해[편집 | 원본 편집]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5대 황제 네로가 민심을 잃고 축출되어 자살한 후, 반란군을 이끈 갈리아 총독 갈바가 로마에 입성하여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갈바는 얼마 안 가서 네로의 친구였던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에게 살해되었고, 오토가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오토 역시 비텔리우스라는 군벌에게 살해당하고, 비텔리우스가 황제로 즉위했다. 이후 비텔리우스 역시 반란군에게 살해당했는데, 비텔리우스를 제거한 베스파시아누스가 플라비우스 왕조를 개창함으로써 내전이 종식되었다. 이러한 개막장 사건들의 연속이 불과 1년 동안 일어났기에, 이를 네 황제의 해라고 부른다.

플라비우스 왕조[편집 | 원본 편집]

이전 왕조인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를 주도한 두 가문이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명문가였던 반면, 플라비우스 가문은 공화정 말기에 이르러서야 중앙 정계에 진출한 신흥 가문이었다. 이 가문 출신의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황제의 명을 받고 유대인 반란을 진압하러 파견되었다가, 중앙에서 내란이 일어나자 장남 티투스에게 유대인 반란 진압을 맡기고, 본인은 상경하여 비텔리우스를 제거함으로써 황제로 즉위했다.

황제로 즉위한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 황제의 실정으로 야기된 중앙 징계의 혼란을 바로잡고 콜로세움 건설 등의 업적을 쌓았다. 한편 티투스는 마사다 요새를 함락시킴으로써 반란 진압을 완수한 후 예루살렘 성전을 파괴하고 유대인들을 예루살렘에서 축출했다.

이후 티투스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죽자 제위를 계승했으나, 베수비우스 화산 폭발과 2차 로마 대화재라는 대재앙이 연달아 터지자, 이를 수습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다가 과로사(...)하고 말았다.

티투스가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요절했기에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즉위했는데, 도미티아누스는 원로원과 잦은 대립을 하다가 암살당함으로써 비참한 최후를 맞이 했다.

도미티아누스의 암살로 인해 플라비우스 왕조는 대가 끊겼으나, 최전성기인 오현제 시대로 나아가는 발판을 마련한 시기였기에 플라비우스라는 이름 자체는 상당히 인기 있는 이름으로 남았다. 그래서 중세 로마 초기까지 플라비우스 스틸리코, 플라비우스 아에티우스, 플라비우스 리키메르, 플라비우스 벨리사리우스 등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플라비우스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오현제 시대[편집 | 원본 편집]

오현제는 네르바, 트라야누스, 하드리아누스, 안토니누스 피우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섯명의 현명한 황제를 가리키는 말로, 그들의 치세는 로마 제국의 최전성기로 꼽히는 시대이다. 그러나 로마 제국 쇠퇴의 씨앗이 뿌려진 시대라는 평가도 있어서, 양면성을 가진 시대라고 할 수 있다. 한편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를 제외한 황제들은 친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들여서 제위를 물려주는 양자 계승이라는 독특한 제위 계승을 택해서, 이 시대를 양자 왕조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오현제 시대와 콤모두스의 치세를 묶어서 네르바-안토니누스 왕조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는 오현제 시대의 막을 연 네르바 가문과 마지막을 장식한 안토니누스 가문의 이름을 딴 것이다.

콤모두스의 폭정과 다섯 황제의 해[편집 | 원본 편집]

오현제 시대의 마지막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오현제 가운데 유일하게 친아들을 얻어서 제위를 세습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의 유일한 친아들로서 제위를 계승한 콤모두스는 폭정과 기행으로 민심을 잃고 암살당하고 말았다.

콤모두스 암살 이후 페르티낙스가 황제로 즉위했으나, 그는 봉급을 짜게 준다는 어처구니 없는 이유로 근위대에게 살해당했고, 근위대는 봉급을 가장 많이 주겠다고 약속하는 자를 모시겠다며, 로마 황제라는 칭호를 경매의 매물로 올리는 초유의 사태를 일으켰다.

여러 부호들이 참가한 경매에서 디디우스 율리아누스가 낙찰받는데 성공하여 황제로 즉위했는데, 돈으로 황제 자리를 산 것이었기에 그의 제위는 극도로 취약했다.

그래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알비누스, 니게르 등 3명의 지방 총독이 페르티낙스의 복수를 외치며 제각기 황제를 칭하고 궐기했는데, 페르티낙스 살해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의 즉위, 3명의 자칭 황제 등장이 모두 같은 해에 일어났기에 이를 다섯 황제의 해라고 부른다.

그리고 다섯 황제의 해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가 디디우스 율리아누스,알비누스, 니게르 등을 모두 제압하고 세베루스 왕조를 개창함으로써 종식되었다.

세베루스 왕조[편집 | 원본 편집]

셉티미우스 세베루스는 오현제 시대만큼은 아니지만 장기간 재위하며 제국의 중흥을 이끌었고, 그의 사후에는 유언에 따라 장남 카라칼라와 차남 게타가 공동 황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카라칼라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게타와 그의 지지자들을 숙청하면서 다시 쇠퇴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카라칼라는 그의 본명을 딴 안토니누스 칙령을 발표하여 모든 로마 영토에 거주하는 모든 자유민에게 로마 시민권을 부여하고, 카라칼라 욕장 등의 공공 시설을 건설했으며, 나름대로 군사적 능력도 있어서 군인들의 지지도 받은 황제였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했듯이 권력 독점을 위해 친동생을 숙청하는 바람에 많은 반발을 불러왔고 이는 황제가 원로원과 자주 대립하여 국정이 혼란스러워지는 상황을 야기했다.

카라칼라는 파르티아 원정에 나섰다가 북아프리카 출신 군인 마크리누스에 의해 암살되었고, 마크리누스가 원정을 중단하고 귀국하여 황제를 칭하자, 카라칼라와 사이가 안 좋던 원로원은 이를 인준하였다.

그러나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의 아내 율리아 돔나의 동생 율리아 마이사가 세베루스 왕조를 지지하는 군인들을 규합하여 쿠데타를 일으킴으로써 마크리누스는 얼마 안 가서 축출되었고, 그녀의 손자인 엘라가발루스가 황제로 추대되었다.

엘라가발루스는 여장하고 동성애를 즐기는 등의 기행을 일삼고, 동방 속주 출신이라서 시리아의 바알 신앙을 맹목적으로 신봉하였으며, 놀고 먹는데만 열중했으나, 외할머니 율리아 마이사가 실권자였기에 제국은 나름대로 안정을 유지했다. 그러나 율리아 마이사 사후, 자신이 실권을 갖고 통치해야 할 시기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위와 같은 비정상적인 행보를 계속하여 파행을 불러왔다.

또한 그런 주제에 권력욕도 있어서 외할머니에 의해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되었던 사촌동생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를 숙청하려 했는데, 이를 눈치 챈 알렉산데르의 어머니 율리아 마이아가 쿠데타를 일으키는 바람에 역관광당해서 살해되었다.

이후 황제로 즉위한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대의 영광을 재현하겠다고 공언했으며, 엘라가발루스와는 달리 능력도 괜찮은 편이었으나, 마마보이(...)라서 자신을 옹립한 어머니 율리아 마이아가 국정농단을 일삼는 것을 묵인했다. 결국 알렉산데르 세베루스는 트라키아 출신의 군인 막시미누스 트라쿠스의 쿠데타에 의해 축출되어 살해당했고, 군인 황제 시대가 도래했다.

군인 황제 시대(3세기의 위기)[편집 | 원본 편집]

원수정 체제에 모순은 정세의 불안정을 낳았고, 3세기에 접어들어 세베루스 왕조의 알렉산데르 황제가 암살당한 뒤 군인이 추대하는 군인 황제들이 등장하여 정세의 불안정은 더 심해진다. 그 시기에 게르만족,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침략이 심해지고 국방 경비가 약화되면서 경제도 흔들리는 등 제국은 3세기의 위기를 겪는다.

전제정 시대[편집 | 원본 편집]

제국의 분열, 서로마의 멸망[편집 | 원본 편집]

후에 등장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국정 개편을 통하여 제국의 생명을 어느 정도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러나 원수정 체제에 내제한 모순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은퇴 후 다시 내전을 벌어지게 하였으며, 이 내전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을 하나로 통합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룩했던 행정 개편을 더 확고히 하였고, 군제를 개혁하였으며,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고 기독교를 공인하는 등 사회 체계도 개조하였다. 이 황제들의 개혁을 통해 나라의 정세가 3세기에 비해 안정되었으나, 제국은 하나의 황제가 다스리기에는 국경선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었고, 이에 정제, 부제가 동방, 서방을 통치하는 방식으로 안보의 향상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를 이어받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치세가 끝나고 그의 두 아들인 호노리우스아르카디우스가 각각 제국 서방과 동방을 맡게 되면서 제국은 두 개로 분리되었다.

공식적으로 제국 서부와 동부는 하나의 로마 제국이었기 때문에 동부 황제와 서부 황제 중 선임 황제인 쪽이 상대방에게 간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왕조가 절멸하고 각각 다른 혈통의 황제가 즉위하면서 따로 노는 일이 잦아졌고, 제국 동부가 제국 서부를 버린 꼴이 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침략이 심했고 또한 경제력 역시 로마에 비해 떨어졌다. 서로마는 60년간 스틸리코아에티우스 등 유능한 사령관들의 활약 덕분에 버텼으나 그 이후는 이름뿐인 유명무실한 황제가 차례차례로 등극하면서 몰락해갔고, 476년 게르만족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중세 로마(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A.D. 330~1453[편집 | 원본 편집]

비잔티움 제국 = 동로마 제국 = 중세 로마 제국

사실상 다 같은 말이다. 다만 서유럽 역사가들이 중세 로마를 이전이라 비교하려고 만든 말이지만 사실상 당시에는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이었다. 공식 명칭또한 'Imperium Romanum'.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의 고토회복전쟁을 통해 과거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의 영토를 잠시 되찾았으나 전염병이 돌고 재정난이 심해지면서 얼마 가지 못했다. 그 후 이슬람 세력이 떠오르면서 한때 위축되기도 하였으나,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마케도니아 왕조, 콤니노스 왕조가 부흥을 이루었다. 그러나 제4차 십자군 전쟁의 여파로 일시기 문을 닫게 된다.

1261년 십자군 국가인 라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제위를 회복하나, 풍파를 겪은 제국은 더 이상 과거의 제국이 아니었다. 제국은 소아시아의 영토를 잃어버렸고 그 땅에서 일어난 투르크인들의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4세기에는 오스만의 속국이나 다를 바 없는 신세로 전락했으며 1453년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전사하면서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후 모레아와 트레비존드의 최후의 잔존 세력이 남아 저항했으나 모두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제국은 당대에는 로마 제국 그 자체로 여겨졌으나, 근대에 들어 서구권 역사가들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로마 제국과 분리된 역사로 여겨져왔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