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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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康勳. 호는 청뢰(靑雷).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정치인.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3년 6월 13일 강원도 김화군 서면 청양리(현 철원군 김화읍 청양리)에서 이기원(李起源)의 2남 2녀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 이기원은 김화군수를 지냈고 재산도 1년에 거둬들이는 소작미가 연 1,000석에 이르는 등 지역 내에서 상당한 부를 축적했다. 이러한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어린 시절 집안에서 한학을 수학했으며, 7살 때인 1909년에는 청양리의 사숙에서 1916년까지 수학했다. 이후 강원도 철원군 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17년부터 1918년까지 2년간 보통학교 과정을 이수했다.

그러던 1919년 3.1 운동이 발발했다. 훗날 이강훈은 육삼정(六三亭) 의거 후 일본 검사에게 취조를 받을 때 이 민족운동이 자신의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고 회고했다.

나는 그때쯤부터 이미 조선민족독립의 주의를 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1919년 3월 조선 각지에서 일어난 만세사건 등에 자극되어 조선민족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일본에서 독립해서 하나의 국가를 세워야 하고 자신도 이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 일본 사법성형사국 은상월보(恩想月報)

또한 그는 조국 독립의 실천 방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생각하고 있었다고 밝혔다.

조선독립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조선인이 더욱 제대로 된 정신을 갖지 않으면 독립을 이룰 수 없으며, 이를 위해서는 합법적인 조선민족의 정신교육에 힘을 쏟는 것이 우선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즉 조선은 일한합병의 역사에 나타난 것처럼 사대당 등이 있어서 중국에 의존하려 하거나 또는 반대로 일본에 의존하려고 해서 결국 멸망했습니다.


조선이 독립하기 위해서는 누구에게 의존해서도 안 됩니다. 자주독립의 정신을 확실히 가지고 다른 자에게 의지하는 일 없이 독립독보의 정신을 가진다면 혼자서도 조선민족의 국가적 독립도 이룰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민족주의자로서 폭력적 수단을 피하고 문화적이고 교육적 형태로 조선민족의 정신운동을 해야 하는 것이 현재 가장 올바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일본 사법성형사국 은상월보(恩想月報)

이렇듯 그는 민족 정신교육에 온 힘을 집중해야만 자주독립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교육 중에서도 특히 "우리 4천 년 빛나는 역사에 대한 채계적인 교육이야말로 민족의 계몽을 통한 조국독립의 전제조건"이라 생각했다.

고려의 충신 정몽주의 사적을 확실히 하고, 또한 수나라 병력 백만을 격파한 을지문덕 공의 사적을 칭찬하고, 또한 풍신수길의 조선 정벌군을 해상에서 격파한 조선 수군의 장군 이순신의 사적을 칭찬하는 그런 형태를 통해 조선민족에도 뛰어난 역사와 문화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방법을 통해 조선 민족이 정신운동을 이루고, 독립의 기운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 일본 사법성형사국 은상월보(恩想月報)

1920년 2월, 이강훈은 조선을 떠나 만주로 향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있는 상하이로 가려 했지만 당시 만주의 독립운동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일단 자신의 육촌인 강학성(姜學成)이 살고 있는 용정으로 향했다. 그는 그곳에서 2달간 머문 뒤 상하이로 향했고, 상하이에서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였던 이동휘의 집에 머물며 자신이 임시정부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그는 임시정부의 상황을 보고 크게 실망했다. 훗날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상해 임정은 이미 내가 동경하고 갔던 대로의 상해가 아니었다. 늙은이들이 앉아서 파벌싸움만 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아니꼽고 한심스러워서 다시 북간도 용정으로 돌아갔다.

- 이강훈, <만주의 독립활동과 김중건>, '소래논집'

만주에 돌아온 그는 명동학교에 입학하여 1924년까지 교육을 받았다. 그는 여기서 "조선민족해방의 이상과 조선의 역사학에 관해 교육을 받아 더욱더 조선 독립주의를 강하게 품게 되었다."고 회고했다. 1924년 5월 모친이 사망하자 잠시 국내로 귀국했다가 이듬해 만주로 돌아온 그는 북만주 일대의 대표적인 독립운동단체인 신민부에 가담했다.

그는 신민부에서 주로 북만주와 그의 각지의 학교 등을 돌아다니며 민족의식 고취를 위한 교육에 매진했다. 1926년 7월에는 안도현에 있는 신창학교(新彰學校)에서 2년간 교사로 활동하면서 당시 신민부의 정책과 독립운동 상황, 한민족의 역사 등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민족의식 고취를 통한 조국 독립의 의지를 학생들에게 주입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는 1928년 신민부를 탈퇴했다. 훗날 그는 신민부를 탈퇴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그후 만주에서는 러시아 혁명의 영향을 받아 공산주의 사상이 엄청난 기세로 들어와서 당시 만주에 있던 민족운동에 종사하고 있던 조선인도 점점 이 공산주의 사상으로 옮겨가면서 신민부 내부에도 이 사상이 들어와, 신민부는 나를 비롯한 단순 민족주의자와 코민테른의 사상을 가진 자가 대립하는 형태가 되어 내부가 뿔뿔이 분열되었습니다. 나는 그런 정세에 직면하여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신민부의 현 상황에 압박을 받아서 1928년, 즉 26세 때 신민부를 탈퇴했습니다.

- 일본 사법성형사국 은상월보(恩想月報)

신민부를 탈퇴한 이강훈은 지린성 밀산현(密山縣)으로 이동한 뒤 그곳에서 기존의 학교를 확장하여 진신학교(晋新學校)를 세우고 교육사업을 전개했다. 그러나 일제의 감시 때문에 표면적으로 민족적인 교육을 할 수 없었고, '민족주의는 이미 낡았고, 공산주의가 대세'라고 생각하는 청년들의 성향 때문에 골머리를 앓았다. 이에 그는 1929년 6월 김좌진의 지령에 따라 만주에 있는 이을규와 손을 잡고 한족총연합회에 참여했다.

그러던 1930년 1월 김좌진이 공산주의자 김봉환의 사주를 받은 박상실에 의해 암살당했다. 그는 이에 큰 충격을 받았고 공산주의에 대해 깊은 반감을 품게 되었다. 그는 김좌진의 암살로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4개월 간 피신 생활을 하면서 밀산 부근의 조선인들에게 교육시키면서 그들이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1932년 10월 일제가 만주사변을 단행해 만주를 석권한 뒤 만주국을 건국시키면서 더이상 만주에서의 독립운동이 어려워졌다. 이에 그는 1932년 10월 중국 본토로 이동하였고, 그해 12월 이회영, 유자명, 유기석, 백정기 등이 상하이에서 조직한 아나키즘 단체 남화한인청년연맹에 참여했다. 남화한인청년연맹은 일체의 정치적 행동, 노동조합 지상주의 운동, 사유제산제도, 종교 등을 부인하고 자유연합의 원리에 기초한 절대 자유 평등의 이상사회인 '무정부공산주의' 사회의 건설을 추구했다. 그들은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의열투쟁, 자금보집, 선전활동 등을 전개했다.

이강훈은 이 단체에서 조직된 흑색공포단(黑色恐怖團)에서 활동했다. 이 조직은 1931년 11월 프랑스 조계에 있는 백정기의 주거지에서 결성되어 '현 사회의 모든 권력을 부정하고 새로운 세계, 전인류가 인생의 모든 방면에서 자유와 평등을 향응할 수 있는 새로운 사회의 수립'을 강령으로 했다. 그는 이 단체에서 백정기, 김지강, 이달 등과 함께 정보부에서 활동했다. 그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32년 10월 당시 상해 방면에서 오로지 조선민족의 독립운동에 분주하고 있던 김구 등과 연락해서 그 슬하로 들어갈 생각으로 만주를 떠났습니다. 그 뒤로 베이징을 거쳐서 같은 해 12월경 상해에 독착했습니다만, 김구, 이영 등과는 연락이 곧바로 되지 않아서 만주에서 무정부주의 계열과 합작의 인연을 이용해서 당시 상해에서 활동하고 있던 백정기, 원심창 등과 연락해서 앞서 얘기한 대로 나의 조선독립 민족운동의 수단으로 이들 무정부주의 계열 세력을 이용한 생각으로 그들의 비밀결사에 참가했습니다.

- 일본 사법성형사국 은상월보(恩想月報)

그렇게 흑색공포단에서 활동하던 이강훈은 1933년경 백정기, 원심창 등과 함께 당시 주중일본공사였던 아리요시 아키라 암살을 모의했다. 이강훈은 이에 대해 일본 검사에게 다음과 같이 밝혔다.

얼마 후 원심창이 아라키 대장에게서 아리요시 공사에게 4천만원의 자금이 건네져서 이것으로 장제스를 매수해서, 상해의 조선인 혁명주의자를 전부 검거할 계획을 하고 있따는 정보를 입수해왔기에, 나는 그렇다면 아리요시 공사관을 폭탄으로 주이고 이 일은 스스로 하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나와 백정기가 그 일을 담당하고 원심창이 길 안내를 하게 되어 모든 수배를 해서 아리요시 공사가 쇼와 8년 3월 17일 공동조계에 있는 육삼정의 연회에 간 것을 확인하고 돌아올 때 폭탄을 던지기 위해 부근에서 대기하고 있던 중 검거되게 되었습니다."

- 일본 사법성형사국 은상월보(恩想月報)

아나키스트 유기석의 회고록에 따르면, 당시 상하이에는 3명의 일본인 아나키스트가 있었는데 그 중 한 명이 다마사키라는 자였다고 한다. 다마사키는 당시 상해 일일신문의 기자로 근무하고 있었는데, 이강훈 등과 같은 조선인 아나키스트들과는 교류가 있어 그가 아리요시 공사 암살을 돕고자 그들에게 아리요시에 대한 각종 정보(일정 및 동선 등)를 제공해주기로 약속했다고 한다.

그러다 어느 여름날 저녁 다마사키가 백정기의 집으로 달려와 아리요시가 17일 오후 4시에 북서천로를 지나 일본군 사령부로 간다고 알렸다. 이에 백정기, 이강훈, 원훈 등은 다마사키가 알려준 장소로 가서 직접 행동을 취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들은 북사천로에서 아리요시가 지나가길 기다리다가 미리 매복해 있던 일제 경찰에게 결국 체포되었다고 한다. 유기석의 설명에 따르면, 사실 다마사키는 처음부터 일본의 정보원이었다고 한다.

이강훈은 이 일에 대해 자신의 말대로 했으면 반드시 성공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당초에 나의 생각은 프랑스 조계안의 일본공사 관저에서 아리요시가 매일 아침 집무처인 공동 조계 일본 총영사관으로 출근하므로 공사 관저 앞 모퉁이를 돌아갈 때 폭탄을 던지면 성능이 강력한 도시락형의 폭탄이 틀림없이 자동차째로 박살을 내리라는 것이었다. 이러한 내 의견을 백정기에게 전했더니, 그는 "나는 폐병 3기라 이왕 죽을 몸이므로 자신이 처리할 테니 동지는 잠자코 있으라"고 말했다. 결국 그의 의견에 따라 육삼정 부근에서 암살을 도모했다가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 이강훈, <항일독립운동사>, 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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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나가사키형무소에서 촬영된 사진.

1933년 3월 17일 백정기, 원심창 등과 함께 체포된 이강훈은 일본으로 압송된 뒤 나가사키 지방재판소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살인예비 등의 혐의로 징역 15년(미결구류 20일)을 선고받고 나가사키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후 그는 옥중에서 자신이 아나키스트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나는 무정부주의자의 비밀결사에 가담했지만, 나 자신은 무정부주의 사상에 공명하고 있던 것은 아닙니다. 또한 나는 그저 단순한 민족주의자고 조선민족 독립의 사상을 품고 그 독립을 위해 활동해온 자입니다. 무정부주의자의 결사에 가입한 것은 그 결사의 세력을 나의 주의에 따르게 해서 조선독립운동에 이용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즉 무정부주의자 등과 합작해서 공동전선을 펼치려 했던 것으로, 그들을 이용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를 통해 조선 독립을 위해 도움이 되려고 그와 같이 원심창 등과 모의해서 아리요시 공사를 살해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 일본 사법성형사국 은상월보(恩想月報)

그는 이후에도 자신의 사상은 아나키즘과는 관련이 없다고 주장했다.

남들이 내가 같이 활동하던 인물들의 사상을 보아서 나를 누구 파니 무슨 주의자니 한다면, 그는 전혀 나를 모르고 하는 표현이다. 나는 아무주의자도 아니다. 우리 조국을 강탈한 적을 미워한다고 해서 민족주의자라고 단정하거나, 무정부주의자들과 혁명사업을 같이 했다고 해서 나를 검정이라고 하거나, 공산주의자와 악수한 사실이 과거에 있다고 해서 나를 빨갱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도 가소로운 존재다. (중략) 무정부주의자로 알려진 백정기 의사와 거사를 같이 했다고 해서 나를 무정부주의자로 단정하는 것은 착오이다. 나는 다만 평범한 자유혁명자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 이강훈, <항일독립운동사>, 1979년.

한편 일제는 이강훈에 대해 그의 활동과 관련된 여러 사항 등을 묻고 청취했으며, 그의 전향을 유도했다. 일제는 크게 2가지로 그의 심경을 파악하고자 했다. 하나는 석방을 앞둔 그의 심경을 묻는 '석방전의 감상'이라는 글을 제출하게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대동아전쟁에 대한 감상과 조선의 장래'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묻는 글을 제출하게 한 것이었다. 이에 대해 이강훈은 '대동아전쟁에 대한 감상 및 조선의 장래에 대한 나의 희망'이란 제목의 글을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을사오조약이 맺어지자 조선인의 의기소침, 그 슬픔은 이루 말할 수가 없어 도시의 시전은 닫히고, 방방곡곡 슬픈 곡성, 불안한 사람들의 자살 등 합병사의 측면에는 일반인은 생각도 못할 훨씬 복잡다단한 비극이 연출되었습니다. (중략)


일본의 학자는 일한합병을 가지고 2천년 이래의 현안을 해결한 것이라고 말하며 이를 당연시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나는 이런 식의 일한융화는 결국 조선의 문화, 전통의 무시, 멸망이며 이것으로는 조선민족의 행복을 기대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조선민족의 행복을 위해서는 역시 조선민족이 하나의 국가로 해서 독립하는 이외의 길은 없다고 생각합니다.(중략)

포츠머스 조약에서는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시인했으면서도 다음의 을사 5조약에서는 이미 조선의 외교권은 없어지고, 이 때문에 조선민족은 굉장히 실망을 하게 되었습니다. 조선의 충신인 보국 민영환 공은 이 일을 탄식해서 자결하며 조선민족이 고식적 생존을 위해 현 상태를 묵인하는 것을 꾸짖고 도긻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가르치는 혈서를 남기고 죽었습니다.(중략)

내선인의 융화와 조선의 독립 중 어느 것이 행복하게 할 것이냐의 문제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 다르지만, 저로서는 이론상 혹은 신앙적으로 자유독립에 의해 영원한 행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 대동아전쟁에 대한 감상 및 조선의 장래에 대한 나의 희망

또한 그는 '석방전의 감상'을 제출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머릿속은 모순과 모순이 충돌했고, 며칠 동안 범민한 결과 겨우 얻은 결론은 중용을 지키자는 것입니다. 즉 "황은에 거스르는 언동을 하지 않고 조선민족을 위해 몸바친 선배들의 의리에 배신하는 언동도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 요체입니다. 입소 후 마음이 온화해져서 폭력적 수단을 절대 사용하지 않는다는 말과 생각도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다시 말해, 그는 일제에 저항하지 않겠다고 하면서도 민족을 배신하는 짓도 하지 않겠다고 밝힌 것이다. 조선의 독립을 부정하고 일제에 영합하겠다고 밝혔다면 구금에서 풀려날 수 있었지만, 그로서는 민족을 위해 애쓰다 죽은 이들을 배신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에 일제는 그를 잠재적인 위험분자로 간주하여 1942년 7월 출소한 그에게 '예방구금' 조치를 취해 계속 감금시켰다.

결국 이강훈은 1942년 형이 만기가 된 후에도 1945년 8.15 광복이 도래할 때까지 도쿄 교외에 있는 부중(府中)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고, 광복 후에도 2달이 지난 1945년 10월 10일에 출옥했다. 이에 대해 그는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우리 16명은 감옥에 있는 라디오 확성기 앞에 모여 일황 히로히토의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다는 성명을 들었다. (중략) 일제가 항복한 뒤라 감옥에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은 조금 이상스럽게 들려질 이야기나 조선인연맹준비위원회의 김정홍, 김두용을 위시해서 간부들과 김천해 등 감옥에 있는 투사들과 협의한 결과 출옥하는 날을 10월 10일로 정하고 일본 각지에 거류하는 동포들이 가급적 많이 동원되어 출옥하는 해방투사들을 환영한다는 의미와 겸하여 환호하는 군중으로 하여금 시위행진을 하게 하려 했다.

- 이강훈, <항일독립운동사>, 1979년.

1945년 10월 10일 출소한 이강훈은 재일한국거류민단 부단장을 맡았다. 그는 김구의 부탁에 따라 일본에 같이 거주한 박열과 함께 이봉창, 윤봉길, 그리고 나가사키 형무소에서 옥사한 백정기의 유해를 찾아낸 뒤, 이른바 '삼의사'로 일컬어진 이들의 유해를 한국으로 송환시켰다. 1960년 완전 귀국한 그는 한국사회당의 총무위원을 지내다가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사상을 의심받아 체포되어 3년간 옥고를 치러야 했다.

이후 1969년 독립운동사 편찬위원을 역임했고, 1977년 독립유공자 공적심의원을 맡았다. 그는 항일투쟁 역사편찬에 심혈을 기울여 <독립운동대사전>, <대한민국임시정부사>, <마적과 왜적>, <무장독립운동사>, <민족해방운동과 나>, <청사에 빛난 선열들>, <항일독립운동사>, <해외독립운동사> 등을 집필했으며, 1983~1997년까지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4대 이사장도 지냈다. 1988년부터 4년간 제10~11대 광복회장을 역임하며 잊혀진 독립유공자들을 찾아내는 데 힘을 기울였다. 한편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 병원에 입원하기 직전까지 세계 각국 정치사를 중심으로 200자 원고지 수만쪽 분량의 서양사를 저술하기도 했다.

2000년 6월 대장암으로 서울 보훈병원에 입원한 그는 한때 사경을 헤매는 등 병세가 크게 악화돼 중환자실에 2개월 동안 입원, 보훈처에서 사회장을 치를 준비까지 했으나 강인한 정신력으로 회복, 주위를 놀라게 했다. 수술을 담당했던 보훈병원의 한 관계자는 “수술을 견뎌내실까 걱정했는데 독립운동을 하셔서 그런지 정신력이 대단했고 회복도 빨랐다”며 “진심으로 존경하는 마음이 생겨 성심껏 치료했다”고 말했다.

그는 수술 후 병원에서 치료를 받으면서 정치 이야기는 일절 입에 담지 않았지만, 한 번은 이런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일제시대 활동했던 이들 중 생존해 있는 이들이 거의 없는 데다 점점 독립운동에 대한 평가들이 잊혀지는 것 같아 안타까워. 후손들에게 제대로 알려야 돼. 요즘 일본 등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아. 지금은 정쟁(政爭)이나 벌일 때가 아닌데…

[1]

2003년 11월 12일, 이강훈은 3년간의 투병 생활 끝에 눈을 감았다. 향년 100세.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이강훈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일제시기 이강훈의 민족운동과 육삼정의거>, 박종연, 숭실사학회, 2014.[1]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