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덴 변경백국

바덴 변경백국
1112~1803
Banner of Baden (3^2).svg
국기
Coat of arms of Baden.svg
국장
Baden-1802-1819.svg
바덴의 위치
나라 정보
수도 바덴바덴(12세기)
카를스루에(1715~1803)
정부유형 봉건 군주정
이전 나라
이후 나라

바덴 변경백국(독일어: Markgrafschaft Baden)은 신성로마제국의 제후국 중 하나로, 라인 강 상류의 동쪽 연안, 지금의 독일 남서부 지방에 위치했던 국가이다. 1112년에 성립되어 1803년까지는 변경백국이었고, 이후 선제후로 승격되었으며, 나중에는 바덴 대공국이 되었다. 바덴의 통치자는 슈바벤의 체링겐가(Zähringen家)였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11세기 동안, 슈바벤 공국의 지배력은 서서히 약해져 갔고, 그 지역은 여러 백작가의 지배하에 있게 되었다. 그들 중 가장 강력했던 가문은 호엔슈타우펜 가문, 벨프 가문, 합스부르크 가문, 그리고 체링겐 가문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3세는 베르톨트 폰 체링겐을 슈바벤의 공작으로 임명할 것을 약속했으나 1056년 하인리히 3세가 죽고 그의 아내 푸아투의 아네스는 루돌프 폰 라인펠덴을 그 직위에 임명하고 그를 베로나의 후작이자 캐른텐의 공작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그의 영토를 혼자서 지킬 수 없었고, 1077년 서임권 분쟁 시기때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는 그를 퇴위시켰고, 베르톨트 폰 체링겐은 그 두 영토를 모두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체링겐 가의 영지를 얻고자 노력했으나 다음 해에 죽고 말았다. 그러나 베로나의 후작 지위는 그의 첫째 아들 헤르만 1세가 유지했다.

헤르만 1세의 아들인 헤르만 2세는 호엔슈타우펜가와 대립하였고, 하인히리 4세는 그에게 봉지를 주었다. 그는 그가 태어나고 자라났던 독일을 그의 봉지로 하고 싶어 했으며, 그가 선택한 봉지는 바덴(오늘날의 바덴바덴)으로, 헤르만 1세가 에베르슈타인-칼브의 백작부인인 유디트 폰 바크낭술리히가우와 결혼하여 통치할 권리를 얻은 땅이었다. 그는 바덴에서 호엔바덴 성을 간설하기 시작했다. 1100년부터 건설되기 시작해 1112년에 완공된 그 성은 헤르만 2세가 바덴 변경백의 지위를 얻어낸 것에 대한 상징이기도 했다.

성장[편집 | 원본 편집]

새로 생긴 변경백령의 수도가 바덴이었으므로, 그 영토는 바덴으로 알려졌다. 헤르만 2세가 1130년에 죽고 후에 즉위한 그의 아들과 손자인 헤르만 3세와 헤르만 4세는 바덴 변경백국의 영토를 넓혔다. 1200년 즈음에 바덴 변경백령은 바덴바덴 변경백령과 바덴호슈베르크 변경백령으로 나뉘었고, 후자는 100여년 뒤에 바덴자우젠베르크와 바덴호슈베르크로 나뉘게 된다.

12세기13세기에 바덴은 호엔슈타우펜가의 충실한 지원자가 된다.[1] 이로 인해 바덴은 서쪽으로는 라인 강 너머 알자스 지방, 동쪽으로는 검은 숲 가장자리, 북쪽으로는 무르크 강, 남쪽으로는 브라이스가우까지 영토를 확장할 수 있게 되었다. 4대 바덴바덴 변경백인 헤르만 5세는 바크낭, 둘라흐, 슈투트가르트, 에틀링겐, 폴츠하임과 같은 도시와 리흐텐탈 수도원[2]같은 수도원들을 설립하였다. 1219년 헤르만 5세는 그의 거처를 폴츠하임으로 옮긴다. 그는 채링겐과 브라위슈바이크의 권리를 포기해야 했지만, 바덴 남쪽의 오르테나위외 브라이스가위의 백작위를 얻을 수 있었다. 헤르만 5세의 아들과 손자인 헤르만 6세와 프리드리히 1세는 오스트리아와 슈타이어미르크의 공작위를 주장했으나 오스트리아인들이 외지인을 그들의 지도자로 세울 수 없다며 거절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통일[편집 | 원본 편집]

전사로서 명성이 있는 바덴바덴 변경백 베른하르트는 전임자의 임무를 계속 진행하여 바덴폴츠하임이나 바덴호슈베르크 등의 몇몇 구역을 통일하였다. 바덴폴츠하임은 1291년 이래로 자체적인 변경백을 가지고 있었으나 1361년에 후계자가 없이 변경백이 죽으면서 바덴바덴 변경백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고, 1418년에는 바덴호슈베르크에서는 죽은 변경백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던 바덴바덴 변경백 베르나르드 1세가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 1503년에는 바덴자위젠베르크의 변경백 자리도 비슷한 이유로 바덴바덴 변경백이 차지하게 된다.

1442년에는 바덴 변경백국이 한 나라로 통일되었다. 라르말베르크의 절반을 차지해 북쪽의 바덴바덴과 남쪽의 브라이스가우를 한 영토로 연결하였고, 중세 말기를 거치면서 바덴변경백국은 합스부르크로부터 오르테나우와 브라이스가우의 나머지를 얻게 됨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의 남서독일 지방에서 가장 강력한 국가로 성장하였다.

시련기[편집 | 원본 편집]

1462년 마인츠 대주교의 선출을 두고 바덴바덴 변경백 카를 1세는 라인팔츠 궁중백(Pfalzgraf) 프리드리히 1세와 대립하였다. 마인츠 대주교 전쟁이라 불린 이 전쟁의 결과는 카를 1세의 패배로 끝났고, 그는 그 대가를 치루어야만 했다. 그는 라인팔츠와 그들의 동맹국에게 영토를 할양해주어야 했다. 이후 이 영토는 카를 1세의 아들 크리스토프 1세에 의해 되찾는다. 1503년 바덴자우젠베르크의 변경백이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으면서 모든 바덴 변경백의 영토는 크리스토프 1세에 의해 하나로 합쳐지게 된다. 크리스토프 1세는 그의 모든 영토를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필립 1세에게 모두 물러주고 싶어했지만 프랑스 왕의 방해로 실패하게 된다. 그는 죽으면서 바덴 변경백의 영토를 그의 세 아들인 필립, 베른하르트, 에른스트에게 나누어 주었고, 필립이 1533년 어린 나이로 죽으면서 바덴 변경백의 영토는 에른스트가 다스리는 바덴두를라흐[3]와 베른하르트가 다스리는 바덴바덴 두 곳으로 쪼개지고 만다. 그러나 이 두 변경백 사이의 관계는 좋지 못했다고 한다.

종교개혁의 광풍이 밀어닥치자 바덴바덴은 카톨릭의, 바덴두를라흐는 개신교의 편에 들어갔다. 30년 전쟁이 터지자 상황은 더 나빠져서 바덴바덴과 바덴두를라흐를 따르던 가문들은 그들을 버리고 해외로 이주하였고, 바덴은 큰 타격을 입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이 맺어지자 해외로 이주했던 가문들은 다시 돌아왔다. 전쟁이 벌어지는 동안 프랑스의 태양왕 루이 14세는 군대를 이끌고 바덴을 침공하였으며, 바덴바덴 변경백 루드비히 빌헬름 1세는 신성로마제국군을 이끌고 그와 전투를 치루었다.

재통일[편집 | 원본 편집]

1771년 바덴바덴 변경백 아우구스트 게오르크 심페르트가 후계자 없이 죽으면서 그의 지위는 가장 가까운 친척인 바덴두를라흐 변경백 카를 프리드리히에게 넘어가게 된다. 이로써 세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바덴은 한 나라로 통일되었다.

마침내 바덴이 통일되었기 했지만, 그 영토는 쪼개져 있었고, 라인강 상류의 양쪽 연안에 널리 퍼져 있었다. 바덴의 유일한 변경백이 된 카를 프리드리히는 이 영토를 하나로 잇고 싶었고, 마침내 기회가 왔다. 오스트리아와 프랑스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난 것이다. 그는 오스트리아를 위해 싸웠지만 지고 말았고, 그는 라인강 서쪽 영토를 프랑스에게 할양해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수년 뒤 두번째 기회가 온다. 나폴레옹 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러시아의 차르인 알렉산드르 1세와 같이 나폴레옹 1세와 싸웠고, 그 결과 콘스탄츠 주교의 영토를 얻으면서 선제후의 지위를 얻음과 동시에 영토를 하나로 잇게 되었다. 이후 역사는 바덴 선제후국으로 이어진다.

각주

  1. 위를 보면 알겠지만 이 두 가문은 채링겐슈바벤 시절부터 대립하던 가문이었다.
  2. 이후 채링겐가의 공동묘지가 된다.
  3. 1565년이 되기 전까지는 바덴폴츠하임이라고 불림
Wikipedia-ico-48px.png이 문서에는 영어판 위키백과의 Margraviate_of_Baden 문서를 번역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