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민주당 (1987년)

평화민주당(平和民主黨)은 1987년부터 1991년까지 존속한 대한민국정당이다. 약칭은 평민당.

창당 배경[편집 | 원본 편집]

6월 항쟁과 이로 인한 6.29 선언으로 직선제 개헌이 성사되고 1987년 12월에 대통령 선거가 예고되면서, 직선제 개헌과 민주화를 목적으로 총결집했던 야권 세력에 분열이 싹트기 시작했다. 당시 야권은 통일민주당으로 결집한 상태였는데, 김대중은 6.29 선언 이전에 했던, 직선제가 이뤄진다면 대통령 선거에 불출마하겠다는 대선 불출마 선언을 파기하고 대선 출마를 선언하여 이 분열에 불을 지폈다. 이후 김영삼과 김대중은 수없이 접촉했으나 끝내 둘 다 대통령의 꿈을 포기 못했고, 이에 동교동계가 집단 탈당하고 11월 12일 창당하며 김대중을 당 총재 및 후보로 추대했다. 이는 한화갑이 제창한 사자필승론[1]에 기인한 바가 컸다.

역사[편집 | 원본 편집]

창당 직후 치뤄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는 부진하여 김대중 후보는 김영삼의 28%보다 못한 27%의 득표율로 3위에 그쳤다. 이후 13대 총선을 앞두고 통일민주당과 다시 야권통합협상을 벌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13대 총선에서 야권은 각개약진하게 되는데, 평화민주당은 말 그대로 대박을 친다.

평화민주당은 호남 37석 중 36석을 싹쓸이하고 서울 42석 중 17석을 쓸어담으며 지역구 54석, 전국구 16석 총 70석으로 단번에 원내 제2당이자 제1야당으로 도약하는 황색 돌풍을 일으켰다. 야권 라이벌 통일민주당의 59석을 너끈히 앞서는 승리였다. 호남에서 못얻은 1석도 전남 신안 선거구에 공천한 한화갑이 선거 며칠을 앞두고 느닷없이 후보등록 무효를 당해서였다. 참고로 해당 선거구는 한겨레 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었고, 당선된 의원은 이후 탈당하여 평화민주당에 입당한다.

다만, 13대 총선의 승리는 엄밀히 말하자면 절반의 승리이고 평화민주당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호남과 서울을 제외하면 평화민주당은 지역구에서 단 1석밖에 얻지 못했다.[2] 영남은 물론이고, 충청, 강원에서도 힘쓰지 못하고 속절없이 전멸한 것이다. 반면, 라이벌 통일민주당은 서울 10석, 경기 4석, 인천 1석, 강원 3석, 충남 2석, 경북 2석, 제주 1석으로 전국적으로 고른 의석을 확보했다.[3] 그리고 당시 전국구 의석이 정당득표수가 아닌 확보한 지역구 의석수 기준으로 배분된 것도 평화민주당의 승리 요인이었다.

어쨌든 이와 같은 승리로 평화민주당은 야권의 주도권을 잡았고, 이후 5공 및 광주 청문회에서 통일민주당과 함께 여러 청문회 스타 의원들을 탄생시키며 제1야당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그런 평화민주당을 향해 노태우 당시 대통령 및 민주정의당 총재는 전격적으로 양당의 합당을 은밀히 제안했다. 이는 13대 총선서 125석밖에 획득하지 못한 민주정의당[4]이 안정적 과반의석을 확보하기 위한 방책이었다. 그러나 평화민주당과 김대중은 호남에 기반하고 있었기에,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가해자인 민주정의당측과 전격적으로 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고, 노태우의 합당제의를 거부한다.

그러자 노태우는 통일민주당과 신민주공화당에 접촉, 1990년 초 사상 초유의 3당합당을 결행했다. 이로서 평화민주당은 의석수 변화가 없음에도 단번에 소수야당으로 전락해 버렸다.

이후 평화민주당은 재야세력, 시민사회단체 등을 규합하여 이에 대항하고 당명을 신민주연합당으로 바꾼다.[5] 하지만 1991년 부활한 지방의회 선거에서 88년 총선에서 승리한 서울에서조차 겨우 광역의원 21석을 차지하는 등 총 165명의 당선자[6]를 내는데 그치며 564명을 당선시킨 민주자유당에 대참패하고 만다.

이후 위기의식을 느낀 신민주연합당은 통일민주당 탈당파인 꼬마민주당과 합당하여 민주당 (1991년)으로 재탄생한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 약칭은 평민당이다. 라이벌이었던 통일민주당이 창당때부터 통민당이 아닌 민주당을 약칭으로 썼기에, 통일민주당에서 탈당한 평화민주당으로선 민주당 약칭을 쓸 수 없었던 것. 사투리가 심했던 김영삼이 평민당을 팽민당이라고 발음했다는 유머도 있다.
  • 민주당계 정당 중 노란색을 당 컬러로 쓴 첫 정당이다. 2000년대 이후 노란색을 친노의 색깔로 규정하는 경향이 있지만 원조는 이쪽이었던 것.
  • 2010년 한화갑이 같은 이름의 정당을 창당하지만 단명했다. 이쪽은 평화민주당 (2010년) 참조.

각주

  1. 민주정의당 노태우가 TK를, 통일민주당 김영삼이 PK를, 신민주공화당 김종필이 충청도를, 그리고 평화민주당 김대중이 호남을 각각 차지한다면 최종적으로 서울과 수도권에서 우세한 김대중이 필승한다는 논리. 그러나 충청의 결집력은 약했고, 노태우가 PK에서 비교적 선전하고 경기/인천에서 1위를 차지했다. 호남/충청/TK/PK의 결집력을 동일하게 보고, 경기도 지역에서 우세할 것이라 오판한 전략이었다.
  2. 경기 성남 을 선거구 이찬구
  3. 경남 22석 중 12석을 민정당에 뺏겨서 그렇지
  4. 지역구 87석, 전국구 38석. 당시 선거법상 지역구 의석이 가장 많은 정당이 득표율 다 무시하고 전국구 의석 절반을 배분받게끔 되어 있어서 그나마 이정도라도 확보한 거다. 만약 득표율 기준으로 배분했다면 약 10여 석 정도는 빠졌을 거다.
  5. 1985년 창당되어 돌풍을 일으킨 신한민주당처럼 약칭으로 신민당을 쓰기 위한 방편이었다.
  6. 서울 21명, 인천 1명, 경기 3명, 대전 2명, 광주 19명, 전남 67명, 전북 51명, 경남 1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