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문자

일본에서는 한자, 가나 등의 문자가 사용된다.

구성[편집 | 원본 편집]

오늘날 일본어에 사용되는 글자는

이렇게 나눌 수 있다.

일본어는 이에 따라 표기 방법으로 표의문자표음문자 모두를 사용하는 언어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전개[편집 | 원본 편집]

한자의 도입[편집 | 원본 편집]

본래 일본어는 음성언어로만 존재하고, 문자가 별도로 존재하지 않았다. 한자가 도입된 것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고사기》에서 오진 덴노(応神天皇) 때에 백제가 《논어》와 《천자문》을 바쳤다고 하며 이를 한자 전래의 시초로 보고 있다. 이와 별도로 이미 중국에서 문자가 전래됐다고 여러 유물에서 나타나는 흔적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어서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편, 한자중국에서 만들어진 이래, 형(形)/음(音)/의(義)로 분류되는 한자의 3요소가 주요 특징으로 자리잡아왔는데, 이는 일본에 전해질 때도 그대로 일본에 맞게 변화되어 적용되었다. 형태로 예체, 음으로 자음(한자 소리), 의로 훈(訓)을 도입하여 한자에 음훈(音訓) 두 종류로 체계화된 이해 구조를 만들어서 학습되었다.

음훈의 은 한자의 중국 발음을 기초로 한 읽기 방법이고, 은 한자 뜻에 맞게 일본말을 맞춘 읽기 방법이다. 이 두 가지로 읽기 방법을 나누면서 일본말을 한자로 표기할 수 있게 되었고, 나라 시대까지는 유일한 문자로서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되었다.

만요가나[편집 | 원본 편집]

한자를 본래의 의미와 무관하게 일본어의 음절을 표기하기 위해 사용하는 문자다. 한자의 소리만을 빌려서 일본어를 나타내는 가나 문자의 초기 형태를 만들게 되었다. 만요가나가 초서체와 일부 획 생략과 같은 간략화를 거쳐서 지금의 히라가나가타카나로 자리잡게 되었다.

(원문) 都流藝多知 伊与餘刀具倍之 伊尓之敝由 佐夜氣久於比弖 伎尓之曾乃名曾
(가나표기) 剣大刀(つるぎたち) いよよ()ぐべし (いにしへ)ゆ (さや)けく()ひて ()にしその()

(읽기) 츠루기타치 이요요토구베시 이니시에유 사야케쿠오이떼 키니시소노나조
— 오오토모 고지히노(大伴家持), 만엽집(만요슈, 万葉集) 제 20권 4467수

이와 같은 사례를 보면 한자의 읽기 음대로 읽으면 시를 그대로 읊을 수 있다. 물론 《만요슈》에 이런 표기 방법이 널리 쓰이긴 했지만, 한자 뜻으로만 지어진 노래도 있어서 《만요슈》의 표기 방법이 곧 만요가나와 동일하다고 보긴 어렵다. 만요가나는 5세기 철검에서 최초로 발견되었으며, 7세기 제작된 것으로 알려진 오사카시 주오구 나니와궁 터에서 발굴된 목간에도 이와 같은 표기가 쓰여서 이 표기가 당시 체계를 갖추고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한자를 한자의 음만 빌려서 나타냈다는 점에서 가나(仮名), 즉 빌려온(가짜) 이름이라는 뜻의 명칭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이에 상대되는 의미로 한자를 마나(真名, 진짜 이름)라고 불렀다.

우리나라의 고려 속요를 나타낸 향찰 표기와 유사한 점이 있다.

한자-가나 혼용문[편집 | 원본 편집]

일본어는 중국어와 달리 교착어[2]이므로, 조사조동사 또는 활용 어미를 한자의 표의성에 더해야만 한다. 가나가 이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게 했다.

일단 한자를 수입하여 그것을 발음에 대입하여 문자화 시키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문제는 그 빌려온 문자(仮名)가 진짜문자(真名)와 혼동되기 쉬웠다는 것이 문제였다. 특히나 대륙에서 가져온 여러모로 시대를 앞서는 문헌들을 번역할 때 그 필요성을 제기하였다. (앞서 말한바와 같이, 중국어와 일본어는 문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른바, 표음문자로 구분되지 못했다는 점에서 만요가나만으로는 해석, 번역의 난이도가 상당히 높았다. 따라서 일본인들은 음을 표기하기 위한 문자체계를 별도로 연구하였고, 더불어 진짜 문자는 놔두고 임시 문자의 귀찮은 획수를 획기적으로 줄여서 빠른 필기가 가능하도록 하는 노력이 일본 가나 발전의 토대가 된다.

일본의 중국산 한자/한문 수입은 일시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중국에 한나라가 세워지고 당나라가 망할 때까지 (그리고 그 이후로도 간헐적으로) 자주 유학을 보내 당시의 신문물을 가져왔고, 그때마다 당시 유행하는 "중국어"의 유입이 꾸준히 이루어졌다. 때문에 같은 한자를 두고도 수많은 읽기방식이 탄생함은 몰론, 뜻을 이용하기 위해 일본 고유어를 대입하는 방식까지 이뤄지는데 이것이 지금 일본어의 난제라 할 수 있는 난해한 한자표기법의 원인이다.

가령 生을 적더라도 통용 한자표에는 せい・しょう・いかす・いきる・いける・うまれる・うむ・おう・はえる・はやす・き・なま 이와 같이 12개의 음과 훈이 기본적으로 있으므로 아무 단서 없이 문맥 속의 정확한 읽기 방법을 찾긴 어렵다. (전부 모아보면 100여 가지가 넘는다(...)) 따라서 어떠한 뜻으로 해당 한자가 쓰여졌는지 오쿠리가나(送り仮名)를 붙여 명확한 읽기 방법을 제시해주는 형태가 정립되었다. 예로 生きる라 적으면, "生=い(きる) ※일본고유어"라는 읽기 방법 하나로 자연스럽게 읽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히라가나의 성립[편집 | 원본 편집]

만요가나로 문서화할 때 한자의 많은 획수는 빠르게 적어 옮기기엔 매우 불편했다. 이러한 점에서 가나(仮名)[3]의 탄생에는 두 종류의 분파가 있었는데 만요가나를 중국 초서체처럼 심하게 흘려쓰는 방식이 헨타이가나로 간략화가 되었고 메이지 유신 이후 한 번 더 간추려진 글자들이 히라가나다.

특히 예술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고위직 자녀들, 그 중에서 유난히 궁녀들 사이에서 일기를 쓰거나 글을 짓는 등에 활용되었기에 여성 특유의 부드러운 글자체가 널리 받아들여지면서 9세기 경부터 히라가나는 사실상 독립적인 문자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고킨와카슈》(古今和歌集)와 같은 곳에서 이것이 주 표기 방법으로 쓰이게 되었다. 특히 헤이안 시대를 거치면서 여류 문학의 다양한 수필과 이야기가 모두 히라가나로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글자 자체의 인상에서 여성적인 느낌이라 여성에게 해방된 문자라는 인식이 있었던 것은 맞는 말이더라도, 히라가나 자체가 단지 여성만을 위한 문자인 것은 아니다.

をんなもしてみむとてするなり
(여자도 해보겠다고 생각하고 하는 것이다)
(=남자도 쓴다고 하는 일기라는 것을 여자인 나도 써보려 한다)


지은이가 남자인데 여자인척 한 건 함정 넷카마

《도사닛키》(土佐日記) 서두에 적힌 기노 쓰라유키(紀貫之)의 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남자들도 약간의 항마력만 견디면 쉽게 사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현상이 빚어진 것은 남성들은 주로 실제로 문자를 사용하는 쪽에 몰두하는 일이 많았기에 전달력이 확실한 가타카나가 더 익숙했기 때문.[4] 정립 초창기에도 분명 남성들이 히라가나를 사용할 수밖에 없는 환경 자체가 있었는데 바로 연가(恋歌)이다(...)[5]

그렇다고 해서 히라가나 자체의 인상이 가타카나와 마냥 동일하지는 않다. 그건 과거에도 그러하였고, 현재도 그러한데 대표적으로 문장을 히라가나 일색으로 쓰면 뭔가 유아스럽게 느껴지는 것이 그 영향이다. 또한 일본제국에서 공적인 문서에는 모조리 한자와 가타카나만을 쓰게 하였는데 이 또한 히라가나가 제국이라는 인상에 맞지 않다는 내부적 의견이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히라가나가 자리잡기 전에 소우가나(草仮名)가 중간 과정이었다고도 여겨진다.

가타카나의 성립[편집 | 원본 편집]

글자 기원의 자획을 생략하는 것을 통해 만들어진 글자로, 헤이안 시대 초기 한문 훈독의 장에서 한문의 텍스트와 좁은 글자 사이 또는 행간에 읽기 위한 메모로서 쓰이면서 한자를 일부 생략하면서 만들어졌다. 한반도에서 쓰이던 구결자와 비슷하다. 마가나(真仮名)라는 만요가나의 다른 이름과 대칭되는 이름으로 가타(かた)는 불완전하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이 때까지는 한자의 보조문자격으로, 훈점[6] 자료로 붙었고 자립한 문자 체계가 아니었다.

한자와 가타카나의 수적 비율 관계가 역전되면서, 헤이안시대 후기에는 가타카나를 주로 하는 문장이 점차 쓰여지게 되었다.

12세기 무렵 현재의 가타카나와 흡사한 모양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로마자[편집 | 원본 편집]

16세기 크리스천 자료에서 선교사들이 일본어를 학습하기 위해 일본어 음성언어를 포르투갈식 로마자로 쓴 것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문명개화 때 일본인의 피아 인식의 관점에서 문화적 격차를 줄이기위해 기존의 표기를 버리고 로마자를 쓰자는 로마자론자(ローマ字論者)가 출현하기도 했다.

간단히 말해 일본어를 소리 나는 대로 표기하는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며, 지금도 Nihon 같이 표기하는 것은 로마자 표기에 의한 명백한 일본어 표기에 속한다.

현대 일본어[편집 | 원본 편집]

어간은 한자로, 오쿠리가나[7]를 히라가나로 뒤에 붙여서 쓰는 것이 일반적인 표기가 되었다. 21세기 현대에도 일본어에서 한자가나 문자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다. 다만 한자가 어렵다보니 당용한자가 정해져서 무조건 범위 내의 한자를 쓰도록 제한한 적도 있었는데, 나중에는 상용한자가 도입되어 생활에 필요한 한자의 범위와 읽는 법을 지정하되 제한하지는 않는 가이드라인 역할만을 하게 되었다.

상용한자로 인해 우리나라와 같은 단어임에도 한자 표기가 단순화된 경우를 볼 수 있다. 양서류(両棲類 (りょうせいるい))를 일본어 음이 똑같은 양생류(両生類 (りょうせいるい))로 바꿔버린 경우가 그 사례다.

히라가나가 주요 표기 문자로 떠올랐다. 여성적인 표기라는 점에서 20세기 초반까지만해도 공식 문서에서 널리 가타카나가 사용되었던 것이, 1945년 전후로 분위기가 전환되면서 지위가 반전되었다고 한다. 현재 가타카나는 외래어 표기와 고유 명사, 학명 등 학술적인 분야에서도 널리 쓰이고 있다.[8] 물론 가타카나가 다른 발음을 갖고 있다거나 하는 건 아니므로 문자에 근본적인 기능적인 차이가 있다고 오해할 필요는 없다. 어디까지나 마음가짐의 차이랄까

외래어의 사용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19세기20세기에도 신문명어가 지속적으로 번역되어 사용되었지만, 현대 일본어는 이를 한자 어휘로 번역하기보다는 외래어로 받아들여, 가타카나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더 넘어가 외래어를 본래 일본어 어휘처럼 활용하는 경우도 생겼다[9].

정보통신의 발달로 문자의 새로운 용법이 생기기도 했는데, 한국어의 지금 궁서체다처럼, 강조하고 싶은 부분을 일부러 가타카나로만 표기하거나, 외국인의 어눌한 일본어를 가타카나로 표기하기도 하고, 아스키 아트에 가나 문자나 한자를 사용하기도 한다.

신대문자?[편집 | 원본 편집]

신대문자(神代文字)는 신대(神代)에 쓰인 글자라는 의미로 한자, 가나 이전부터 써왔다던 표음문자 여럿[10]을 합쳐서 부르는 명칭이다. 항목을 참고하면 알 수 있지만, 전근대 시대 역사 왜곡의 결과물과 같다. 일본어 위키백과에선 긍정부정의 견해를 모두 적어놓고 중립적인 척을 하지만 실은 긍정적인 견해를 적어놓고 반박하는 식으로 적어놓았다. 중세 일본에서 쓰였던 가나(헨타이가나, 역사적 가나표기법)는 같은 발음에 여러 글자가 쓰였지만 신대문자는 한 글자에 한 발음이 대응되고(오십음도) 있다. 주류 역사학계에서는 역시 부정되고 있다.

각주

  1. 国語学概論 (白藤禮幸, 杉浦克己 저) 출처
  2. 실질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 또는 어간문법적인 기능을 가진 요소가 차례로 결합함으로써 문장 속에서의 문법적인 역할이나 관계의 차이를 나타내는 언어를 지칭하는 표현이다. 한국어, 터키어, 일본어, 핀란드어 등이 예시다.
  3. 명칭에서도 알 수 있듯, 본래 "가나"란 임시(仮)로 만든 글자(名)라는 의미에서 시작했다.
  4. 대략 남자가 여자 말투 쓴다고 생각하면 된다.
  5. 당시 남성 작가가 쓴 문학에도 히라가나가 자주 쓰였다. 그런데 그게 대부분 저쪽 관련인데 일단 여자들이 글씨를 알아먹긴 해야 하기 때문이다.
  6. 훈점(訓点)은 한문을 훈독하기 위하여 찍은 부호를 가리킨다. 오쿠리점(한자의 전후좌우 모서리 등 점을 찍는 위치에 따라 읽는 법을 표시하는 방법), 오쿠리가나와 후리가나, 오코토점(ヲコト点)(한자의 전후좌우 모서리 등 점을 찍는 위치에 따라 읽는 법(후속 어미)을 표시하는 방법이다) 같은 것을 포함한다. 주로 불경에 쓰여서 가타카나를 아예 승려의 문자라고도 불렀다.
  7. (おく)仮名(かな)한자 훈독을 한자로 쓰지 않고 뒤로 빼낸 가나.
  8. 승려의 문자였다는 과거 역사를 비춰봐도 학술적이고 진지 먹는 문자라는 인식이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9. サボる: 프랑스어: sabotage를 줄인 サボ에 동사 어미인 る가 붙었다.
  10. 사실상 가공의 문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