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건병

朴健秉.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2년경 강원도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8월 11일 강원도 철원군 동승면 도피안사에서 김상덕(金相德)[1]과 회합하여 대한독립애국단(大韓獨立愛國團)의 지부인 철원군단(鐵原郡團)을 설치하기로 하고 독립운동의 정세 및 민심 동태 등을 애국단 본부에 보고했고,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하면서 임시정부에서 내려오는 각종 명령을 실행하기로 했다.

이후 그는 철원군단 학무과장에 선임되었고, 1919년 10월 10일 전단을 만들어 철원면 내의 민가에 배포했으며, 오후 8시 철원면 사요리 우시장에서 미국기, 만국기, 태극기를 계양하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군중들에게 시위 운동에 참가하도록 독려했다. 그 후 일제의 수사망이 좁혀오자, 그는 순사들의 추적을 따돌리고 상하이로 건너갔고, 1920년 1월 2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강원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 4월 20일 베이징 교외 삼패자 화원에서 개최된 군사통일주비회에서 국민대표회 주비위원으로 선임되었으며, 동년 9월 상하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에 참여했다. 또 1925년 6월 2일 베이징에서 조남승(趙南升) 등과 함께 참여해[2] <중국 국민의 구국구족운동에 당하여 우리 2천만 형제자매에게 고함>이라는 항일선전문을 발표했다. 선전문의 내용은 "중한(中韓)이 연합하여 일본을 총공격해야 하며, 국내외의 각종 사회단체와 한국 민족운동 단체와 연합 합작의 의지를 표시하며, 중국 국민운도애에 대하여 정신 및 물질의 응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1926년 10월 16일, 박건병은 상하이에서 결성된 한국독립유일당 베이징 촉성회의 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28년 5월 12일부터 26일까지 15일간 동삼성 화전과 반석으로 옮기면서 개최된 전민족 유일당 조직회에 참석하여 중국 관내 및 동삼성 일대의 항일민족운동 단체들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그러나 이후의 경력은 기록이 미비해 알 수 없으며, 그가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도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3년 박건병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각주

  1. 2.8 독립선언에 가담한 김상덕과 동명이인이다.
  2. 이때 선두자사(先頭者社)라는 예명을 사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