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환 (1890년)

金奎煥. 이명은 김이대(金履大), 김검군(金劒君). 독립운동가였으나 1930년대 이후 친일파로 변절한 인물.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으나 2019년 서훈 취소되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0년 6월 12일 평안북도 선천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9년 남형우, 안희제, 김동삼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함께 신민회 계열의 비밀청년단체인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의 활로를 모색했다. 1910년 8월 한일병합이 선포되자, 1911년 5월 중국 봉천성 환인현으로 망명하여 윤세복 등과 함께 동창학교(東昌學校)를 설립해서 교포들에게 독립사상 고취와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동창학교가 일제의 압력과 운영 자금 미비로 인해 폐쇄된 뒤 1915년 6월에 김관제(金觀濟), 이시열(李時說) 등과 함께 흥경현 동로홍묘자에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여 독립사상을 교육하였다. 일신학교는 1916년에 흥동학교(興東學校)로 개칭되었다. 이후 1920년 광한단 부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22년 대한통의부에 가담했고, 1925년 대한정의부, 1926년 정의부, 1929년 국민부에 잇달아 가담했다. 또한 1929년 조선혁명당이 창당되었을 때 중앙위원으로 선임되기도 했다.

그러나 1929년 11월 초 신빈현에서 중국 관헌에게 체포되었다는 기사가 매일신보 1929년 12월 5일자에 실린 뒤, 그는 친일파로 변절했다.[1] 1934년 9월 간도협조회가 조직되었을 때 위원장을 역임했으며, 1936년 12월 간도협조회가 만주국협화회로 합병되었을 때 위원으로 활동했다. 또한 김승학은 '망명객행적록'에서 1930년대 중반 환인현 일본영사관 소속으로 독립운동가들을 일제 귀화시키는 사업에 앞장선 인물이 김검군(金劒君)인데, 이 자는 곧 만주국 선무반 책임자 김이대라고 기록했다.

이렇듯 만주에서 독립운동가 회유에 앞장서며 친일 행적을 벌이던 김규환은 1941년 1월 13일 평북 선천군에서 사망했다. 그의 유해는 본적지인 경기도 고양시 선영에 안장되었다가, 국립서울현충원 충혼당 320호실에 이장되었다.

사후[편집 | 원본 편집]

대한민국 정부는 1987년 김규환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그러나 그가 만주사변 이후 친일 행적을 벌였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2019년 서훈 취소되었다. 하지만 그의 유해는 현재까지 국립서울현충원에 남아 있다.

각주

  1. 1933년 말까지 흥사단 원동위원회 단원으로 활동한 기록이 있으므로, 정확한 변절시기는 1933년 말 이후인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