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호 (18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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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鎭浩.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0년 7월 17일 평안북도 선천군 수청면 고읍리에서 태어났다. 호는 '중파(中波)'이며, 본관은 장연 김씨이다. 1911년 5월 김규환 등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였고, 1913년 봉천성 환인현에서 대종교 신자 윤세복과 함께 동창학교를 설립하여 학생들에게 민족의식을 고취했다. 1919년 무송현에서 흥업단에 가입하여 재무부장으로 일했다.

1925년 1월 길림에서 양기탁, 지청천, 김동삼, 오동진 등이 모여서 정의부를 조직하였을 때 중앙위원으로 피선되는 동시에 교육위원을 겸임하여 만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의 교육 사업을 담당하였다. 1927년 4월 농촌 개발 문제에 관심을 갖고 김기풍, 김규환, 김원식, 김호, 김동삼, 김정제, 김유성 등과 함께 농민호조사를 조직하여 재만한인의 식량 생산 증가를 위한 영농업 연구 및 기계, 수력전기 개발에 진력했다.

한편, 교육의 발전을 위해 각 처에 교육기관을 설치하여 국내에서 중등이상의 학교를 졸업한 자를 교원으로 초빙하였으며, 교포의 보건 위생을 위한 계몽과 의료원 설치를 주도했다. 1928년 신민부, 정의부, 참의부 대표가 길림성의 동북에 있는 대둔에 모여 결성한 국민부에 참여해 심용준, 이일세, 이동림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1929년 3월 길림시 우마행호동의 국민부 사무실에서 조선혁명당을 조직하였을 때, 이탁, 이웅, 이진탁, 장세용, 이동산, 문형순, 김석하, 현익철, 현정경, 김보안, 유동열 등과 함께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31년 만보산 사건이 발생하여 한국인과 중국인 농민간의 갈등이 불거지자, 국민부는 이를 해소하기 위해 만보산사건대책위원회를 설치했다. 이때 김진호는 최동오, 김규환 등과 함께 진상 조사에 노력하는 한편, 중국 당국에 교섭하여 일본의 침략적 음모를 폭로하고자 노력했다. 이후에는 대종교의 참교의 지교를 맡아 포교 활동에 전념했다. 1942년 11월 19일 일본이 대종교와 조선어학회 사건을 엮어서 대종교 교부들을 대거 잡아들이는 '임오교변'이 벌어졌을 때, 그는 신경에서 검속되었으나 혐의사실이 없어 석방되었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부산 대종교의 전무를 맡았다. 1962년 8월 7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진호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