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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柳基石(또는 柳基錫). 이명은 유수인(柳樹人), 유서(柳絮).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0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5년 1월 12일 한성부 서서 인달방 분선공계 필운대(현 서울특별시 종로구 필운동)에서 독립유공자인 아버지 유찬희와 어머니 이안라(李安羅) 사이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유년기를 한성부에서 보내다가 1911년 경기도 이천군으로 이주한 뒤 1913년 부친과 함께 만주 연길현 국자가로 이주했다. 그 후 1916년부터 1917년까지 태광학교(太光學校)에서 수학했으며, 화룡현으로 이주하여 1917년부터 1918년까지 창동학교(昌東學校)에서 소학교 과정을 마친 후 1918년부터 1920년까지 연길도립 제2중학교에서 2년간 수학하였다.

1919년 북간도 용정에서 3.13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졌을 때, 그는 부친과 함께 시위에 참가했다. 이때 그는 동창생 심용해와 함께 충렬대(忠烈隊)에 속하여 태극기와 전단의 제작 및 배포, 독립만세시위의 전개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 후 대한국민회에 가담하여 자금지원과 무기 조달 등의 활동을 하였던 부친을 따라 왕청현 알아하로 이주했다.

1920년 9월 상하이로 이동한 그는 상하이에서 이동휘, 이광수, 안창호 등의 지도를 받았는데, 특히 안창호가 설립한 흥사단에 감화되어 즉시 가입하고 원동위원부에 소속되어 활동했다. 1921년 9월 난징 화중공학(華中公學)에 2학년으로 편입하였으며, 흥사단 원동위원부의 활동에 열성적으로 참여하였다. 1922년 6월 흥사단 남경단우회의 회의를 주재하였고, 1924년 남경의 협진회관에서 개최된 흥사단 제10회 원동대회에서 "우리는 활동하자"라는 주제로 10분간 강연을 하기도 하였다.

1924년 6월 화중중학을 졸업한 그는 베이징으로 가서 그해 9월 조양대학(朝陽大學) 경제과에 입학하였다. 북경의 조양문 대가에 위치한 한인기독교회에 거주하면서 기독교청년회와 북경고려유학생회 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이 무렵에 북경에 조직된 흥사단 북경단소에서 북경반(北京班)을 이끌면서 안정근, 김승만, 이탁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한편 그는 북경에서 유학하면서 심용해와 함께 아나키즘을 수용하였다.

1925년 6월 30일 베이징 천안문에서 개최된 "5.30 학살사건 규탄 국민대회"에 참가해 중국어로 "중화민족 만세"와 "타도 일본제국주의"를 외쳐 두각을 드러냈다. 이후 1925년 말 조양대학을 중퇴한 뒤 산시성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군벌 옌시산의 비행대에 가담하여 안창남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그는 이곳에서 비행술을 배우고 베이징으로 가서 자신의 동지 심용해를 부상시킨 밀정을 처단하는 활동을 수행했다.

1926년 베이징으로 이동한 그는 안창호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했다. 특히 1926년 10월 안창호가 흥사단원과 기독교인, 천도교인, 대구·경북인, 창조파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를 조직하는 데 기여했다. 그리고 1927년 1월 지린성으로 가서 안창호의 활동을 도왔고, 안창호가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자 그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이후 중국 관내로 돌아온 그는 1927년부터 중국의 하문과 천주 등지에서 중국의 아나키스트 진망산(秦望山)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28년 3월 상하이에서 한일원(韓一元), 윤호연(尹浩然) 등과 함께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고 무정부 공산사회의 건설을 지향하는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였다. 또한 <탈환>을 발간하여 독립정신과 상호부조사상을 전파하였다. 또 같은 해 6월 상해에서 이정규와 일본인 진희동(秦希同), 중국인 모일파(毛一波) 등과 함께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했다. 1928년 가을 이후에는 남창에서 체류하며 신문사에서 근붕했으며, 1929년에는 베이징에 돌아와 베이징시 판공실에서 장음오(張蔭梧) 시장의 비서로 활동했다.

1930년 4월, 유기석은 상하이에서 유자명 등과 함께 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고 한인의 의열투쟁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 천진에서 대한대독립당주비회가 창간한 <한국의 혈>의 고문으로 활동했으며, 안창호가 민족유일당 운동을 전개하는 걸 도왔다. 1931년 천주의 여명중학교(黎明中學校)에서 교사로서 생활하다가 상하이로 돌아왔으며, 1931년 11월 유자명이 주도한 불멸구락부에 참여하여 아나키즘을 연구하였다. 그리고 북경에서 동북민중항일구국군의 별동대장으로 활동했다.

1932년 제1차 상하이 사변 이후 정래동, 오남기, 유기문 등과 함께 천진에 가서 일본총영사관 및 일본군사령부 파괴를 꾀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1933년 3월 원심창, 백정기, 이강훈 등의 주중국일본공사 아라요시 아키라 암살을 지원했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이 일로 일제 경찰의 추적을 받게 되자, 그는 내몽고의 포두로 도주했고, 그곳에서 1933년 7월 의열투쟁을 목적으로 결성된 중한호조회조직회(中韓互助會組織會)에 참여했다.

1935년 남화한인청년연맹원 엄순봉 등과 함께 상해조선인민회 간부와 옥관빈 등의 처단(옥관빈 피살사건)에 관여했고, 이후로 검거를 피해 숨어 지내며 <하남일보(河南日報)>의 주필로 활동하며 학생들을 틈틈이 가르쳤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상하이에서 카이펑으로 이동한 뒤 1938년 김구 및 남화한인연맹원과 협력하여 일본 군함 출운환(出雲丸) 호 폭침 작전을 추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상하이 일대의 일본 관리자 다니 마사유키(谷正之) 암살을 시도했으나 역시 성공하지 못했다.

1938년 소북으로 가서 중국 유격대에서 활동하다가 나중엔 교육 사업에 종사했고, 1943년 강서성 상요에서 조선민족혁명당계열의 한국 광복군 제1지대와 한국독립당 계열의 제3징모분처의 대립을 중재했다. 또한 제3전구한교전지공작대를 조직했으며, 조선민족혁명당에 입당하여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1944년부터 1945년까지 난징에서 한국 광복군 제3징모분처의 대장을 맡아 초모활동을 전개했다.

8.15 광복 후 1946년 상하이에서 중한문화협회 동남분회 주비위원 등으로 활동하면서 <중한문화>의 편집을 통해 한중의 우의를 위해 활동하였다. 이후엔 남통학원(南通學院)의 경제학 부교수, 산동성 청도 화북연초공사 고문으로 역임했으며, 1952년 상하이에서 상업에 종사하면서 강소사범학원(江蘇師範學院)의 역사계 교수로 취임하여 활동했다. 1980년 11월 27일 상하이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8년 유기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