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경

玄正卿. 본명은 현병근(玄炳瑾), 자는 수강(守岡), 호는 하죽(河竹).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1년 10월 9일 평안도 박천군 동면 상강동(현 평안북도 박천군 상양리)의 빈농가에서 아버지 현규상(玄圭相)과 어머니 고부 이씨 사이의 4형제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부윤공파 28세로, 훗날 독립운동을 함께한 현익철과는 18촌 지간이었다.[1] 그는 빈농의 자식으로 태어났지만, 환경을 탓하지 않고 낮에는 부친을 도와 밭을 갈았고, 밤에는 공부를 하며 지냈다. 또한 매우 순박하면서도 솔직한 성격의 소유자여서 불의만 보면 참지 못하고 선한 일만 고집했다고 한다.

1904년 대한제국 정부가 일본인 고문의 뜻에 따라 백일세(白一稅) 제도를 시행하자, 현정경은 다수의 동지를 규합하여 백일세 제도를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다. 또한 평안북도 박천, 안주 등의 민중을 동원하여 재무소를 습격해 일본인 재무소원을 살해했다. 이로 인해 수십명이 체포되자, 그는 박천군을 떠나 각지를 떠돌며 동지를 규합했다. 그러던 중 유인석과 대면한 그는 곧 유인석의 제자가 되었고, 그로부터 위정척사복벽주의를 전수받았다.

1912년, 현정경은 중국 동삼성 반석현으로 망명하여 항일단체인 한족회(韓族會)에 가입하고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 조선독립단원이 되어 민족독립사상 고취와 무장투쟁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1919년 3.1 운동박장호, 조맹선 등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대한독립단에 참가해 서기장으로 임명되었다.

대한독립단은 공화주의를 주장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반대하고 복벽주의를 주장했다. 현정경은 이 단체에서 활동하며 복벽을 꿈꿨지만, 얼마 후 대세가 공화주의로 기우는 걸 보고 새로운 근대적 민족주의 국가로서 공화주의를 추진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이리하여 그는 대한독립단에서의 활동을 그만두고 서로군정서에서 활동했다.

1920년 2월, 현정경은 동삼성 관전현 향로구에서 한족회 회원 중 소장파의 현익철(玄益哲)·이호원(李浩源)·김석선(金錫善)·홍원경(洪元京) 등과 함께 광한단(光韓團)을 조직하고 위원장에 취임하였다. 국내 각지에 군면지단(郡面支團)을 조직하고 단원을 파견하여 결정적 시기에 일시에 궐기할 것을 실천하기 위해 일본군 행정기관의 파괴와 군자금을 모집하며 활동하다가 1920년 12월 일경의 습격으로 붙잡혔다.

그 후 몇달간 구류되었다가 출옥한 그는 1922년 8월 동삼성 환인현 마권자에서 서로군정서·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대한정의군(大韓正義軍)·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 등 각 단체대표가 모여 통합회의를 열어 통의부(統義府)로 확대 개편할 때 김동삼이 중앙집행위원장으로 선출되자, 자신은 김동삼 휘하의 법무위원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또 행정위원 10명으로 최고행정기관을 구성하게 되었을 때 김동삼·김이대(金履大)·이종건(李鍾乾)·이웅해(李雄海)·오동진·김병조(金秉祚)·장기초·김동산(金東山) 등과 함께 위원으로 선출되어 행정위원장직을 맡아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2년 10월 14일, 현정경은 전덕원 일당의 습격으로 양기탁, 김관성, 황동호 등 10여 명과 함께 포박되어 심하게 난타당했다. 이후 전덕원 계열의 복벽주의 인사들은 통의부에서 탈퇴하고 1923년 봄 의군부를 조직했다. 1924년 11월 25일 동삼성 길림에서 분산되어있는 독립운동단체의 재단합을 위하여 전만통일회의주비회(全滿統一議會籌備會)를 개최하고 통의부·대한군정서·광정단(匡正團)·의성단(義成團)등 8개 단체가 통합하여 정의부(正義府)를 창립하였을 때, 그는 이탁·지청천·이진산(李震山)·김이대 등과 함께 중앙행정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민사위원장(民事委員長)으로 피선되어 활동하였다.

그후 1926년 4월 5일에는 길림에서 양기탁·고할신(高轄信)·곽종대(郭鐘大)·정이형 등과 함께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을 조직하고 양기탁을 위원장으로, 이동구(李東求)를 책임비서로 선출한 뒤 동년 11월 9일 고할신·현익철·이동구 등과 함께 중앙집행위원이 되어 활동하였다. 이듬해 1927년 4월 1일에는 민족단결과 농민생활의 개선을 주장하는 안창호의 주장에 공명하고 산업진흥을 위하여 근대 과학적 영농법과 기계화 및 교육기관의 설치, 보건계몽, 의원설치(醫院設置) 등의 사업추진을 위하여 농민호조사(農民互助社)를 발족시킬 때 발기인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동년 4월 15일 정의부 주최로 민족유일당 조직촉성을 위하여 길림성 신안둔에서 제1회 대표자회의를 개최하였을 때, 김동삼·오동진·이광민·김원식(金元植)·고할신 등 11명과 함께 정의부 대표로 참석하였다.

1929년 3월 정의부에서는 주창하던 참의부(參議府)·신민부(新民府)와의 3부통합이 실패로 끝나자 새로운 군정부 조직을 목적으로 제2차 3부통합 회의를 열고 동년 4월 1일 국민부(國民府)를 발족케 하였으며, 현익철을 중앙집행위원장에 선출했다. 이때 현정경은 중앙집행위원회 법무위원장으로 피선되었다. 동년 11월 15일 현익철·이동림(李東林)·이진탁(李振卓)·장승언(張承彦) 등과 함께 조선독립단(朝鮮獨立團)을 창립하고 화흥(化興)학교를 설립하였으며, 12월에는 민족유일당을 지향하는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을 창당하는 한편 당군(黨軍)으로서 조선혁명군(朝鮮革命軍)을 창군한 뒤 조선혁명당의 중앙집행위원장 겸 비서부원장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발생했다. 공산주의에 감화된 현정경은 전향해 조선혁명당의 향우 거취를 놓고 좌파그룹의 리더가 되어 민족주의 우위를 주장하는 인척 현익철 및 우파 그룹과 격렬하게 대립하기 시작했다. 현익철 등 민족주의 계열은 국민부를 적극 옹호할 것을 주장했지만, 현정경 등 공산주의자들은 국민부 및 조선혁명당이 민중과 유리되었음은 자명하므로 해체하고 중국공산당에 가입하며 홍군을 결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급기야 1930년 8월 20일, 현정경은 쿠데타를 벌이기로 결심하고 농민 100여명을 선동하여 국민부 본부를 습격했다. 국민부는 이에 맞서 중국 군경을 매수하여 농민 3명, 자위대원 3명, 국민부 좌파 3명과 현정경의 동지 이동림을 체포하여 현공서로 구속시켰다. 이후 국민부는 체포한 3명을 사살했고, 반국민부파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국민부 간부 김문거를 총살했다. 이후 10월 23일에는 이진탁과 박청산이 중국 관헌의 습격을 받아 총살되었고, 현정경은 체포되어 신빈현 감옥에 수감되었다.

몇 달 후 출감한 현정경은 조선혁명당과 인연을 끊고 열하로 가서 혁명 사업을 지속하고자 했다. 그러나 일제가 만주사변을 단행한 뒤 열하까지 그 세력이 미치자, 그는 1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포두로 이동했다. 그 후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김성숙, 박건웅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朝鮮民族解放同盟)을 충칭에서 조직하여 주석으로 추대되었다. 이 단체는 후에 조선민족전선연맹(朝鮮民族戰線聯盟)으로 발전되었다.

이후 좌파 계열 독립운동세력과 우파 계열 독립운동세력간의 대립이 심화되자, 현정경은 통일된 조직을 건설하고 통일된 정책 하에 독립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전민족적반일통일전선을 수립하고 통일된 한국 독립군을 조직해야 하며, 중국 당국과 전면적 민족적 외교관계를 건립하여 국제 원조를 쟁취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1939년 4월 충칭에 도착한 김구를 위한 환영회를 개최했으며, 1940년 기강에서 열린 독립운동단체 연합회의 석상에서 각 단체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로 총결집해야 함을 주장했다. 그러다 병을 얻은 그는 1941년 5월 1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2년 현정경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현정경의 민족운동과 그 향배>, 황이슬, 한국민족운동사연구, 2016.[1]

각주

  1. 현익철은 부윤공파 26세 익(益) 항렬로, 나이는 현정경보다 6살 어렸지만 족보상으론 할아버지 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