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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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敬根. 호는 석천(石泉). 이명은 안관오(安冠五), 박양한(朴陽恨), 이석천(李石川) 등.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6년 6월 10일 황해도 신천군 두라면 청계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안명근의 친아우이고 안중근, 안정근, 안공근의 사촌동생이며, 안봉생(安鳳生)과 안춘생(安椿生)의 숙부이다. 그는 1914년 김마리아[1]와 결혼했고 이듬해에 아들 안철생을 낳았다. 1918년에 아내를 신의주에 남겨두고 블라디보스토크로 망명해 박은식, 안정근, 신채호 등과 함께 독립운동에 종사했다.

일제 정보기록에 따르면, 1920년 봄 일본군 측은 안경근과 교섭을 시도했지만 안경근이 "이해관계 여하에 관계없이 당신들의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단호히 거부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1921년 봄 무렵에 상하이로 이주했고, 1922년 4월에 운남강무학교에 입교해 그곳에서 수학하여 이준식, 문일민 등과 함께 졸업한 뒤 1924년 12월에 상하이로 돌아왔다.

이후 만주로 간 그는 정의부 군사부 위원이 되어 사령장 김창환(金昌煥)의 참모로 활동했고, 1929년에는 정의부, 참의부, 신민부의 3부 통합 운동에 참여했지만 실패하자 다시 상하이로 돌아왔다. 그는 흥사단에 가담했고, 1932년 4월 29일 훙커우 공원 의거 후 5월 21일자 중국신문 <시사신보>에 안창호를 비방, 폄하하는 기사가 실린 경위를 조사한 결과 조소앙 등이 연관되어 있음을 밝혀낸 뒤 그해 6월 3일에 박창세, 김동우 등과 함께 "외인과 외신을 이용해 적의 포로가 된 혁명 영수를 음해하며, 동지를 능욕하며, 당을 훼멸하며, 민족을 말살시키는 매국 행위"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중국 국민정부는 훙커우 공원 의거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강화했으며,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 내에 한인특별반을 설립했다. 김구지청천, 오광선, 조경한 등 재만 한국독립군 간부들을 한인특별반 교관으로 초빙하고, 한국독립군 대원을 한인애국단이 모집한 청년들과 함께 훈련시키고자 했다. 그러나 운영 과정에서 김구와 지청천 간의 불화가 심각해지면서, 1934년 8월 김구 측 입교생들이 한인특별반을 퇴교하고 중국인 학생 대대에 분산배치되었다가 이듬해 4월에 졸업했다.

이 시기 안경근은 김구의 비서로 활동했다. 일제 정보기록에 따르면, 그는 "시종 함께 다니면서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고 한다. 그는 김구와 장제스 사이를 오가며 연락 책임을 맡아 한, 중간의 친선을 도모하는 데 힘을 보탰고, 한일특별반 운영에 힘을 보탰으며, 1934년 12월 중순 난징 한국특무대독립군 본부에서 김원봉 의열단장 등 외빈과 안공근 이하 김구계열 인물들과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한인 입교생 등 3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김구 혁명 40주년 기념축하회>를 주관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개회 인사를 발표했다.

오늘은 김구 선생이 혁명전선에 나서신 이후 만 40주년에 해당되는 날이다. 본래라면 아주 성대하게 이 기념식을 거행해야 하지만, 주변 정세가 허락치 않아 여기에 형식적으로나마 기념축하회를 거행하는 바이다.

또한 1935년 3월 1일에 거행된 한국특무대독립군 대원들의 3.1운동 기념식에서는 폐회사를 했으며, 대원들의 불평과 요구사항을 청취하고 이들을 위무, 통제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1935년 8월 26일경, 황국주(黃國柱)라는 인물이 자신에게 부과된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않으면서 김구의 민족운동 노선을 비방하고 있다는 말을 들은 그는 황국주를 만나 다독거리고 향후 활동방향과 요령 등을 지시했다. 이듬해 3월 말 황국주가 난징에 찾아와 안경근에게 일제 밀정의 추적을 받고 있다며 신병보호를 요청하자, 안경근은 기꺼이 보호해줬다. 그는 이와 함께 대원들의 취직도 알선해줬다.

그러나 1935년 9월 일제가 중국 정부를 압박하는 바람에 한인 학생들의 중국군관학교 입교가 어렵게 되자, 그는 일부 학생들의 귀향을 주선하면서 귀향 후 임무사항 등을 지시했다. <조선중앙일보> 1935년 7월 13일자 기사에 따르면, 한인특별반 입교생 출신 황세청은 안경근으로부터 조선에 돌아가 동지를 확보하고 오라는 명령을 받고 평양에 잠입해 숭실중학교, 광성고등보통학교 생도들 사이에서 활동하여 3명의 동지를 얻고 난징을 향해 가려다가 평양헌병대에게 체포되었다고 한다. 1935년 10월 27일, 안경근은 한국특무대독립군에 소속된 한인 학생들의 중국군관학교 입교를 촉구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조선의 대중이 일본 제국주의 밑에 병탄되고 자본가들의 착취에 고생하고 있는 현상을 생각할 때, 대학에 들어가는 것만 생각하는 그 자체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제국주의 일본의 자본가들의 착취에 신음하고 있는 조선인 대중을 구출하기 위하여 여러분은 먼저 그 투사로서 수련을 쌓기 위하여 지금부터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중략) 제1차 세계대전 당시의 독일과 같이, 포위전에 의하여 (일본이) 반드시 패할 것이니, 우리들은 그 기회에 숙원인 독립을 결행하도록 지금부터 그것에 대비하는 군인을 양성해 두는 것이다. 이들 군인으로서 너희들을 중국군관학교에 입교시키는 것이니, 너희들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 패전하는 허를 찔러 조선의 독립을 감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국특무대독립군의 항일특무활동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안공근이었고, 안공근이 부재할 때는 안경근이 대신했다. 그러다가 1937년 제2차 상하이 사변이 벌어졌을 때, 안공근이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과 자신의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켰지만 안중근의 부인 김아려 여사를 데려오지 못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이에 김구는 안공근을 호되게 질책했다.

양반의 집에 화재가 나면 사당의 신주부터 껴안고 나오거늘, 혁명가가 피난을 하면서 나라를 위해 살신성인한 의사의 부인을 왜구의 점령구에 버리고 오는 것은 군의 도덕에는 물론 혁명가의 도덕으로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이후 김구는 안공근과 갈라섰고 안경근이 안공근을 대신해 한국특무대독립군을 이끌었다. 안경근은 대원들을 일본군 작전지대에 잠입시켜 일본군 및 일본경찰의 동향, 일본인의 상황들을 조사하고 정보를 수집했으며, 중국 국민당계 주요 계파인 CC단과 연계하여 일본군의 후방 공작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한인 아나키스트들과 연계하여 밀정을 처단하고 일본 고위급 장교를 저격하기도 했다.

1936년 11월 10일, 안경근은 제29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황해도 의원에 선임되었다. 이후 1937년 7월 16일 국무회의에서 군사위원회 상무위원에 선임되었다. 하지만 그는 임시의정원 의원 및 군사위원으로서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대신 <신한평론> 1943년 신년호에 "몇가지 시급히 할 일"이란 제목의 논설을 게재해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는 이 글에서 먼저 민주국가의 최후승리가 점점 접근해오고 있다고 밝히면서 이를 조속히 이루려면 우리가 할 바를 시급히 추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리고는 시급하게 추진해야 할 당면과제로는 독립운동 역량의 극대화, 거대한 규모의 운동자금의 신속한 확보, 조속한 임정 승인 획득, 임정의 권위 아래로 전 민족 집결 등을 제시했다. 또한 그는 지금 임정이 애써 구하려 하는 "세계적 동정"이라는 것이 갖는 한계를 직시하고 한정된 시간이나마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고 전제한 후, 당면 과제를 이룰 방안으로 다음 4가지를 제시했다.

1. 삼천만 대중이 모두 임시정부를 그들 자신의 정부로 인식토록 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각적으로 임시정부의 기치 하로 집중하여 지지하도록 만드는 일이 곧 독립운동의 역량을 극대화하는 길이다.


2. 자금의 결핍으로 전 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지 못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선느 충분한 독립운동 자금을 신속하게 확보해야 한다.

3. 외교 활동의 목표는 완전한 독립자주를 쟁취하는 데 설정해야 하며, 다액의 금액을 써서라도 외교원, 통신원, 선전원, 특파원, 연락원 등의 인원을 파견해 임정 승인 획독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

4. 국내외에 거주하는 한민족 사회를 상대로 선전, 단결활동을 전개하여 이들을 임정의 지지기반으로 확보해야 한다.

그가 작성한 글이 게재된 <신한평론>은 한국독립당에 의해 발행되어 임시정부의 직속 군대인 한국광복군에 배포되었다. 그는 이외에도 몇 편의 글을 게재한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까지 남아있는 글은 "몇가지 시급히 할 일" 외에는 없다.

1946년 5월에 한국으로 귀환한 안경근은 김구가 머무는 경무장에 기거하다시피 했다. 그러던 어느날, 신문지상에서 안경근의 소식을 알게 된 아들 안철생 내외가 경교장으로 찾아왔다. 안경근은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안철생을 알아보지 못하고 "네가 누구냐?"라고 물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아들임을 확인한 그는 눈물을 펑펑 흘리며 탄식했다.

네가 세 살 때 놓고 갔는데, 이렇게 컸구나!

그의 부인이었던 김마리아는 국내에 남아 힘겹게 지냈다가 개가했다고 하며, 아들 안철생은 생모가 개가한 뒤 할머니 유로사의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고 이후 서울 동성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원산근교의 덕원신학교에 진학하여 신부가 되고자 했지만 일제의 훼방으로 그러지 못하고 단지 신실한 신자로서 성당에 다녔다고 한다.

안경근은 귀국 후 김구의 그림자 노릇을 했을 뿐 공식적인 활동은 별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1948년 3월 27일 김구가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연석회의 참가를 결정하자, 안경근은 권태양과 함께 김구, 김규식의 특사로 선임되어 북한에 직접 가서 김구와 김규식의 의사를 전달하고 남북연석회의에 대한 북한 당국자의 진의를 파악하는 임무를 맡았다. 선우진의 회고에 따르면, 안경근은 이 큰 임무를 맡게 되자 화들짝 놀라며 "저는 정치를 모릅니다."라고 거절했지만, 김구가 엄하게 권하자 결국 받아들였다고 한다.

김구가 굳이 안경근을 선택한 것은 당시 북한 정권에 참여해 국방장관을 맡고 있던 최용건이 안경근과 운남강무학교 1년 선후배 사이였고 2년간 같은 기숙사에서 생활한 인연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경근은 권태양과 함께 남산에 있는 소련대표부를 방문해 자신들의 방북 사실을 알려 승낙을 얻어냈다. 그 후 두 사람은 4월 7일 서울을 출발해 오후 2시 30분 개성을 통과하여 38선 접경에 있는 미륵동에 도착했다. 이후 북한에 진입한 두 사람은 3월 8일 오후 2시 30분에 평양에 도착했다.

3월 8일 저녁 7시 30분, 북조선인민위원회 별관에서 김일성, 김두봉과 만난 안경근과 권태양은 1시간 동안 남북협상 절차에 대해 회담했다. 두 사람은 김구, 김규식의 안부를 전하고 4월 15일 개회일을 연기해줄 것과 참가인원을 확대해 줄 것, 의제는 남북통일 문제에 국한하자는 제안을 전달했다. 김일성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김구, 김규식 선생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통일 정부를 수립하고자 남북 지도자들의 정치회의를 소집하기 위한 노력과 투쟁을 적극 지지한다. 특히 2월 10일에 있었던 김구 선생의 강렬하고 애국에 넘치는 성명에 감동하였다. 그분들이 연석회의에 꼭 참가해 주셔야 성공할 수 있다.

김두봉은 다음과 같이 회답했다.

우리가 통일을 위해 만나 이야기하는데 아무런 조건도 있을 수 없습니다. (중략) 두 분 선생께서 무조건 이곳으로 오셔서 우리와 상의하시면 모든 문제는 해결됩니다.

그 후 안경근과 권태양은 3월 10일 오후 9시에 서울로 돌아와 김구, 김규식에게 회담 결과를 보고했다. 김구는 이들의 보고를 받고 북한으로 가기로 결심했다. 4월 19일 회의 개막일 아침, 김구는 북행을 만류하는 시민들에게 다음과 같이 호소했다.

나에게 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달라. 이대로 가면 한국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다. (중략) 나는 이 길이 어떻게 될 지 몰라도 이북의 우리 동폴를 뜨겁게 만나봐야 한다.

김구는 그렇게 김규식과 비서 선우진, 아들 김신 등과 함께 평양으로 가서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들은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남북분단은 현실이 되고 말았다.

1950년 6.25 전쟁이 발발하자, 안경근은 가족과 함께 서울에 남아 숨어지냈다. 이후 1.4 후퇴 때 가족을 데리고 안양, 인천을 거쳐 대구로 내려갔고, 이후로 23년간 대구 대봉동에서 살았다. 1950년대 후반 반독재, 민주화 움직임과 평화통일 논의가 대두하자, 그는 지인들과 친목회를 결성해 시대흐름에 부응하고자 했고, 4.19 혁명이 발발하자 1960년 4월 말 대구 시청 회의실에서 민주전국동지회를 결성했다. 이 단체엔 혁신정당 활동에 활발하게 참여하지 않은 독립운동가 및 애국선열, 지사 및 유지 60여 명이 참여했다.

1960년 11월 26일, 안경근은 민주전국동지회를 경상북도민족통일연맹으로 확대 개편했다. 연맹 위원장엔 안경근이 선임되었고, 조카 안민생이 핵심 인물로 참여했다. 경상북도민족통일연맹의 회원 수는 최대 1만 명에 이르렀고, 대구, 안동, 예천, 영천, 문경, 고령, 청도 등지에 지부가 형성되었다. 안경근은 통일문제시국대강연회를 대구 종로국민학교 교정에서 개최해 3천여 명의 군중이 모인 가운데 "남북통일을 싫어할 어떠한 이유도 배제되어야 한다. 오스트리아식 통일 등을 수용하여 통일에의 자세를 굳게 하자." 등의 연설을 발표했다. 그리고는 군중을 대상으로 여론 조사를 벌여 '중립화통일안'과 '남북총선거안'을 통일 방안으로 체택했다.

또한 11월 26일 대구 청년대학 강당에서 민족통일경상북도연맹 상임위원회 회의를 개최해 통일 전이라고 북모처자의 소식조차 모르는 일이 없도록, 남북 간의 자유와 삶을 위한 경제적 교류, 정치적 목적 외의 인사 왕래 및 문화교류를 신속히 실현해야 한다는 내용의 선언물을 의결했다. 그리고 1961년 3월 1일에는 대구 달성공원에서 3만여 명이 모인 가운데 <3.1 민족통일촉진궐기대회>를 개최했다. 그는 이 대회에서 다음과 같이 강연했다.

미, 소가 문화교류를 하는데 어찌 우리가 못한단 말이냐. 남한의 면포와 북한와 비료, 전기를 교역하고, 통일을 윟나 실정을 알기 위해 인사교류, 서신왕래, 기자교류를 하자. 1962년의 3.1절 행사는 통일된 민족의 광장에서 하자. 일체의 외부세력을 배격하며 선건설후통일론을 배격한다.

또한 이 대회에서는 다음과 같은 결의문이 체택되었다.

우리는 통일 보류 또는 선 건설 후 통일론으로 국민을 현혹케 하여 통일을 방해하는 일체의 세력을 철저히 분쇄한다. 우리는 UN총회에 진정한 민족의 의사를 대표할 수 있는 민족통일경북연맹 대표를 사절단으로 참가케 하여, 국민 전체의 의사를 반영시킬 것을 주장한다. 완충지대에 우편국을 설치하여, 남북간의 서신 왕래를 실시한다. 남북간의 경제교류를 촉진케 한다. 완충지대에 민족융화의 기구를 설치하여 때때로 남북동포가 서로 만나 민족혼과 민족정기가 얽히도록 하자. 신문기자 및 민간사찰단을 파견하여 이북동포를 위무하고, 실정을 상호 토로케 하자. 금후 국제적인 모든 경기대회에는 남북 간의 혼성 선수단을 파견케 하자.

그러나 안경근의 이같은 통일운동은 5.16 군사정변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그는 정변 직후 체포되었고, 1961년 12월 27일 민족자주통일경북협의회사건 구형공판에서 '특수반국가행위' 혐의로 징역 10년을 구형받았다. 그리고 1962년 1월 9일에 열린 혁명재판 제4 심판부 주관의 경북민주통일연맹 간부 6명에 대한 '반국가 행위사건' 판결 공판에서, 그는 7년형을 최종 선고받았다. 그가 반역행위를 저질렀다는 혁명검찰부의 논지는 다음과 같았다.

북한괴뢰집단이 소위 위장된 평화통일론을 표방하고, 4.19 이후 대한민국에 있어서의 정치적 혼란기를 이용하여 남북협상에 의한 평화통일, 남북한의 인사 및 경제교류, 정부시책의 비방, 민심 교란 등 방법으로 간첩 침략을 획책하고 있음은 공지의 사실이라 할 것인 바, 피고인의 판시 행위는 반국가단체인 북한괴뢰집단의 활동을 고무, 동조하는 행위로 보아 무방할 것이고, 피고인이 앞에서 서술한 사실의 인삭하에 동 단체의 활동을 고무, 동조하는 행위를 한 피고인은 그 범행 시에 있어서 동 단체의 이익이 된다는 점을 알았다고 인정함이 조리상 타당하다.

1962년 4월 17일 형량이 확정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된 안경근은 1963년 12월 14일 일반사면령에 의해 석방되었다. 그의 조카 안민생은 1999년 9월 10일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탄식했다.

해방, 독립된 내 조국에 돌아와서 또 감옥살이를 치러야 함으로써, 우리 안씨 가문은 이역과 조국에서 선후대에 걸쳐 50여 년이라는 세월을 감옥에서 지내야 했다.

안경근은 출옥 후 대구에서 조용히 지내다가 1971년 4월 8일 천관우, 이병린, 김재준, 조향록 등 재야 인사들과 함께 <민주수호 선언>을 발표했지만, 선언식 현장에 참석하지 않았다. 그는 1970년대 중반 서울로 상경해 서울 서대문구 남가좌동에서 살았고 일체의 정치 활동을 중단하고 은둔 생활을 보냈다. 그는 자신을 찾아오는 이들을 다 돌려보내고 술로 세월을 보냈다. 가족이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해보자고 건의하자, 그는 "내가 무엇을 했다고 보상을 받느냐. 만약 통일이 된다면 받겠다."며 한사코 거부했다. 그러다가 주위의 간곡한 권유에 못이겨 1977년에야 독립유공자 포상 신청을 해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1978년 6월 서울에서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로 이사한 그는 6개월이 지난 1978년 12월 9일에 숨을 거뒀다. 그의 유해는 장흥면 일영리 구만동 선영에 안장되었다.

각주

  1. 독립운동가 김마리아와 동명이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