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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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默.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88년 12월 9일 선산 김씨 집성촌인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도량리에서 출생했다. 호는 해산(海山)이며, 이명은 김규환(金奎煥), 김국빈(金國賓)이다. 그는 어릴 때 집안에서 한학을 수학하였고, 한주학파 성리학자 이승희의 문인이 되었다. 1907년 3월 성주군 국채보상의무회에 참여해 회장을 맡은 스승 이승희를 도와 부회장으로 활동하였고, 1908년 11월에는 대한협회 성주지회의 부회장을 맡았다. 1911년 장인 이덕후가 동문인 이승희가 밀산에 건설한 독립운동기지 한흥동을 찾을 때 처남 이우강과 함께 동행하였고, 한흥동에서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참여하다가 1913년 7월 이승희가 단둥현으로 이동할 무렵에 귀국하였다.

1914년 중국 베이징으로 유학을 떠난 그는 1914년 북경법정전문학교 법률과에 입학했다. 이 학교는 예과 1년, 본과 3년의 총 4년 과정으로 운영되었고, 수업 내용은 정치과, 경제과, 법률과가 서로 달랐지만 대체로 행정법, 정치학, 국법학, 정치사 등을 가르쳤다. 4년간의 수학을 마치고 1918년 졸업한 뒤, 베이징에서 한인의 예비교양에 힘을 기울였다. 이당시 베이징에는 한인이 85명 정도 거주했는데, 이승희가 1913년 베이징에 동삼성공교회를 설립하여 활동할때 참여한 공교회원들이 다수였다. 김정묵은 전통 한학만 알고 있던 이들에게 근대학문도 가르쳐서 시대의 흐름에 뒤쳐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1918년 4월 만주 훈춘 등지를 다니면서 정재관과 함께 독립전쟁의 준비 활동을 하였다. 일제 정보 기록 <배일선인의 행동에 관한 건> 1918년 4월 12일자 기록에 따르면, 그는 이 지역에서 일본과 독일 또는 러시아의 개전이 있을 때는 반드시 분기할 것, 훈춘, 왕청, 연길 세 현과 북한 지바의 일본군의 군비를 탐지하여 이를 송황령에 있는 정재관에게 밀보할 것, 훈춘에 밀정의 목적 수행을 위하여 가장상점을 개설할 것 등을 목표로 삼았다고 한다. 한편, 그는 봉천에서 장진홍, 이국필과 만나 독립문제를 논의한 뒤, 장진홍으로 하여금 하바롭스크로 가서 거주 조선인 78명에게 군사훈련을 시키도록 했다.

3.1 운동 발발 후인 1919년 3월 연해주에서 대한국민의회가 조직되고, 1919년 4월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었다. 이때 김정묵은 상하이로 이동하였다. 그는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는 참여하지 않았지만 1919년 4월 29일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대의원 선거에서 경상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의원으로서 여러 정책을 결정하는 데 참여했다. 4월 30일부터 5월 12일까지 진행된 임시의정원 제4회 회의에서, 그는 임시정부 장정 결정, 의장 손정도와 부의장 신성 선출, 국무총리 대리 이동녕 선출, 공채 모집, 의무금 징수, 의연금 모집 등을 통한 재정 확보책 등을 논의하여 결정했다. 그리고 5월 6일 회의에서 구급재정위원 선정과 의원자격 검사, 5월 9일 국무총리 대리 사면청원 수리, 의원사면청원 수리, 5월 10일 법무총장 사면 수리 및 보선임을 결정했다. 그리고 5월 12일 국무위원의 시정대요 연설을 청취하였고, 회의 마지막 날인 5월 13일 의원사면청원 수리, 임시의정원 세칙 제정에 관한 결의를 하였다.

1919년 7월 7일 오후 2시에 장안리 민단사무소에서 개회되어 7월 19일 오후 9시 30분 폐회한 임시의정원 제5회 회의에서, 김정묵은 법무총장 남형우의 사면을 수리하였고, 상임위원회를 조직하고 내무총장 안창호의 시정연설을 청취했다. 7월 9일 회의에서 위원회를 조직하고, 내무총장 안창호에게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변을 들었다. 7월 10일 회의에서 국제연맹에 제출할 안건의 작성을 임시정부에게 일임하지 않고, 의회에서 선정한 연구위원이 함께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대한국민의회와 임시의정원의 통합 문제를 논의하였고, 국채통칙과 공채발행 조례에 대해 토의했으며, 외교 특사와 외국 공채 발행, 국채통칙과 국채발행조례에 대한 결의를 하였다.

1919년 8월 18일 오후 2시 장안리 민단사무소에서 개원하여 9월 17일에 폐원된 임시의정원 제6회 회의에서, 김정묵은 국제연맹 제출안건 심사, 임시정부 개조 및 임시헌법 개정에 관한 제안 등을 논의했다. 특히 이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성정부,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의정원과 대한국민의회와의 통합을 추진하고, 정부의 체제를 한성정부를 표준으로 하여 총리제에서 통령제로 변경하였다. 이렇듯 의정원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였으나, 1920년 3월 3일 임시의정원법 제8조에 의해 오의선, 이규갑, 이정규, 유흥식, 김갑, 박건병과 함께 의원 자격을 상실했다. 사유는 3일간 결석하였다는 것이었다.[1]

의원 자격을 상실한 후, 김정묵은 1920년 중반 베이징으로 이동했다. 김정묵의 맏손자 김광조가 1982년에 국가보훈처에 제출한 <김정묵 공적서>에 따르면, 김정묵은 베이징 서도문 외곽 팔만정에 유시언, 최용덕 등과 함께 사비로 집의학교를 설립하여 한인 학생 60여 명을 가르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고 한다. 다만 일제의 정보 문서[2]에 따르면, 1921년 군사통일회의 직후 만주에서 베이징으로 온 이세영과 김성준이 교육회를 조직하고 서산 부근의 향산에 집의학교를 설립하였으나 재정문제로 1922년에 문을 닫았다고 한다.

1921년 초, 김정묵은 베이징에서 신채호, 김창숙 등과 함께 <천고>를 발간하였다. 천고는 일본 제국주의의 야만성과 동양평화 교란, 항일무장투쟁과 한중항일연합전선 결성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한일친선의 허위성 등을 폭로했다. 또한 1921년 5월 21일 신채호, 박봉래와 함께 '통일책진회'를 발기하고 다음과 같은 취지서를 발표했다.

1. 진정한 독립정신 밑에 통일적 광복운동을 함.

2. 정부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여 시국을 수습함.

3. 군사 각 단체를 완전히 통일하여 혈전을 꾀함.

1921년, 김원봉, 서왈보, 한진산, 황학수 등과 함께 길림성 왕청현에 근거를 두고 활동하던 북로군정서의 김좌진과 연락하여 북로군정서를 중심으로 군사단체를 통일하려고 했다. 송상도기려수필에 기재된 구상안에 따르면, 제1대는 러시아 정소원, 제2대는 조선 청림당, 제3대는 베이징 정아단, 제4대는 간도용정촌 정아단, 제5대는 조선 고려혁명당, 제6대는 북경 광복단 등을 조직할 작정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금이 부족하여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한편 일제 정보기록 <참칭 상해가정부 간부의 당파별>(1921.5.10)에서는 김정묵이 안창호 계열 인사로 분류되었다. 이는 김정묵이 1918년 초 안창호의 심북으로 활동하던 정재관과 함께 했던 것을 주목한 판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정묵은 1921년 말 천진에 머물다가 모스크바에서 개최되는 극동피압박민족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천진에 찾아온 여운형, 남형우, 최창식, 박용만, 그리고 국내에서 온 2명과 밀의했다. 일제 정보기록 <대한국민협회 래도에 관한 건>(1922.1.6)에 따르면, 그는 1921년 10월 북경, 장춘을 경유하여 러시아에 입국하기로 결정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김정묵이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한 사실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이후 김정묵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변혁을 꾀하기 위해 소집된 국민대표회의 개최에 관심을 기울였다. 1922년 12월 말 베이징에 머물던 그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김창숙, 김대지, 정인교와 함께 상하이로 출발했다. 이 사실은 동아일보 1922년 12월 26일자 기사 '북경에 체류중이던 김정묵씨 국민대표회에 출석코자 상해로 출발'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국민대표회의에 참가한 사실은 현재까지 확인되지 않았다.

1923년 여름, 김정묵은 베이징에서 중한호조사를 조직하고 사원으로 활동했다. 중한호조사는 한국의 독립지원과 중국의 주권 보장, 문화와 예술의 교류 등을 통한 한중 국민의 행복 도모 등을 목표로 삼았다. 1924년 4월 미국 북감리파 동양감독 미국인 선교사 웰치가 경성에 들렀다가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간 뒤 "조선의 치안은 평안하다"라는 취지로 이야기한 것이 베이징의 <동아시보.에 보도되었다. 이에 김정묵은 베이징 거주 한인 6~7명과 함께 임시선전회를 조직하고 한인이 일본의 통치에 만족하고 있지 않다는 취지의 선언문을 기초하여 북경의 금강동 등 수 곳에 격문을 부착했다.

1924년 6월 4일 베이징의 천도교실에서 7명의 의원과 임시회를 개최하고 5월 7일에 있었던 하얼빈 사건을 성토했다. 그는 "중국군대가 일본총영사의 교섭에 의하여 독립운동가 김만수, 류기동, 최병고 등 3인을 섬멸한 것은 한편으로는 중국이 정치범인을 겁내서 처형한 것이어서 국제법 위반이며, 한편으로 모름지기 중국 군인이 일본관헌의 강박에 중국의 죽권이 침해당하게 된 데에 이른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이러한 내용의 전단을 발행하여 중국의 국회와 각 성의 군부대에 배포하기로 결정했다. 이때 그는 남형우와 함께 선언문기초위원으로 활동했다.

1924년 7월 21일 북경한교동지회 조직에 참여하여 '고주은행 강도사건'으로 체포된 한인 김세준의 석방을 위해 노력했다. 그는 조국 광복의 사상이 철저하고 품행이 단정한 사람에게 가입자격을 주기로 했으며, 북경재주 한인의 친목호조를 위주로 하여 지식을 배양하고, 의에 복종하고, 간사함을 배척하는 활동을 하였다. 그러다 1925년경 하얼빈으로 이동하여 봉천군 곽송령 장군의 부대에 들어가 육군장교로 봉직하며 천진에 파견되어 활동했다. 그가 곽송령 부대에 들어간 배경은 명확하지 않으나, 이 시기에 장작림이 일본으로부터 무기를 구입하여 남방의 국민군을 공격하려 하자 곽송령이 펑위샹의 국민군과 연합하여 장작림에게 반기를 든 것과 연관이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는 김정묵이 1923년 베이징에서 중한호조사를 조직하고 활동한 게 곽송령 부대에 근무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수도 있다.

1925년 11월 곽송령이 반봉사건을 일으켰다가 실패하고 12월 사형당했지만, 김정묵은 하급 장교였기에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는 1926년 동북군 제19여단 사령부 군법처에서 근무하였다. 그동안 의열단을 후원하였고, 김창숙이 주도한 제2차 유림단 사건을 후원했다. 제2차 유림단사건은 만주나 몽고에 독립운동근거지를 건설하려던 김창숙이 1925년 8월 조선에 잠입하여 1926년 3월까지 전국 각지를 돌며 군자금을 모급한 뒤 출국한 사건으로, 이 사건이 발각되면서 많은 유림이 1927년까지 일제의 강압수사로 고통을 겪은 사건을 일컫는다. 이때 김정묵은 조선에 잠입하기 위해 하얼빈에 들린 김창숙을 만나 도움을 주고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일제가 궐석재판에서 그에게 '대령 8년 제령 제7호 위반 및 총포화약류 취체령 위반' 혐의를 적용한 걸 보면, 김창숙에게 총포화학류를 지급했을 수도 있다. 또, 1927년 10월 18일 장진홍이 조선은행 대구지점을 폭파한 사건에도 관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1926년, 김정묵은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결성에 참여했다. 이 단체는 1926년 10월 10일 원세훈, 장건상, 조남승, 조성환, 배천택, 김광천, 박건병 등이 민족혁명을 위한 대독립당의 결성을 촉구한 데서 비롯되었다. 김정문은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 창설회의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10월 28일 발표된 선언서에 서명했다. 그리고 일본 제국주의의 박멸, 한국의 절대독립 주장, 한국 혁명 동지의 당적 결합, 민족혁명의 유일전선 결성, 전세계 피압박 민족의 단결 등을 골자로 하는 대독립당조직북경촉성회의 강령을 적극 지지했다.

한편, 김정묵은 봉천군 제19여단의 군법처장으로 근무하면서 마적과 토빌의 토벌에 상당한 공을 올렸다. <신한민보> 1933년 3월 30일자 '김규식 박사의 연설' 기사에 따르면, 마적이나 의용군은 봉천군 한인 장교 '김국빈'(김정묵의 이명)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 또한 그는 만주지역 거주 한인들의 사회, 경제적 권익을 옹호하는 활동을 전개했다. 먼저 1926년 11월경 장건상, 박승병, 조성환, 강구우 등이 남북만주 이주 200만 한인의 정치, 경제상 이익을 옹호하고, 비참한 상황에 빠진 이주민의 권리와 이익을 옹호하고 생활 개선을 위해 하나의 단체를 만들 것을 제안하자, 이에 공감하여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1930년 1월 17일 봉천에서 육군대좌를 맡아 동북성 군법처의 처장으로 활동하면서, 중국인들이 한인을 일본의 정탐으로 보는 태도를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1930년 10월경 돈화지역의 공산주의자들이 사회운동의 일환으로 철교를 폭파하려 했다가 체포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한인 15명이 총살당했고, 많은 한인이 공산주의자로 간주되어 처형되었다. 그러자 한국독립당의 김동삼, 신숙 등은 간부회의를 통해 무고한 민중을 구출하기 위해 동삼성을 장악한 동북정무위원회 직속하에 가칭 '간민관리국'을 두고, 각 성, 현, 향, 촌에 분국을 두고자 하였다. 김정묵은 이를 지원하기 위해 김동삼, 김규환 등 7인과 함께 '전만간민대표'의 명의로 청원서를 작성한 뒤 동북정무위원회에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장쉐량에게 면담을 요청했다. 그러나 장학량은 면담을 거부했고, 1931년 1월 말 동북정무위원회는 거절을 통보했다. 1931년 만주사변 발발 후, 김정묵은 장학량이 일본군을 상대로 저항하지 말라고 지시한 것에 분노하여 동북군계의 군직을 물러났다.

백범일지에 따르면, 김구훙커우공원 의거 전날 윤봉길과 함께 '김해산' 집에 들러서 윤봉길과 최후의 식사를 하였다고 한다. 이때 김해산이 윤봉길의 침착하고 용감한 태도를 보고 김구에게 이런 권고를 하였다.

지금 상해에 민족 체면을 위하여 할 일이 많은데 윤군 같은 인물을 구태여 다른 데로 보낼 것을 무엇이우?

김구가 답했다.

일은 하는 사람에게 맡기는 것이 좋지. 윤군이 어디서 무슨 소리를 내나 들어봅시다.

이 '김해산'이 김정묵일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원손인 대구대교수 김성우의 증언에 따르면, 김정묵의 부인은 1960년대에 사망하기 전까지 남편과 함께 윤봉길의 의거를 지원했다는 사실을 증언했다고 한다. 국가보훈처는 1991년 공적 재심사에서 김해산의 윤봉길 의거 지원을 김정묵의 공적으로 인정하였고, '독립유공자공훈록'에도 이 사실이 김정묵의 공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사실이다.

백범일지에서 기재된 김해산은 윤봉길 의거 후 안창호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이 검거되는 상황에서 1932년 5월부터 12월까지 위혜림과 함께 거주하다가 1933년 1월 상해의 마르셀 틸로 153호로 이사하였고, 1933년 12월 엄항섭, 위혜림, 안공근 등과 함께 활동했다. 그러다 1933년 12월18일 옥관빈 피살사건의 피해자 옥관빈의 형 옥성빈이 아편제조소를 설립하기 위해 김해산을 찾아갔다가 살해된 사건이 벌어졌고, 김해산은 이로 인해 체포되어 1934년 1월 2일 극비리에 국내로 압송되었다. 그런데 재판기록에 따르면, 이 김해산은 김정묵이 아니라 '김문희'이며, 백범일지에서 기재된 김해산이 거주하였다는 '마르셀 틸로 153호'와 일치한 장소에 거주했다. 따라서 윤봉길 의거를 지원한 '김해산'은 김정묵이 아니라 '김문희'일 가능성이 높다.

1934년 12월 8일 일재 정보원들이 기록한 <이규채 청취서>에 따르면, 김정묵은 베이징의 북평성 덕승문 내의 고릉에 거처를 마련하고 중국인 아내 및 아들 한 명과 함께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는 1932년 6월부터 7월 중순에 김원봉, 이천민, 고활신 등과 함께 중앙항일의용군을 조직할 때 관여하여 동북항일구국회에 참여했다. 그는 1932년 7월 의열단이 항일구국회에 제출한 <중한합작의 관한 건의>에서 열하 지역에 건설된 한인혁명군 책임자로 거론되었다. 의열단은 김정묵을 열하에 파견해 동남부 각 부대(병력 3만 명, 소총 2천정)와 협력하여 군을 편성하고, 열하와 요서의 각 구국군과 함께 열하 주변을 고수하고, 당해 지역의 한인 의용군으로써 '제3총대'를 조직하여 동북의용군을 충실히 하고 한교혁명군을 양성할 것을 제안했다.

1932년 8월경, 김정묵은 중국 군분회의 법무관에 보임되었다. 당시 국민정부는 장학량을 군사위원회 산하 북평분회 대리위원장에 임명했다. 즉, 김정묵은 1932년 8월 직후 장학량이 대리위원장이지만 국민정부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던 북평분회에서 법무관으로 활동하였던 것이다. 1933년 2월 일본 관동군이 열하사변을 일으키자, 중국의 장령 약 50명은 김정묵을 회의에 초청하여 독립대의 사령관을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일제가 이를 좌시하지 않고 압력을 가했고, 1933년 3월 10일 군사위원회 북평분회가 해산될 때 김정묵은 해직되었다. 하지만 그는 해고된지 얼마 되지 않아 북평시정부에 발탁되어 중국인 유력자 주수광으로부터 봉급을 받아 생활했다.

주수광은 산시군벌 옌시산 휘하의 총참모장으로, 1928년 북벌 공략을 벌여 베이징을 장악한 뒤 옌시산을 등에 두고 베이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인물이었다. 김정묵은 이 시기 국민당의 군사위원회와 북경시정부, 그리고 옌시산 군벌에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이러한 위상을 배경삼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설립과 운영을 지원했다. 그는 1932년 10월 20일 간부학교 개교에 기여하였고, 제1기, 제2기의 학생 모집과 학교 운영에 기여했다. 북만주 한국독립당의 군사부부장 지청천 휘하에서 참모장으로 활동했던 이규채가 간부학교에 난징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에 입교하기 위해 1933년 4월 베이징에 왔을 때, 김정묵은 이규채에게 4일 동안 숙소를 제공했다. 그러면서도 이규채에게 만주 지역의 독립운동 상황을 탐문했다.

또한 김정묵의 아들 김교삼은 '양민산'이라는 가명으로 1932년 10월 20일부터 1933년 4월 20일까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의 대원으로서 훈련받았다. 그리고 1933년 9월 16일부터 1934년 4월 20일까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제2기의 교관으로서 진중요무령, 유격대조직법, 폭탄제조사용법, 중기관총조종법과 경기관총조종법의 야간연습과 야외연습 등을 교육했다. 김교삼은 1933년 9월경 난징에서 안정득의 신분을 조사한 후 난징 교외 강녕진의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로 인솔하였고, 1934년 5월 김원봉으로부터 받은 100원을 홍가륵에게 주어 그의 반일반전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국내 전진대 활동을 후원했다. 또한 1935년 3월 난징의 의열단 본부에 기거하며 활동했다.

1934년 이후 김정묵의 행적이 어땠는지는 기록이 미비해 알기 힘들다. 얼마 안 되는 기록에 따르면, 그는 베이징에 거주하면서 날로 악화되는 건강을 정양하였고, 1941년 이후 베이징에서 모종의 독립운동을 꾀했다고 한다. 당시 베이징은 일본군이 장악하고 있어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으므로, 이 점에 대해서는 추가적인 조사가 필요하다.

김정묵은 1944년 4월 19일 오후 2시경 일본 치하에 있던 베이징 시내 5구 덕승문 내 고릉 갑 10호에서 사망했다. 향년 57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김정묵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각주

  1. 독립신문 1920년 3월 6일자 '임시의정원기사'
  2. <북경재주조선인의 최근 상황 보고의 건>(1924.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