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역사

유럽의 국가 스페인의 역사를 서술한 문서.

스페인의 역사는 고대 지중해 문명부터 로마, 무슬림의 정복, 근세 스페인의 성립, 대항해시대와 식민 제국주의를 거쳐 나폴레옹의 정복과 내전, 독재를 거쳐 민주화, 라틴 아메리카의 옛 식민지와의 관계 재정립 시대로 요약 할 수 있다.

영광의 스페인 제국의 영욕부터 내전으로 밑바닥으로 굴러떨어지기 까지(...) 그리고, 민주화와 EU 가입으로 유럽의 일원이 되기까지 스페인의 역사는 매우 다채롭고, 현대 사회에도 적지않은 영향을 남겨 시사하는 바가 크다.

선사시대와 고대[편집 | 원본 편집]

언제부터 스페인인들의 문명은 어디부터 시작됐는가 여러 의견이 있지만 아마 가장 유명한 유적은 기원전 14,000년쯤 남긴 알타미라 동굴 벽화일 것이다. 이 벽화를 남긴 선주 크로마뇽인과 거석문화를 가져온 하플로그룹 G2a, 이후 들어온 켈트인들이 스페인인의 기원으로 보고 있다.

로마 제국[편집 | 원본 편집]

스페인은 고대에는 카르타고의 영향권에 있다가 BCE 200년경부터 50년까지 조금씩 로마 제국의 영향권에 놓인다. 로마 제국의 동서 분열 당시 스페인은 서로마 제국의 영향권에 놓인다. 스페인은 가장 마지막까지 서로마 제국의 영향권에 놓여 있던 지역 중 하나였다.

이슬람 지배와 레콩키스타[편집 | 원본 편집]

스페인은 700년경 우마이야 왕조의 침입으로 이슬람 세력이 장악하지만 1492년 그라나다 왕국의 멸망으로 레콩키스타가 완료된다.

우마이야 왕조의 아브드 알 라흐만 1세가 스스로 칼리프를 칭하여 후 우마이야 왕조가 개창 된 후 이 지역은 알 안달루스(Al-andalus)라 불리며 타이파라 불리는 여러 무슬림 영주들에 의해 분할 지배를 받았다.

처음에는 이슬람 세력에 압도되어 있던 기독교 세력이 이베리아 반도 북부에서 대두, 이른바 국토 재 정복 운동(레콩키스타)가 시작되었다. 그 중추가 된 국가가 포르투갈 왕국, 카스티야 왕국, 아라곤 왕국 등이었다.

1479년 카스티야 왕국과 아라곤 왕국의 합병에 의해 성립된 스페인 왕국1492년 마침내 그라나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국토를 수복했다.

이 해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항해로 아메리카 식민지화의 첫 발을 딛었고, 카스티야 왕국에서는 1502년, 아라곤 왕국에서는 1526년부로 이슬람을 믿는 것을 금지하고 이를 어길 시 추방시켰다.

근대[편집 | 원본 편집]

해가 지지 않는 나라[편집 | 원본 편집]

이베리아 연합[편집 | 원본 편집]

1580년, 스페인 왕국이 포르투갈 왕국을 흡수하는 형태로 성립된 동군연합. 1640년까지 지속되었다.

보르본 왕조 스페인[편집 | 원본 편집]

스페인 보르본 왕가는 왕위 계승전쟁 직후 나라를 수습하고 여러 개혁을 단행해 한 세기간의 평화를 가져왔다. 계승전쟁 이후 즉위한 펠리페 5세의 통치 덕분에 막장 상황은 어느 정도 정리되었고 18세기 초반부터 스페인은 중흥을 시작하였다. 그래서 18세기 보르본 왕조 시대를 스페인 계몽주의 시대(Ilustración en España)라 하기도 한다. 보르본 국왕들은 프랑스의 예를 본받아 행정을 강화하며 각종 개혁을 시행하였다. 또한 유럽과 신대륙의 무역을 장려하고 국내 발전에 힘써 100여 년 동안 스페인은 태평성대를 이루었고 카를로스 3세 시기에 루이지애나도 획득하는 등 중흥하였다. 카를로스 3세는 예수회를 추방하고 종교재판 규정을 완화했다. 또한 캘리포니아애리조나 등 북미 식민지 경영에 적극적이었으며 북미 여러곳에 스페인 탐험대가 파견되었다. 영토상으로 스페인 제국의 최대 영토를 달성하던 시기가 이즈음.

대외적으로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를 지지하여 폴란드 왕위 계승 전쟁과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에서 프랑스 편을 들어 참가했고, 7년 전쟁으로 프랑스령 루이지애나를 획득했다. [1]이후 루이지애나는 쿠바 도독령 산하 스페인령 루이지애나(Spanish Louisiiana)로 40년간 스페인 치하에 있다가 보나파르트 나폴레옹에 의해 1801년 다시 프랑스로 넘어갔다. 그러나 지리적 요인과 대륙에서의 전쟁격화로 실질적으로는 루이지애나에 파견된 스페인 관료들이 계속 이곳의 행정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국 나폴레옹이 루이지애나 판매로 이 지역을 미국에 넘겼을때 스페인, 프랑스, 미국 세 국가 대표는 세인트루이스에 같이모여 형식적으로 소유권을 차례대로 이양하는 퍼포먼스를 펼쳤다.

그러나 카를로스 4세의 무능과 재상 고도이의 권력장악으로 스페인이 혼란한 사이 나폴레옹 전쟁의 여파가 밀어닥치기 시작했다. 초기 프랑스와 스페인은 동맹관계 였으나 카를로스 국왕과 페르난도 왕자를 모두 추방하고 자신의 형 조제프 나폴레옹을 호세 1세로 즉위시키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사보야 왕조와 이를 뒤엎고 성립한 제1공화국은 엄청난 혼란상을 보여주어 결국 쿠데타로 보르본 왕정이 복고된다.

복고 후 왕위는 이사벨 2세의 장남 알폰소가 차지하여 알폰소 12세로 즉위하였고, 스페인에는 보르본 왕조가 복구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카를로스파의 돈 카를로스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제압되었고, 알폰소 12세는 1876년 7월, 기존 헌법보다 자유로운 새 헌법을 통과 시켰는데, 새 헌법은 의회와 국왕을 동등한 지위로 놓고, 국왕의 입법 및 의회 소집권, 상원 하원제, 표현과 결사의 자유를 보장하는 내용으로 스페인은 이때를 기점으로 확실한 입헌군주국이 되었다.

1885년, 알폰소 12세가 갑작스럽게 요절하자, 그의 유복자가 알폰소 13세로 즉위하였다. 알폰소 13세는 1902년, 친정을 시작했지만 스페인 정국은 보수당, 자유당의 잦은 내각교체로 시끌시끌했고, 1921년, 리프전쟁(Rif War) 초기 아누알 전투(Battle of Anuual)에서 진압군이 대패하여 정치적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애초 스페인 국민들은 제국의 재건을 위한 식민지 확장에 별 의지가 없었고, 미국-스페인 전쟁의 패배로 스페인이 식민지를 처분하자 스페인의 경제는 오히려 빠르게 성장했다. 이런 상황에서 강경파에 직접 힘을 실어준것은 알폰소 13세 본인이었기 때문에, 모로코에서의 전황 악화는 그의 정치적 생명에도 치명타가 되었다. 결국 1923년, 미겔 프리모 데 리베라가 일으킨 쿠데타가 일어났다. 그러나 리베라는 막후에서 알폰소 13세의 지지를 얻어 30년까지 독재정권을 유지했다.

세계대공황으로 인기를 잃은 리베라는 1930년 1월 실각하고, 알폰소 13세는 다시 입헌군주제로 복귀하기 위해 여러 수단을 강구했다. 그러나 1931년 총선에서 공화주의자들이 압승을 거두면서 다시 왕정이 쫓겨나고 스페인 제2공화국이 수립되었다.

프랑코 독재 정권[편집 | 원본 편집]

프랑코 정권시기 국기

1931년 군사 정권을 지지하던 왕가를 내쫓고 스페인 제2공화국이 성립되었다. 하지만 공화정 이행 뒤에도 국가적인 위기와 왕당파의 준동으로 인해 혼란을 거듭하다 1936년 선거에서 좌파와 중도 세력의 연합 전선인 인민전선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자 1936년 7월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있는 군부가 반란을 일으켰다.

현대[편집 | 원본 편집]

현대 스페인은 일찌감치 옛 식민지들이 독립한 만큼 아메리카의 스페인어 화자 문화권과 적극적인 교류를 시작하였으며, 같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하는 6억 시장을 확보하고, 폭넓은 교류를 하고 있다. 스페인어 만큼의 화자 수를 확보하지 못한 프랑스어권, 공용어 외에 외국어 만큼의 차이가 나는 수많은 방언이 존재하는 중국어군, 아랍어군에 비해 스페인어권은 단일 문화적, 경제적 시장을 형성하기에 여러모로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2] 또 대부분의 인도 유럽어가 그렇듯 로망스어군의 상호 교류성도 플러스 요소. 이러한 본토와 식민지간 수백년 교류는 Hispanidad라 부르는 공통된 지식재산을 형성하였으며 서구기준 경제적, 문화적 통로를 아메리카로 확대시키는 기여를 하였다.

  1. 이 당시 루이지애나라 함은 현재의 루이지애나주가 아니라 미시시피강 유역을 따라 형성된 미주리, 아칸소, 아이오와, 네브라스카, 사우스다코타, 노스다코타를 포함한 광범위한 지역이다.
  2. 실제로 스페인에서 유행한 신제품의 전파 경로나(본토에서 안 팔리면 아메리카로...)라틴 아메리카에서 히트친 가요의 전파 경로를 보면 그 영향력을 짐작케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