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 로마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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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인의 신성 로마 제국

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

신성하지도 않고 로마도 아니고 제국도 아니다.
— 볼테르

1 개요[편집]

기원후 800년 프랑크 왕국샤를마뉴서로마 제국황제위를 수여받은 것을 기원으로 하여 962년 동프랑크의 오토 대제가 황위를 받아 건립된 중부유럽의 제국이다. 1806년 공식적으로 폐지되었으며, 신성 로마 제국의 향수병에 젖은 “독일인의 단일 국가” 타이틀은 일후 세워지는 독일 제국(Deutsches Reich)이 가져가게 된다.

2 설명[편집]

2.1 바탕[편집]

이러한 국가가 설립된 바탕을 알려면 우선 ‘로마’에 대해 조금은 알아둘 필요가 있다. 로마유럽의 상당수 영역을 호령했던 거대 국가였었다. 하지만 역사속의 국가들이 으레 그러하듯 점차 내부와 외부의 문제가 쌓이고 쌓여 종국에는 멸망의 길을 걷게 된다. (물론 이 와중에 이미 동부로 옮겨간 핵심이 있어 여전히 제국을 유지하여 '동로마제국 / 비잔티움 제국'이 되긴 한다)

이에 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 무주공산이 된 유럽 지역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를 차기 로마의 지도자라며 들고 일어난다. 물론 이것은 그저 유럽을 정복하고픈 간판에 불과할 뿐이며 실질적으로는 각자 지극히 일부의 영역만을 통치할 뿐이였다. 결국 그렇게 만들어진 국가들이 오랫동안 살아남아 지금의 프랑스, 영국, 독일, 오스트리아 등의 국가들이 되긴 했다.

다시 돌아가서, 그렇게 로마가 멸망한 이후 유럽에 남은 그나마 공신력 있는 존재가 바로 교황이라 할 수 있었다. 로마의 멸망 직전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기독교를 로마의 유일 종교로 인정(하는 척 하면서 교리에 은근히 신과 교황 사이에 황제를 끼워넣어 권력의 정당성을 확보)하였고, 황제가 없는 로마의 땅 내에서 바로 그 황제가 세운 원칙에 따라 교황은 신 다음가는 위치에 있는 존재였다. 바로 그러한 존재가 누구 하나를 황제로 인정해주면 그는 곧 정통성 있는 황제가 될 판국이였다.

이 때 바로 그 교황령 로마가 침공을 받는 일이 일어난다. 이에 로마는 비잔티움쪽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결국 도움을 받지 못하였고, 따라서 로마는 비잔티움 다음으로 거대했던 프랑크 왕국의 피핀 3세에게 도움을 청한다. 피핀 3세는 흔쾌히 응하여 교황령 로마를 도와주었고 그가 죽을 때까지 교황령 로마를 지켜주었으며, 그 뒤를 이은 피핀 3세의 아들 카를로스 또한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교황령 로마를 수호해주었다. 이에 카를로스 재직 당시 교황이였던 레오 3세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카를로스를 로마의 황제로 선포하였고 이에 신성 로마 제국이 설립되게 된다.

2.2 역사[편집]

카를 대제의 즉위와 그로인한 신성 로마 제국의 설립 이후 한동안은 문제가 없었으나, 베렌가리오 1세가 암살당한 이후부터 황제 자리는 공석이 되었다. 그러다가 프랑크 왕국이 왕위 계승의 문제로 결국 서, 중 동 3개국으로 갈라진 다음, 이 중 동 프랑크 왕국의 국왕 오토 1세가 또 다시 곤경에 처한 교황령 로마를 지키러 출정하였고, 이 일에 감격한 당시 교황 요한 12세가 이번엔 오토 1세를 황제로 선포하여 그 때부터 신성 로마 제국은 다시 이어졌다.

하지만 이미 한번 찢어진 신성 로마 제국은 또 다시 계속 찢겨나가게 된다. 하인리히 4세의 대에서 신성 로마 제국은 황제권 강화를 위해 주교를 황제가 임명하는 구조로 개편되었다. 그러자 이것을 불편하게 여긴 로마는 결국 하인리히 4세를 파문시킨다. 이 때부터 각지에서 자신이 황제가 되겠노라며 반란이 들끓었고 결국 이로 인해 하인리히 4세가 직접 로마로 가서 교황 앞에 무릎을 꿇은 카노사의 굴욕이 발생한다.

하지만 이후로도 제국이 갈수록 거대해지자 결국 제국은 교황 및 여러 곳에서 집중 견제를 받던 사이 프리드리히 2세의 사망 이후 제국은 혼란에 빠졌고 각 지역마다 내세우는 황제가 다른 지경에 이른다. 이 시대를 대공위 시대라 부르며, 프리드리히 2세의 사망 이후 루돌프 1세의 즉위 때까지 혼란이 계속된다. 보다못한 독일 영주들이 스위스의 백작 루돌프를 루돌프 1세로 선출하긴 하였으나 그간의 공백이 너무 길어 지방 제후들의 권한이 더 강해져 있던 상태였다. 더불어 황제가 없는 동안 프랑스 등 여러 국가들이 여기저기 찔러서 제국은 심히 쪼그라들어버렸다.

이후 제국은 교황에게 완전히 눌려살았으나, 점차 시대가 흐르면서 또 다시 왕조가 바뀌는 과정을 거치면서 점차 제국은 다시 한번 교황보다 막강한 권세를 갖게 되었다. 하인리히 4세가 통치하던 잘리어 왕조는 프리드리히 1세의 호엔슈타우펜 왕조를 거쳐 대공위 시대 이후 루돌프 1세의 합스부르크 왕조가 통치하는 상황으로 바뀌었고 교황 클레멘스 7세 대에 황제가 된 카를 5세 시절엔 최고의 위용을 자랑하였다.

이미 신성 로마 제국이 하인리히 4세 대에 반항한 적을 겪어보았던 로마는 신성 로마 제국을 억누르기 위해 은연중에 서 프랑크, 즉 프랑스와 은밀한 관계를 가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안가 카를 5세에게 뽀록났고 분노한 카를 5세는 결국 로마를 친다는 초특급 결정을 내린다. 이것은 심지어 로마에서도 예상 못했던 것으로, 때문에 완벽하게 방심하고 있던 로마는 순식간에 털리고 결국엔 교황이 황제에게 살려달라고 비는 사코 디 로마[1]로 이어지게 된다. 이로 인해 교황은 황제의 밑으로 떨어지는 관계의 역전이 일어난다.

그러나 카를 5세 대에 종교개혁의 바람이 제국을 휩쓸게 된다. 95개조 반박문으로 시작된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전 제국의 영주들을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갈라놓았고 카를 5세는 이를 봉합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프로테스탄트 영주들은 슈말칼덴 동맹을 결성하여 가톨릭 영주들과 대항하였고 곳곳에서 일어나는 반란이 일어났다. 카를 5세는 30년 가량을 소모하며 제국을 통합하려 하였으나 끝내 무위로 돌아갔으며 늙고 지친 그는 1551년 신성 로마 제국을 그의 동생인 페르디난트에게, 스페인 제국을 그의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양위한뒤 수도원으로 은퇴한다. 결국 1555년 아우구스부르크 화의를 통해 루터파의 실질적인 종교적인 자유가 부여되었지만, 칼뱅파는 포함되지 않았으며, 이는 30년 전쟁의 불씨가 된다.

프라하 투척사건 이후 발발된 30년 전쟁은 다시 제국을 갈가리 찢어놓았으며 제국의 영토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연합군의 전쟁터가 되어 쑥대밭이 되었다. 제국의 인구는 전쟁 전과 비교해 1/3이 줄었으며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신성로마제국 영주들은 실질적인 자치권을 부여받아 사실상 독립국가들이 되었으며 제국은 유명무실해졌다. 신성로마제국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일대의 가문 영지만을 실질적으로 지배하게 되었으며 독일 북부의 프로이센이 세력을 불리기 시작했다.

제국은 그렇게 멸망의 길을 걷고 있었고, 여기에 결정타를 날린 것은 바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다.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의 침공으로 안그래도 여기저기 독립하겠다는 여러 지방들과의 내전으로 약해질대로 약해진 제국은 쉽게 털려버렸고 당시 황제였던 프란츠 2세는 나폴레옹의 압력으로 신성로마제국을 폐지했다. 남은 영토엔 나폴레옹이 이 지역에 신성 로마 제국처럼 강대한 하나의 힘이 생겨나지 못하도록 갈갈이 찢고 그 조각들을 각각 국가로 임명하여 통합 가능성을 전면으로 없앤 이른바 '라인 동맹'이라는 반 괴뢰국가들을 세웠다.

3 기타[편집]

신성 로마 제국은 사라진지 오래이지만, 제국을 다스리던 합스부르크 왕조는 그 명맥을 오스트리아 제국으로 이어가 20세기 초까지 오스트리아와 헝가리를 중심으로 동유럽에 군림했다. 물론 지금은 영국의 여왕이나 일본의 일왕처럼 실권 없이 군림하지도 못하는 그저 이름뿐인 존재다.

4 각주

  1. 사실 로마가 털린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지만 역대 로마 공격 사건 중 이것이 가져다온 결과가 가장 거대했기에 흔히 로마 약탈 하면 카를 5세의 약탈이 언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