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1991년)

민주당1991년부터 1997년까지 존재한 민주당계 정당이다. 그리고 새누리당의 전신정당 중 하나다.

창당 배경[편집 | 원본 편집]

배경은 두말할 것도 없이 1990년 3당 합당이다.

13대 국회는 1여3야의 여소야대 형국이 유지되고 있었는데, 대통령이며 민주정의당 총재였던 노태우는 이러한 여소야대 국면을 타파하기 위해 제1야당이었던 김대중평화민주당에게 합당을 제의했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 제의를 거부했고, 이에 노태우는 제2야당인 김영삼통일민주당과 제3야당인 김종필신민주공화당에게 같은 제의를 하여, 최종적으로 원내 1, 3, 4당이 합친 거대정당 민주자유당이 탄생했다.

개헌선을 확보한 거대여당의 탄생에 야당과 시민사회, 운동권이 긴장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자연스레 마지막 남은 원내야당인 평화민주당을 중심으로 야권의 군소세력이 결집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김영삼의 합당 결정에 반발하여 통일민주당에서 뛰쳐나온 소수파인 이기택, 노무현, 김정길 등이 중심이 된 소수파가 결합한다.[1]

보다 자세히 서술하자면, 3당합당에 경악한 평화민주당이 재야 운동권, 민주화, 시민사회 세력 등을 영입하고 당명을 신민주연합당으로 변경하였는데 이것이 평화민주당 중심의 야권통합론이었다. 한편, 합당에 거부한 통일민주당 소수파는 이기택을 중심으로 결합하고 무소속 의원인 홍사덕과 이철을 영입하여 민주당(꼬마민주당)을 창당하여 독자노선을 천명했다. 그러나 1991년 시행된 지방선거에서 신민주연합당과 민주당은 패배하였고, 결국 김대중과 협상 끝에 양당을 합당하기로 하였다.

이에 1991년 9월 16일, 평화민주당의 후신 신민주연합당과 꼬마민주당이 합당한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창당한 민주당은 당장 정권교체를 목적으로 1992년을 맞이한다. 3월 24일 치뤄진 제14대 총선에서 민주당은 의석수를 22석이나 늘리며 지역구 55석, 전국구 22석 총 97석을 획득하는 미완의 승리를 거둔다. 호남에서는 전북 2석을 빼고 모두 싹쓸이했고, 서울에서도 25석을 획득했지만 인천 1석, 경기도 8석, 충청권 다 합쳐서 4석에 그치는 등 지지세의 확장에 한계가 있었다. 영남에서도 통일민주당 출신 인사들이 모두 낙선하였다.

이후 대선후보 경선에서 승리한 김대중은 미완의 승리를 완벽한 승리로 바꾸고자 제14대 대선에 나섰으나 민주자유당 김영삼에게 득표수 약 2백만표, 8% 차이로 패하며 낙선한다. 국민당의 정주영에 의해 보수표와 충청표가 분산되었으나 영남에서는 김영삼에게 표가 결집되었고, 믿었던 서울에서도 약 8만여표차밖에 이기지 못했다. 무엇보다 김영삼이나 김대중이나 모두 민주화운동에 투신했던 정치지도자여서 딱히 비교우위를 지닌다고 보기 힘들었다.

이후 김대중이 정계은퇴를 하고 치뤄진 당대표 경선에서 이기택이 김상현을 이기며 당 대표가 되었고, 이후 1994년까지 제1야당으로서 위치를 공고히 했다. 1995년 초에는 구 민정계 출신 탈당파들이 만든 새한국당을 흡수했으며 뒤이어 치뤄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도 호남 3곳과 동시에 조순을 영입하여 서울시장을 석권하고, 영남에서도 노무현을 내세운 부산시장 선거에서 37.6%의 득표를 올리는 저력을 과시했다. 기초단체장과 광역의원에서는 오히려 민주자유당보다 많았는데, 서울 25개 구 중 22개 구에서 이겼고, 인천과 경기에서도 민자당과 대등한 성적을 냈으며 대전과 충북에서도 깃발을 꽂고, 무엇보다 경북 포항시장을 따내는 성과를 냈다.

그러나 김대중이 정계에 복귀하면서 모든 것이 틀어지기 시작했다. 김대중은 지방선거를 앞두고 귀국한 뒤, 사실상 정치활동을 재개하며 지방선거에 적극 개입했는데 이 과정에서 김대중과 이기택의 갈등은 심각해졌다. 특히 경기지사 후보 공천을 두고 이기택은 장경우를, 김대중은 이종찬을 밀은 끝에 장경우가 최종 후보로 낙점되었는데 결국 이인제에게 패했다. 영남 지방에서는 김대중이 괜히 나서면서 제대로 선거를 치루지 못했다는 불만도 터져나왔다.

이에 김대중은 민주당으로의 복당이 아닌 아예 새로운 신당 창당을 추진했다. 김대중의 신당 창당 메세지를 본 민주당 내 동교동계는 일제히 탈당, 민주당 전체 국회의원 95명 중 65명이 김대중에게 합류하여 새정치 국민회의를 창당한다. 당 지지기반이 호남과 서울이었는데 이 지역의 맹주 김대중이 복귀하면서 해당 지역 의원들이 다 떠났으니, 민주당은 수도권 잔류 의원 몇 명과 탈당시 의원직이 상실되는 전국구 의원만으로 남은 1년을 버텨야 했다. 이에 민주당은 경실련 등 시민사회와 개혁신당을 흡수, 통합민주당으로 재출범했으나...

뒤이은 1996년 15대 총선은 민주당에 너무 가혹한 결과였는데, 야권표가 분열된데다 그 분열된 표 대부분이 국민회의에게 흘러가면서 제1야당의 지위를 완전히 상실, 오히려 충청 기반의 자유민주연합에게까지 밀리며 제3야당으로 전락한다.[2] 획득의석 수는 15석으로 원내교섭단체(20석)조차 구성하지 못했으며, 지역구 9석은 서울 1석, 경기 3석, 강원 2석, 경북 1석, 경남 2석[3] 전통적인 텃밭인 서울과 호남을 국민회의에게 완전히 빼앗기고 대신 탈DJ 효과로 보수적 지역구에서 후보들의 개인기로 선전하였으나 이들 지역의 터줏대감인 신한국당[4]에게 당해낼 수 없었다. 더군다나 몇 석 안 되는 지역구 의원들도 신한국당이 과반의석 확보를 위해 의원빼가기에 나서면서 의원이 더 줄었다.

당의 존립기반이 위태로워진 상황에서 지도부는 서울시장 조순을 전격적으로 대선후보로 추대하여 15대 대선에 나섰다. 그러나 당의 지지율은 회복되지 못했고, 서울시장 출신 조순의 인기는 많이 사그라들었는데 8월 말 16%까지 찍으며 상승곡선을 타던 지지율이 김대중에게 쏠리기 시작하면서 10월에는 5% 미만으로 떨어지자 선거추진동력을 상실했다. 무엇보다 최대 5자구도[5]로 진행되리라 예상된 대선구도가 DJP 연합으로 흔들리자 민주당은 독자생존이 어렵다고 보고, 같은 이유로 연대대상을 찾던 신한국당과 전격적으로 합당을 결의, 당 총재를 조순이 맡고 당 대선후보를 이회창이 맡기로 한다.

그렇게 민주당은 사라지고 신한국당과 민주당이 결합한 보수정당 한나라당이 탄생한다.

특징[편집 | 원본 편집]

민주진영 정당이었지만 反DJ 성향이 강했고 이는 95년 이후 특히 심해진다. 애당초 동교동계는 김대중의 국민회의로 다 떠났고, 당 내부의 인사들은 대부분 상도동계 내지 통일민주당 출신으로 삼당합당에는 반대하긴 했지만 삼당합당 이전부터 동교동계와는 87년 13대 대선,88년 13대 총선을 계기로 사이가 매우 안 좋았기 때문. 더군다나 국민회의 창당으로 인한 표 분열로 15대 총선에서 쫄딱 망했으니 反DJ 성향이 강한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는 그만큼 당 대표의 지도력이 약했다는 반증이기도 한데, 이기택이 독자계파를 갖고 있는 야당의 거물이긴 했지만 그 계파의 규모는 동교동계에 비하면 매우 미약했고, 또 92년 14대 총선에서 호남당으로 낙인찍히며 비호남지역의 구 통민당계 의원 대다수가 낙선하여 이기택을 뒷받침해줄 우군 세력이 그만큼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민주당이 호남당 낙인을 벗어던지는 건 1996년인데 호남당 낙인을 던지긴 했지만 대신 망했다.

후일담[편집 | 원본 편집]

민주당 세력 전체가 고분고분 한나라당으로 합류한 것은 아니었다. 제정구와 같이 DJ를 끝내 용인하지 못한 의원 혹은 법적, 의사결정론적 측면에서 문제가 없는 합당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한 인물들은 적극적, 소극적의 정도 차이는 있지만 한나라당으로 합류했다. 반면, DJ는 싫지만 군사독재의 후예와 같이 일할 수 없다!는 인물들은 탈당하여 국민회의에 합류하는데 대표 인물이 바로 노무현이다. 이들 합류파는 대부분 국민통합추진회의(통추) 출신이지만 통추 출신중에도 한나라당에 잔류한 사람이 있는데 위에 상술한 제정구 의원이다.

한나라당으로 간 민주당계 인사들의 진로 역시 엇갈린다. 현재까지도 한나라당의 후신 새누리당에 몸담고 있는 인물도 있고, 2002년 대선이나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을 즈음하여 DJ가 사라진 민주당계 정당으로 돌아온 인물도 있다. 18대 국회의원 장광근같은 이가 전자고, 이부영은 후자다. 그 외에 이철은 정계를 떠났다가 2002년 정몽준의 국민통합 21로 정계에 복귀, 2003년에 열린우리당에 합류하였다.

당 대표였던 이기택, 서울시장이며 마지막 대선 후보였던 조순의 말로는 좋지 않았다. 조순은 1998년 재보궐선거로 국회에 입성했으나, 2000년 16대 총선때는 이회창의 당권 장악 과정에서 공천을 받지 못하자 탈당하여 민주국민당을 창당했다. 그러나 둘 다 사이좋게 낙선(...)하였다. 이후 조순은 정계은퇴했고, 이기택도 사실상 정계은퇴했으나 2002년 대선에선 옛 민주당 동지인 노무현을 지지했고, 2007년 대선에선 노무현 지지를 철회하고 이명박을 지지했다. 제정구 의원은 1999년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구 민주당 지도부와 함께 팽당하는 수모는 겪지 않았다.

각주

  1. 훗날의 대통령이 되는 노무현이지만 이때는 고작 초선 의원에 불과했고 정치적 무게감은 이기택이 훨씬 높았다.
  2. 이는 당의 대표적 신진인물이자 부산시장 출마로 얼굴이 널리 알려진 간판스타 노무현을 내세운 서울 종로 선거구의 예로 확인되는데, 노무현은 신한국당 이명박, 국민회의 이종찬의 뒤를 이어 겨우 3위에 그쳤다.
  3. 경남 2석은 현재로 따지면 울산 2석이다. 울산이 광역시로 승격한 것은 1997년. 즉, 2015년 현재 기준에서의 경남에서는 상당히 부진했다고 볼 수 있다.
  4. 민주자유당이 개명한 당명
  5. 신한국당, 국민회의, 자민련, 민주당, 그리고 신한국당에서 떨어져나간 이인제의 국민신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