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도원

韓道源.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1 생애[편집]

1906년 1월 1일 평안남도 대동군 고평면 신흥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평양 숭실학교를 중퇴한 뒤 1925년 9월 상하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있던 매형 김예진(金禮鎭)에게 의탁했다. 이후 1926년 1월 나창헌, 이유필, 박창세, 김예진 등과 함께 병인의용대(丙寅義勇隊)를 조직하여 임시정부를 지원했고, 일제에 독립운동가 정보를 보내던 밀정 박제건을 처단했다. 또한 이봉창이 거사를 개시할 때 쓸 폭탄을 전달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했다는 설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한편 한도원은 상하이로 망명한 뒤 9년 동안 상해전차 차장으로 일했다. 그러나 1934년 병인의용대가 와해되고 전차회사에서 해고되었다. 이 시기 김구는 일제가 윤봉길훙커우 공원 의거 이후 자신을 체포하려 들고 암살을 시도하는 등 위협을 받자, 한도원에게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상하이 일본총영사관에서 근무 중인 후지이(藤井) 경부보의 밀정으로 일해달라.

이때부터 한도원은 후지이 경부보와 임시정부를 오가며 이중 첩자 생활을 시작했다. 후지이 경부보는 그에게 김구와 김원봉장제스와 연락해 군자금, 무기를 모으고 조선 독립을 목적으로 투사를 양성하고 있다고 하니 남경중앙군관학교에 입학해 정보를 빼내라고 지시했다. 한도원은 그 지시에 따라 남경중앙군관학교에 입학했다. 그가 당시 정확히 어떤 정보를 김구와 후지이 경부보에게 흘렸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일제가 표적인 김구의 소재파악을 위해 한국인 밀정을 활용했던 점을 감안하면 일제 측에 잘못된 정보를 흘리거나 일제의 공작을 미리 김구에게 알리는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실제로 일제는 김구가 난징에 있다는 첩보를 입수한 뒤 1935년 1월 밀정 오대근을 난징에 파견해 김구를 살해하려 했지만 이내 허위정보였음을 깨달았다. 또한 김구는 백범일지에서 “왜구가 나의 종적이 난징에 있다는 냄새를 맡고 상하이에서 암살대를 파견한다는 보고를 접했다”라고 기술했다. 누가 어떻게 김구에게 보고했는지 알 수 없지만, 아마도 한도원 등 김구가 적진에 심어놓은 밀정이 그 역할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도원은 1935년 4월 남경군관학교를 자퇴한 뒤 이중첩자 활동을 청산하고 김구, 안공근과 함께 난징에 체류하면서 독립운동에 전념했다. 그는 1936년 7월 김동우, 오면직, 유형석 등과 함께 비밀결사 조직인 맹혈단(猛血團)을 조직하고 옥관빈을 살해했으며, 중국 주재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 암살 등을 모색했다. 그러나 사전에 발각되면서 경찰에 체포된 그는 국내로 소환된 뒤 1937년 6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이후 8.15 광복을 맞이한 그는 가족과 함께 전국을 떠돌며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그러던 중 지인의 소개로 조선상선 주식회사의 목포출장소장을 맡게 된 그는 목포에서 해운업을 했다. 이때 그는 이 회사의 양곡 수송을 맡던 김대중과 거래를 자주 하곤 했고, 6.25 전쟁 직전인 1950년 6월 15일에는 김대중과 함께 서울로 출장갔다가 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목포로 피신하기도 했다. 김대중은 자신의 자서전에서 “거래처인 조선상선 직원 한도원 등 일행 5명이 사공을 찾아가 돈을 쥐여주고 배를 탔다. 목포까지는 400여 킬로미터였다. 무작정 남쪽을 향해 걸었다”라고 기술했다.

1958년 부인과 사별한 그는 재혼한 뒤 전 부인의 자식들과 왕래가 줄어들었고, 1984년 5월 15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그가 지녔던 유품과 사진 등은 재혼한 부인 측이 보관해왔지만 재혼 뒤 자식을 두지 않아 이 자료들은 행방을 알 수 없게 됐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건국포장을 수여했고 1990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0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 여담[편집]

한도원의 딸 한순옥 씨의 증언에 따르면, 김구는 한도원의 집을 제집처럼 드나들며 식사를 함께 했다고 한다. 그러던 1930년 어느 날, 김구는 평소처럼 한도원의 집에 들어와서 식사를 청한 뒤 식사를 기다리며 품 속에 지니고 다녔던 권총을 어루만졌다. 그런데 느닷없이 오발탄이 터지자, 김구는 사색이 되어 식사를 내팽개치고 급히 집 밖으로 몸을 피했다. 이윽고 소리를 듣고 달려온 경찰이 “무슨 일이냐”고 쏘아붙이자 한도원은 “청소할 때 무언가 건드려 소리가 난 것”이라며 둘러댔다. 이후 김구는 한도원의 아내 홍성실(1908~1958)이 임신한 몸으로 총소리에 놀라 유산하지 않았을까 걱정했지만 경찰의 의심을 피해야 했기에 한도원의 집을 좀처럼 찾지 못했다.

1946년 8월 7일, 김구서울특별시 종로구 경교장에서 한도원의 부인 홍성실과 재회했다. 이때 그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자신을 찾아온 17세 한순옥 씨를 마주하고 얼어붙었다. 이 소녀가 다름 아닌 16년 전 상하이에서 오발탄에 생사를 걱정했던 복중 아이였던 것이다. 소녀가 당시 오발탄 에피소드를 줄줄이 읊자 그제야 김구는 웃음을 터뜨렸다. “바로 너로구나!” 상기한 표정의 김구는 갑작스레 선물을 준비했다. 특유의 동그란 안경과 두루마기 차림의 그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채 사진을 찍은 뒤 여백에 소녀와의 만남에 대한 감정을 거침없이 내려 적었다. 김구는 “한순옥 세손(世孫)에게 주노라”라고 시작되는 이 글에서, “너희 집이 상해에 있을 때, 총기를 가지고 놀다가 오발이 됐을 때 너는 아직 뱃속에 있었다”라며 “하지만 하늘이 준 큰 행운 덕분에 아무 일도 없었다”라고 적었다. 이어 “이제 네가 17세가 됐고, 예전 일을 세세히 생각해 보니 내 몸에 소름이 돋는다”라고 했다.

한순옥 씨는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회상하며 “김구 선생이 오발 사고를 내고 나서 도망간 뒤 우리 집에는 오시지 못하고 걱정이 돼 ‘한도원 마누라 별일 없느냐’고 이웃들한테 많이 물어보셨다고 어머니께 전해 들었다”고 말했다. “이날(1946년 8월 7일) 만나 뵈니 너무 반갑다며 글귀를 써주시고 공부하라 학비도 대주셨어요. 내가 노래를 잘하니까 나중에는 정훈모 서울대 음대 교수님을 소개해줘 공짜로 음악을 배우게 해주셨지.” 한순옥 씨는 김구의 친필과 사진이 담긴 A4크기의 인화지를 다듬어 70여 년을 보물처럼 보관해오고 있다고 한다. [1]

3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