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식 (1888년)

김원식 (1888년).jpg

金遠植. 명은 김소창(金笑蒼), 자는 계서(繼西).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8년 8월 28일 경상도 안동대도호부 서후면 금계리(현 경상북도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안동군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한 뒤 그해 4월 중화민국 봉천성으로 피신하여 서로군정서에 가입하였으며, 군자금 모집 및 교포와 동지들의 지원에 전력을 다하였다. 1921년에는 서로군정서 독판(督辦) 이상룡의 지령을 받고 국내에 입국하여 각지에 연락하여 군자금 모집을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1922년에는 일제 주구기관 숙청 대열의 참모로서 활약하는 한편 대한통의부에 가입하여 동북면 군사연락위원으로 베이징에 주재하여 활약하였다.

1924년에는 정의부(正義府)에 가담하였으며, 1926년 11월에 신헌장에 의거하여 김동삼·이광민·오동진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4월에는 만주지방으로 이주한 농민들의 생활개선을 위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조직, 김기풍(金基豊)·김진호(金鎭浩)·김이대(金履大)·김호·김동삼 등과 함께 재만동포의 산업생산의 증가, 교육의 발전, 위생과 보건의 향상을 위하여 일하였다.

1927년 5월에는 길림성 반석현(磐石縣)에서 재류한인 보호를 위하여 보호회(保護會)를 조직하고, 최호(崔浩)·이광민·이상경(李相慶)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에 선출되었으며, 1928년 7월에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서 열린 중국 본부 한인청년동맹(韓人靑年同盟) 상해지부 집행위원회에서 선전조직부원에 임명되어 활약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정의부의 제의를 받고 길림 근방 신안둔에서 개최된 3부통일회의에 정의부 대표로서 김동삼·현익철·최동오·김이대 등과 함께 참석하여 신민부 대표 김좌진·김종진·김칠돈(金七敦)·이연(李淵), 참의부대표 심용준·임병무(林炳武) 등과 함께 3부 통합을 위해 적극 노력하였으나 각 부의 의견이 통일되지 않을 뿐 아니라 정의부 자체내의 분열이 표면화되어 실패하였다.

1928년 8월 24일에는 정의부 제5회 정기중앙의회에서 민족유일당재만촉성회를 지지하여 중앙집행위원 지청천·이종건(李鍾乾)·최명수(崔明洙)·이규동(李圭東)·김상덕·김동삼 등과 함께 직무 포기를 성명하고 정의부를 탈퇴하였다. 한편 3부 통합회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자 그는 신민부의 군정위원회측, 참의부의 김승학 계열과 함께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중앙집행위원장에 임명되어 혁신의회의장 김동삼·중앙집행위원 김승학·정신·황학수 등과 함께 혁신의회를 이끌어갔다.

1930년에는 유호상해한국독립운동자동맹의 총무부장으로서 한국민족해방혁명운동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적극 노력하였으며, 1931년 11월에는 이 단체가 상해한인청년동맹과 합하여 상해한인반제동맹을 결성하자 한국혁명의 지원역할과 세계반제혁명의 세포적 임무를 수행하는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1932년 4월에는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 찹살로(薩坡賽路)에 잠입하여, 전 국민부 군사위원장 이웅(李雄)을 만나 만주의 정세 및 항일운동방략을 협의하기도 하였다.[1]

또한 1934년 2월에는 한국혁명당의 대표 윤기섭·연병호 등과 난징에서 회합하고 재만한국독립당(대표 홍진)과 한국혁명당을 통합하여 신한독립당을 결성하였으며, 이후 신한독립당은 의열단을 비롯한 기타 각지 민족단체와 합류하여 1935년 7월에 민족혁명당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그러다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고, 만주로 도로 망명한 뒤 1940년 1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김원식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1]
  • 디지털안동문화대전[2]
  • 독립유공자 공훈록[3]

각주

  1. 이즈음 길림성 반석현 동내외 대동조합(東內外大東組合) 내에 거주지를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