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덴 대공국

바덴 대공국
Großherzogtum Baden
1806~1918
Flagge Großherzogtum Baden (1891–1918).svg
국기
Coat of Arms of the Grand Duchy of Baden 1877-1918.svg
국장
Location of the Grand Duchy of Baden within Europe in 1815.svg
나라 정보
수도 카를스루에
공용어 독일어
국교 카톨릭, 개신교
정부유형 군주정
인구 2,009,320 명 (1905년 기준)
면적 15,082 km2 (1905년 기준)
기타 정보
화폐 바덴 굴덴/바덴 탈러/골드마르크/파파이르마르크
이전 나라
이후 나라

바덴 대공국(Großherzogtum Baden)은 오늘날 독일 남서부의 라인 강 연안 지방에 위치했던 나라이다. 북쪽으로는 바이에른 왕국헤센 대공국, 서쪽으로는 라인 강, 남쪽으로는 스위스, 동쪽으로는 뷔텐베르크 왕국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국에 접하고 있었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개괄[편집 | 원본 편집]

바덴 대공국은 12세기에 건국된 바덴 변경백국을 기원으로 한다. 실질적인 탄생은 1806년 신성로마제국의 해체로 바덴 선제후국주권을 가지게 되면서 바덴의 선제후 카를 프리드리히가 자기 자신이 대공임을 선언하였고, 1871년 독일 제국에 가입할 때까지는 주권국가로 남게 된다. 이후 바덴 대공국은 대공국이자 독일 제국의 영토 중 일부로 존속하나 1918년 바이마르 공화국이 설립되면서 바덴 공화국으로 재편된다.

프랑스 혁명기[편집 | 원본 편집]

프랑스 혁명이 터지고 1792년 혁명의 물결이 다른 유럽 지방으로 퍼져 나갈 때 바덴은 반(反)프랑스 편에 서서 싸웠으나 지고 말았다. 1796년에 바덴은 프랑스에게 전쟁 보상금을 주고 라인 강 서쪽 연안의 영토를 할양했으나 이후 다시 되찾게 된다. 1803년에는 러시아의 차르 알렉산데르 1세를 도운 대가로 바덴은 기존의 라인팔츠 궁중백령이던 콘스탄츠 주교령과 다른 몇몇 영토, 그리고 신성로마제국의 선제후의 권리를 얻게 된다. 1805년 반불동맹에서 빠져나와 프랑스의 편을 든 바덴은 프레스부르크 조약으로 브라이스가우와 다른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토를 얻는다. 1806년에 신성로마제국이 해체되고 나폴레옹의 괴뢰국가인 라인 연방이 설립되자 바덴은 주권을 선언하여 바덴 대공국이 되고 라인 연방에 가입하였고, 동시에 다른 영토도 얻었다.

바덴은 계속해서 프랑스를 지원하였고, 그 결과 1809년에 맺은 빈 조약[1]의 결과로 뷔텐베르크 왕국 영토의 일부를 얻게 된다. 이렇게 바덴 대공국의 영토를 4배로 늘린 카를 프리드리히 대공은 1811년에 죽게 되고 후에 나폴레옹의 양녀와 결혼한 그의 손자인 카를이 대공직을 이어받게 된다.

그는 그의 장인을 위해 계속 싸우나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 이후 반불동맹군에 가담한다.

독일 연방기[편집 | 원본 편집]

1815년 6월 8일 빈 회의의 결과로 독일 연방이 설립되고, 바덴 대공국은 여기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빈 회의가 마무리 될 때까지 현직 카를 대공의 후계자가 정해지지 않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가 터지고 만다.

오스트리아 제국바이에른 사이에서 일어났던 분쟁의 결말로 맺어진 1816년 4월 16일의 조약에서, 체링겐 가문의 후계가 끊길 시[2]바덴 대공국의 후계직을 바이에른의 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에게 맡긴다는 것이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카를 대공은 1817년 국사조칙[3]을 내려 그의 아버지인 카를 프리드리히와 두번째 부인인 호쉬베르크 백작 루이세 카롤린네 폰 호쉬베르크 간의 귀천상혼[4]에서 태어난 자식, 즉 카를 대공의 삼촌의 계승권을 인정하였다. 당연하게도 바이에른과 바덴 사이에서 외교적 분쟁이 일어나고, 이 분쟁은 1819년 7월 프랑크푸르트에서 1817년의 국사조칙을 인정하는 것으로 끝나게 된다. 그러나 분쟁을 적절히 끝내기 위해 카를 대공은 많은 것을 포기해야 했다. 새로운 후계자에 대한 광범위한 지지를 일으키기 위해서 카를 대공은 세금과 입법을 담당하는 의회를 설치하여 바덴 대공국을 통치하게 해야 했다. 즉, 자유주의 헌법을 인용한 것이다.

그러나 바덴의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위에서 설치한 의회에 의해 자유주의 이념이 바덴인들 사이에서 퍼지기 시작했고, 프랑스 혁명기에 있었던 국민공회와 같은 의회를 설립할 것을 요구하였다. 카를 대공이 죽고 나서 새로 집권한 루트비히 1세는 인기가 없었고, 행정은 관료제의 늪에 빠지고 말았다. 게다가 대공과 의회 사이에서는 큰 갈등이 발생하였다. 1819년 바덴 대공 루트비히 1세는 이에 대한 충분한 토의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바덴의 의회를 3개월 간 정회할 것을 명령하였다. 바덴 안에서 뿐만 아니라 독일 전역에서 이에 대한 논란을 일었고, 1823년에는 갈등이 정점을 찍어 바덴 의회가 군사 예산의 가결을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루트비히 1세는 본인이 직접 세금을 걷는 것으로 응수하였다. 1825년 1월에는 바덴 대공의 간섭으로 의회 내 자유주의 계열 의원의 수는 3명까지 떨어졌다. 의회는 대공의 하수인으로 떨어졌고, 헌법은 그 기능을 정지하였다.

1830년에 루트비히 1세가 죽고 동생인 레오폴트가 집권하였다. 그는 그의 형과 달리 자유주의자였다. 같은 해에 실행된 의원 선거에서 그는 아무런 간섭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자유주의자가 다수파가 되었다. 이후 바덴은 수년에 걸쳐 헌법, 형법, 민법 그리고 교육에 자유주의를 도입한다. 1832년에는 독일관세동맹에 가입한다.

1849 바덴 혁명[편집 | 원본 편집]

1847년, 바덴에 급진주의가 대두되었다. 그들은 오펜부르크에서 공동회를 열어서 정규군의 예비군 전환, 누진세 실시, 노동자와 자본가들의 이율을 동등히 할 것을 요구하였다. 1848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사회의 불안이 증가하였고, 이에 바덴 대공국 하원은 오펜부르크에서 제기된 내용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킨다. 다른 독일 국가들처럼 바덴 대공국은 자유주의자들의 사면과 개혁을 약속한다. 이후 바덴 대공국은 행정 조직을 자유주의 모델로 재편하고 프랑크푸르트에 통합 독일 의회를 설립하기 위한 대표를 보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주의자들을 중심으로한 시민들의 불안은 계속되었다. 군제 개혁은 군인들의 반란을 불어일으켰다. 다행히도 이 반란은 쉽게 진압되지만, 1848년 4월 20일, 프란츠 헤케르와 프란츠 트레흐즈게르가 이끄는 반란군이 칸데른에서 봉기하였다. 4일 뒤 반란군은 프라이부르크를 점령하였고 27일에는 프랑코-게르만 군단이 스트라즈부르크에서 도센바흐를 향해 진군하기 시작했다.

1849년 초에는 위의 프랑크푸르트 통합 독일 의회의 결의안에 따른 새로운 헌법안이 나왔지만 상황을 더 악화시키기만 했다. 헌법안이 근본적인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않았던 데다가 상원이 이를 각하시켰기 때문이었다.

새로 일어난 반란은 저번의 반란보다 더 심각한 반란이었다. 5월 11일에는 라쉬타트에서 군인들의 봉기가 발생하였다. 2일 뒤에 오펜부르크에서 시민들의 봉기가 일어났고, 라쉬타트에서 봉기한 군인들은 이들을 지지하였다. 5월 13일에는 수도인 카를스루에에서 반란이 일어나 대공이던 레오폴드와 내각은 수도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는 도중 로렌초 브렌타노는 임시 정부가 세워질 때까지 반란을 처리할 목적으로 임시 의회를 설립한다.

7월 1일에 임시의회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고, 7월 10일에 제헌의회가 소집되었다. 그러나 나라는 여전히 무장한 시민군의 손 안에 있었다. 한편 레오폴드 대공은 바이에른 왕국으로 가서 프로이센으로 하여금 바덴에 군대를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다. 대가는 삼왕동맹[5]의 가입이었다.

이후 바덴의 반란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고, 이 반란은 독일 여러 국가로 전파되었다. 1849년 7월 중반에 빌헬름 왕자(이후에 빌헬름 1세로 즉위함)가 이끄는 프로이센군이 바덴에 진입하였다. 프로이센의 공격에 브렌타노는 어쩔 주 몰라하다가 급진주의자인 구스타브 스트루베는 그를 내쫓고 폴란드인인 루드비크 메로스와프스키를 바덴의 수장으로 영입하였다.

메로스와프스키는 반란군을 이끌고 프로이센 군과 바크호우셀에서 싸웠지만 완벽히 지고 말았다. 7월 25일에 카를스루에로 진입한 프로이센군은 임시정부를 해산하였다. 반란의 지도자격을 맡았던 인물은 붙잡혀 군법에 의해 처형당했다. 바덴 전역에 퍼져있던 반란군은 프로이센 주둔군에 의해 해산되었고, 초기 반란의 주도자 중 한 명이던 프란츠 트레흐즈게르는 간신히 스위스로 도망쳤다.

8월 10일에 바덴으로 다시 돌아온 레오폴드 대공은 의회를 해산하고 재선거를 실시하였다. 이후 새로 들어온 의회는 왕권을 강화하는 법안 여러 개를 통과시킨다.

1850~1866[편집 | 원본 편집]

1852년 4월 24일 레오폴드 대공이 사망하고 프리드리히 1세가 즉위한다. 1850년부터 1866년까지 바덴 대공은 독일 연방에서도 친 오스트리아파 국가였다. 1866년 보오전쟁(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 때에는 초기에는 오스트리아의 편에 참가해 두 차례의 전투에 참여하였지만 베르바흐 전투 2일 전 바덴 상원은 오스트리아를 배신하고 프로이센과 공수동맹을 체결한다.

독일 연방 해체[편집 | 원본 편집]

이후 1866년 8월 17일, 바덴 대공국의 내각은 독일연방에서 탈퇴함을 선언하고 프로이센과 공식적인 평화협상을 체결한다. 그러나 이후 성립된 북독일연방[6]에는 가입할 수 없었는데, 이는 당시 프로이센의 수상이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프랑스와 접경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덴 대공국의 존재로 인해 독일연방이 해체되고, 북독일연방이 성립되고 남은 독일계 국가들이 성립하고자 했던 남독일연방은 성립될 수가 없었다. 또한 보불전쟁에도 참전한 바덴 대공국은 눈에 뛰는 활약을 보여주었고, 베르사유 궁전에서 빌헬름 1세가 독일 제국의 초대 황제로 즉위하자 당시 바덴 대공은 최초로 황제를 알현한 군주가 되었다.

독일 제국기[편집 | 원본 편집]

독일 제국 성립 이후 독일 제국의 봉국이 된 바덴 대공국의 정치는 여타 독일 제국의 다른 봉국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1892년에는 독일의 국민자유당이 의원들의 대다수를 차지하였고, 1893년 부터 국민자유당이 보수화되자 1897년에는 교황지상주의,[7],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급진주의 세력의 연정이 의회의 여당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프리드리히 바덴 대공은 독일 제국과 조약을 체결하여 주류세의 거둘 독점적인 권리를 얻어내는 업적을 달성했다. 그러나 우정사업, 철도, 그리고 군사통치권은 프로이센의 영향력에 들어가고 말았다.

바덴 대공 프리드리히는 독립국가의 주권 군주라기보다는 독일 제국의 귀족으로 여겨졌다. 그가 독일 제국의 황제인 빌헬름 1세의 처남이었기 때문에 베를린의 의회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었다. 1906년에는 프리드리히 1세가 빌헬름 1세의 딸 루이제와 결혼한지 50주년이 되는 해였고, 전 유럽이 축복하는 가운데 기념식이 치뤄젔다. 같은 해에 영국의 왕 에드워드 7세는 그를 가터 기사단의 단원으로써 봉했다.

1년 뒤에 프리드리히 1세는 마이나우에서 사망하고 이후 바덴 대공은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에 의해 승계된다. 1918년에는 독일 제국제1차 세계대전 패전의 여파로 바이마르 공화국으로 재편되면서 바덴 대공국 또한 바덴 공화국으로 재편된다.

헌법과 정부[편집 | 원본 편집]

바덴 대공국은 의회와 헌법이 존재했으나 군주에게 행정권이 부여된 프로이센식 입헌군주제 모델을 따랐다. 입법권은 군주와 상하원으로 이루어진 란드타그(landtag)가 나누어 가졌다.

상원은 성년이 된 공가(公家)의 왕자들과 주요 귀족들의 수장, 프라일부르크 대주교, 바덴복음주의주교회 수장, 각 대학교와 기술학교의 대표, 지역 귀족에 의해 선출된 대표 8명(4년 임기), 상공회의소에서 선출된 3명, 농업회의소에서 선출된 2명, 무역회의소에서 선출된 1명, 지방정부의 수장 2명, 대공의 추천으로 올라온 8명(이 중 2명은 관료였다.) 으로 구성되었다.

하원은 전원 선출직이었고 73명으로 구성되었다. 이 중 49명이 지방 대표였고 나머지 24명은 도시 대표였다. 25세 이상의 성인 남자이고, 전과가 없으며, 세금을 충실히 냈을 경우 투표권을 가질 수 있었다. 하원 의원 선출은 간선제로 진행되었다. 시민들이 발메너(Wahlmänner)라고 불린 대표를 뽑으면, 그들이 하원 의원을 선출하는 방식이었다. 의회는 최소 2년에 한 번은 소집되었으며, 한 의원의 임기는 4년 이었다. 매 2년 마다 의원 절반을 선출하는 선거를 열었다.

행정부는 내무부, 외무부, 궁내부[8], 교무부로 구성되었다.

정부의 주요 수입원은 세금과 철도, 그리고 국유지에서 나왔다. 철도는 국가에서 운영했는데, 220만 파운드에 달하는 국가의 빚의 대부분은 철도를 건설하면서 나왔다.

바덴의 최고 재판소는 카를스루에, 프라일부르크, 오펜부르크, 모스바흐, 발드슈트, 콘스탄츠, 만하임에 설치되었으며, 항소시에는 라이프치히에 있는 제국재판소로 올라갔다.

바덴 대공국은 만하임 주, 카를스루에 주, 프라일부르크 임 브라이스가우 주, 콘스탄츠 주 등 4개의 주로 구성되었다. 수도는 카를스루에 주의 카를스루에였으며, 라슈타트, 바덴바덴, 브루샬, 오펜부르크 같은 주요도시들이 카를스루에 주에 소속되었다.

인구[편집 | 원본 편집]

19세기 초 바덴 대공국이 아직 바덴 변경백국이던 시절에는 영토는 3400km²에 인구는 21만 명에 불과했지만 영토를 점차 늘려 1905년에는 15,802km²의 영토에 201만 명이 거주하게 되었다. 이 중 61%는 카톨릭, 37%는 개신교, 1.5%는 유대교를 믿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다른 종교들을 믿었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거주자가 2000명 이하인 농촌에서 거주하였으며, 도시의 인구 밀도는 130명/km²였다. 인구의 대부분은 북쪽과 남쪽 스위스 바젤 시 인근에 집중되었다.

바덴인들의 기원에 대해서는 다양한 인종이 모여서 형성되었다고 한다. 무르크 시 남쪽으로는 알레만니계가, 북쪽으로는 프랑크계가 다수를 이루었으며, 바덴 내에 존재하는 슈바벤 고원이라는 명칭은 바덴 동쪽 뷔텐베르크 지방에서 살던 슈바벤 부족으로부터 따왔다.

산업[편집 | 원본 편집]

1910년 경에 토지 이용도를 보면 50%를 넘는 땅을 농지로 쓰고 있었으며 전체 토지의 38%는 숲으로 이루어졌다. 1870년 이전에는 국가 생산이 대부분을 농업이 책임졌으나 이후 공업이 국가 경제를 이끌어 나가게 된다. 주요 수출품은 기계, 양모 제품, 비단 끈, 종이, 담배, 도자기, 가죽, 유리, 시계, 보석류였다. 사탕무가 농장에서 대규모로 재배되었고, 목재 가공산업도 발달하여 목공예와 장난감, 오르골, 오르간을 수출하기도 하였다.

바덴 대공국의 주요 수출입 경로는 철도를 따라 들여오거나 아니면 서쪽의 라인강을 통한 선박교역이 주를 이뤘다. 철도는 바덴국영철도(Großherzoglich Badische Staatseisenbahnen)가 운영하였다. 철도는 라인강을 따라 깔린 도중에 지선이 동에서 서를 가르는 방식이 주를 이뤘다. 라인강 선박 교역은 만하임 시를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

교육과 종교[편집 | 원본 편집]

교육 면에서 모든 공공 교육은 정부가 책임지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바덴 내에 존재하던 5개의 대학에서 하이델부르크의 대학은 개신교 측에서, 대주교좌가 있던 프라일부르크의 대학은 카톨릭 측에서 운영하였으며 카를스루에의 공과대학은 어느 정도 유명했다고 한다. 나머지 2개 대학은 만하임과 콘스탄츠에 위치하였다.

종교적인 측면에서 바덴 대공은 개신교를 믿어왔으며, 그 아래로 바덴복음주의주교회가 바덴의 개신교를 관리하였다. 이 주교회는 하나의 지정된 교파가 관리하였으며 주교회의 종교회의는 55명의 대표가 참가하였는데, 이 중 48명은 교인들의 투표로, 나머지 7명은 지명되는 방식으로 선출하였다. 프라일부르크에 위치한 카톨릭의 대주교좌는 라인강 상류 지방 카톨릭 교도들의 중심지였다.

문화투쟁[편집 | 원본 편집]

1870년 전후로 해서 바덴의 법률은 정교(政敎)간의 싸움에 휘말리고 말았다. 1859년 7월 교황청과 체결한 조약에 의해 교육을 성직자의 관할에 두고, 또한 종교 시설을 건설할 자유를 보장해 주었는데, 이 조항이 위헌인가 아닌가를 두고 분쟁이 일어났다. 이 분쟁은 지방 정부를 설치해 교육을 관리하게 하는 대신, 그 정부에 지방 성직자의 참여를 보장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파와 카톨릭의 분쟁은 끝나지 않았다. 1867년 율리우스 폰 율리가 수상에 취임하였고, 이후 언론의 자유, 내각의 사회적 책임, 의무 교육 제도 등 세속적인 방향의 개헌을 추진하였다. 1867년 9월 교육계에 참여하는 모든 성직자들은 정부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는 법령이 발표되자, 프라이부르크 대주교 헤르만 폰 피치는 반발하였고, 1868년 4월 그가 죽자 대주교의 자리는 공석으로 남겨졌다.

1869년 바덴 대공국에서 법률혼이 도입되었지만 세속파와 카톨릭의 분쟁은 끝나지 않았고, 1870년 제1차 바티칸 공회의에서 교황 무류성이 반포되자 그 갈등은 최고점을 찍었다. 1870년에는 여타 독일의 다른 국가처럼 바덴에서도 문화투쟁(Kultukampf)[9]이 발발하였고, 1880년 즈음에 율리 내각은 사퇴하였고, 바덴은 교황청과 협상하여 1882년 프라일부르크 대주교가 다시 임명된다.

여담[편집 | 원본 편집]

  • 바덴 대공국의 공식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으나 비공식적인 국가로 바덴 인들의 노래(Badnerlied)가 있었다. 이후 세워진 바덴 공화국에서는 정식 국가로 사용되었다.

각주

  1. 나폴레옹 1세가 몰락한 이후 1814~1815년에 맺어진 빈 회의랑은 다른 것이다.
  2. 실제로 당시 대공이던 카를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3. 왕이 후계자 상속법과 같은 기본법을 바꿀 때 내리는 조칙.
  4. 귀족과 비 귀족간의 결혼. 결혼 당시 루이세 카롤린네는 평민이었고, 후에 호쉬베르크 백작으로 봉해진다.
  5. 작센 왕국, 프로이센 왕국, 하노버 왕국 간의 동맹. 이후 에르푸르트 연합으로 이어지나 오스트리아의 압박으로 해체된다.
  6. 독일 제국의 전신
  7. 가톨릭교회에서 국가적 교회나 교구의 독립성을 반대하고 권력의 집중과 교황청의 영향력을 지지하는 세력
  8. 재정, 치안, 종교 문제를 담당하였다.
  9. 독일에서 카톨릭의 권력을 줄이려다가 발생한 카톨릭의 투쟁
Wikipedia-ico-48px.png이 문서에는 영어판 위키백과의 Grand Duchy of Baden 문서를 번역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