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공제

신공제.jpg

辛公濟. 호는 인산(仁山), 이광제(李光濟).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9년 3월 15일 평안북도 정주군에서 태어났다. 그는 1919년 3.1 운동에 참가한 뒤 상하이로 망명하였고, 천도교에 입교해 최동오, 남형우, 이춘숙(李春塾)·이민창(李民昌) 등과 함께 천도교 대표부에서 활동했다. 또한 이광수, 이영렬(李英烈) 등과 함께 독립신문사에 근무했고, 여제(金輿濟)와 함께 중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발행한 공채를 보급하는 데 힘썼다.

1923년 상하이에서 국민대표회의가 소집된 후 창조파와 개조파 간의 갈등이 극심해지자 이를 조정하려 애썼지만 실패했고, 이후 중국 국민당 요인 장소의(張紹儀)를 만나 조국 광복을 위한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한중합작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상하이와 난징 등지에 사는 청년들을 중국 각 학교와 군관학교에 입학시키고, 일제 밀정들을 숙청하면서 중국 학생회·혁명당과 긴밀한 연결을 취하고 항일구국운동을 전개했다.

1925년 난징에서 중국 국민당에 가입하고 1926년 국민혁명군의 북벌에 참가해 장제스 총사령관의 본부에 근무했으며, 1927년 김규식, 유자명 등과 함께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조직하고 한국대표 겸 상무위원으로 활동했다. 1928년 봉천군벌이 한국의 지사들을 일제의 밀정으로 단정하여 추방하려 하자 중국 국민당 중앙당부와 교섭하여 이를 중단하게 했고, 1929년 안창호 등이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자 한국독립당 난징지부를 설치하고 박찬익 등과 함께 주요 간부로 활약했다.

1930년 중국 국립중앙대학 정치과를 졸업한 신공제는 1931년 임시의정원 의원에 선출되었고, 1933년 1월 상해에서 이유필·김동우·안경근·박창세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대회(韓國獨立黨大會)를 개최하여 이사로 피선되어 활약하였다. 동년 6월에는 대일전선통일동맹을 조직하고 각 단체의 대일전쟁의 합작과 각 당의 통합을 추진하였다. 또한 1934년 김규식 등과 중국인을 설득, 한중연합군을 창설하고 공동항일전선을 폈다.

1935년 여름 난징에서 각 단체의 사상과 주의를 초월한 독립전선을 구성하려는 목적 하에 양기탁·유동열·지청천·현익철·최동오 등이 모여 민족혁명당(民族革命黨)을 조직키로 결정하게 되자 그는 중앙상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에 기관지로 월간 「민족혁명」과 주간 「우리 길」을 발행하여 민족사상고취에 앞장섰다. 1937년 2월에는 지청천, 현익철, 유동열, 양기탁, 최동오, 이복원 등과 협의해 김원봉 등의 적색분자를 청산하는 청당운동을 일으키고 민족혁명당을 한국민족혁명당으로 개칭했다. 이에 김원봉 등은 조선민족혁명당을 결성해 이에 맞섰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여러 단체들의 대표들과 합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곽 단체인 한국광복전선(韓國光復陣線)을 결성하였다. 또한 중일전쟁에 참전해 중국 국민당 중앙당부 총간사와 중앙전시독도단(中央戰時督導團) 단장을 역임했다. 1940년 임시정부의 외교위원에 임명되었으며, 1941년에는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 상무위원 겸 비서장을 역임하였다. 1942년 한중문화협회 이사로 선임되어 한중 친선에 기여하였다.

1945년 8월 조선혁명당 간부로서 중일전쟁을 계기로 이에 대처키 위하여 한국독립당, 한국국민당 간부들과 함께 신한민주당(新韓民主黨)을 결성하여 상무위원 겸 비서장이 되어 활동하였다. 8.15 광복 후 귀국하여 단국대학·청구대학 교수와 외무부 자문위원·한국독립당최고위원·독립동지회의 부회장을 역임하였다. 1969년 3월 13일 서울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신공제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고, 1969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