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베리아연합

이베리아연합
[스페인어] Unión Ibérica
[포르투갈어] União Ibérica
1580~1640
Full Ornamented Coat of Arms of Philip II of Spain (1580-1598).svg
국기
Spanish Empire Anachronous en.svg
나라 정보
수도 마드리드
공용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국교 카톨릭
정부유형 전제군주정

1580년, 스페인 왕국포르투갈 왕국을 흡수하는 형태로 성립된 동군연합. 1640년까지 지속되었다.

성립[편집 | 원본 편집]

1578년 포르투갈의 세바스티앙 1세가 모로코의 알카세르 퀴비르(Alcacer Quibir) 전투에서 후사없이 24세로 전사한것이 시작이었다. 모로코와의 전투에서 포르투갈군 23,000명중 8000명이 전사하고, 15,000명이 포로가 된 포르투갈 역사상 대참패였다. 더군다나 국왕까지 무리한 닥돌로 전사하고, 후사까지 없었으니 설상가상.

결국 삼촌인 엔히크 추기경이 급하게 땜빵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엔히크 추기경도 직계후손 없이 노환으로 사망하고, 곧 브라간사 방계 가문의 안토니우 ,엔히크 추기경의 조카 카타리나, 어머니가 포르투갈 공주였기에 포르투갈 왕위계승을 주장한 스페인의 펠리페 2세, 세 명이 재위를 다투었다. 결국 최종 승리자는 포르투갈 구 귀족의 지원을 받은 펠리페 2세가 되었고, 알바 공작이 이끄는 스페인군이 리스본을 점령하면서 공식적으로 스페인, 포르투갈이 같은 국왕을 모시는 이베리아 연합이 성립되었다.

포르투갈 입장에서[편집 | 원본 편집]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손해만 본 기간이었다. 일단 포르투갈이 충실히 쌓아오던 대외관계가 박살났다. 공식적으로 스페인과 동군연합을 이루면서 포르투갈의 외교권이 박탈되었고, 스페인과의 적대국가 = 포르투갈의 적대국가 관계가 되버렸다. 특히 1386년부터 이어져온 포르투갈의 가장 오래된 동맹국인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악화 시켰고, 잉글랜드의 지원을 받은 사파비 왕조에 의해 1622년 인도양의 중요 거점 호르무즈를 잃었다.

17세기 중반에는 네덜란드의 공격으로 동남아시아에서 완전히 수세에 몰리면서 1641년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에 의해 동남아시아 최고의 요충지인 말라카(몰루카) 가 함락되었고, 소순다열도와 티모르섬 일부를 제외한 동남아시아의 포르투갈 거점을 모두 네덜란드에 빼앗겼다. 반대로 네덜란드 입장에서는 국운이 상승하며 1세기간 이어질 황금기의 시작이었고, 아시아에서 무역을 쥐던 포르투갈이 결정적으로 쇠퇴하고 네덜란드가 아시아 무역의 맹주로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브라질 식민지마저 브라질 북부 페르남부쿠에 나사우 공 마우리츠가 이끄는 네덜란드군이 상륙하여 니우홀란트 식민지(Nieuw-Holland)를 성립시켰다. 네덜란드는 이곳을 설탕 플랜테이션으로 개척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했다. 다행히 브라질 식민지는 포르투갈이 독립 이후 1654년 탈환하였고, 마카오도 5번에 걸친 네덜란드의 공격을 막아내어 체면을 살렸다.

한편 스페인은 전비 조달을 위해 포르투갈 상인들에게 중과세를 때리는 한편(1587), 포르투갈 정부의 요직에 마드리드에서 파견한 스페인인들이 친 스페인 성향의 포르투갈 귀족들을 등용해 통치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의회 코르테스(Cortes) 내에서도 포르투갈 귀족들은 점차 지위를 잃어버리고 찬밥신세가 되었다.

게다가 스페인은 스페인이 일으킨 전쟁 비용과 세금 부담을 포르투갈과 공유하고자 했고, 포르투갈 귀족들은 브라질, 남아시아에서 자신들의 식민지가 네덜란드에게 얻어 터지고 있는와중에도 적극적으로 지원을 해 주지 않는 스페인 중앙정부에 불만이 가득 쌓여갔다.니들은 우릴 제대로 도와주지 않았으면서

물론 스페인도 위그노 전쟁에 개입하면서 프랑스 앙리 4세와 전쟁을 치르고 있었고, 네덜란드 독립을 막는다고 저지대에서도 전쟁을 하고 있었다. 거기다 해양 패권을 두고 잉글랜드와 전쟁을 하고 있었으니, 인력과 물자를 쓸 곳은 많고, 포르투갈의 사정까지 볼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포르투갈의 독립[편집 | 원본 편집]

마침내 스페인의 포르투갈 통치기간이 60년째 되던 해인 1640년 12월, 브라간사 공작이 포르투갈 귀족들과 쿠데타를 일으켜 리스본 왕궁을 점령하고, 주앙 4세로 즉위하여 브라간사 왕조가 시작되었다.

주앙 4세는 포르투갈을 통치하던 만토바 공작 부인 마르게리타 디 사보아(Margaret of Savoy)를 추방하고,[1] 스페인에게 선전포고를 하였다. 1668년 까지 이어지는 지리한 포르투갈 독립전쟁의 시작이었다.

스페인군이 진압을 위해 파견되었지만, 당시 스페인은 30년전쟁 한복판에 뛰어들어 네덜란드 저지대와 플랑드르와 라인강 유역에서 프랑스, 스웨덴과 격전을 치루고 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카탈루냐에서도 반란이 일어나 포르투갈과 적극적으로 전쟁을 할 형편이 못되었다. 3면 전쟁

포르투갈은 영국의 올리버 크롬웰과 동맹을 맺고, 1664년 돈 후안의 스페인군을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냈다. 결국 1668년, 스페인은 포르투갈로부터 세우타를 할양받는 조건으로 포르투갈의 분리 독립을 인정했고, 동군연합은 해체되었다.

기타[편집 | 원본 편집]

여하간 브라질이 스페인령으로 남아있던 60년 동안, 브라질에도 상파울루 지역을 중심으로 스페인인들이 정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현재까지 스페인어를 모어로 쓰는 1000만 스페인계 브라질인의 선조가 되어 현재 스페인의 6억 시장경제의 기초가 되었다.

포르투갈 입장에서는 동군연합 기간 동안 토르데시야스 조약으로 나눠진 스페인-포르투갈의 경계도 희미하게 되어 브라질의 영역이 확대되고, 내륙 탐험의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동군연합의 후유증으로 대다수의 아시아 식민지를 빼앗겼고, 이후 포르투갈의 영국 의존도는 극도로 심해져서 포르투갈은 이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각주

  1. 사보이 공작 카를로 에마누엘레의 딸이자 사보이 공작의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