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Namuwikifuxkyou (토론 | 기여)님의 2019년 9월 9일 (월) 23:46 판

로마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ων Ῥωμαίων)은 이탈리아 반도에서 출발하여 지중해패권을 장악했던 국가이다.

역사

제정 수립 이전

왕정 시대

자세한 것은 로마 왕국 문서 참고

공화정 시대

자세한 것은 로마 공화국 문서 참고

공화정에서 제정으로

지중해의 패권국으로 자리잡은 로마는 시민과 원로원계급의 심각한 내분을 겪게 되고 민중파의 일원인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전쟁을 승리하여 갈리아를 복속시켜 시민들의 지지를 얻게 된다.

이를 견제하고자 한 원로원은 카이사르를 반역자로 규정하였고, 이에 반발한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도하하여 카이사르의 내전을 발발시킨다. 카이사르는 내전에서는 승리하였으나 공화파에 의해 곧 암살당한다. 그러나 뒤이어 벌어진 내전에서 승리한 아우구스투스가 초대 황제가 되어 실현한 원수정 체제 아래에서 팍스 로마나를 일구었다.

군인 황제 시대

그러나 원수정 체제에 모순은 정세의 불안정을 낳았고, 3세기에 접어들어 세베루스 왕조의 알렉산데르 황제가 암살당한 뒤 군인이 추대하는 군인 황제들이 등장하여 정세의 불안정은 더 심해진다. 그 시기에 게르만족, 사산조 페르시아와의 침략이 심해지고 국방 경비가 약화되면서 경제도 흔들리는 등 제국은 3세기의 위기를 겪는다.

제국의 분열, 서로마의 멸망

후에 등장한 디오클레티아누스는 국정 개편을 통하여 제국의 생명을 어느 정도 생명을 연장시켰다. 그러나 원수정 체제에 내제한 모순은 디오클레티아누스의 은퇴 후 다시 내전을 벌어지게 하였으며, 이 내전에서 승리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제국을 하나로 통합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이룩했던 행정 개편을 더 확고히 하였고, 군제를 개혁하였으며,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천도하고 기독교를 공인하는 등 사회 체계도 개조하였다. 이 황제들의 개혁을 통해 나라의 정세가 3세기에 비해 안정되었으나, 제국은 하나의 황제가 다스리기에는 국경선의 길이가 지나치게 길었고, 이에 정제, 부제가 동방, 서방을 통치하는 방식으로 안보의 향상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이를 이어받은 테오도시우스 1세의 치세가 끝나고 그의 두 아들인 호노리우스아르카디우스가 각각 제국 서방과 동방을 맡게 되면서 제국은 두 개로 분리되었다.

공식적으로 제국 서부와 동부는 하나의 로마 제국이었기 때문에 동부 황제와 서부 황제 중 선임 황제인 쪽이 상대방에게 간섭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발렌티니아누스 왕조가 절멸하고 각각 다른 혈통의 황제가 즉위하면서 따로 노는 일이 잦아졌고, 제국 동부가 제국 서부를 버린 꼴이 되었다.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의 침략이 심했고 또한 경제력 역시 로마에 비해 떨어졌다. 서로마는 60년간 스틸리코아에티우스 등 유능한 사령관들의 활약 덕분에 버텼으나 그 이후는 이름뿐인 유명무실한 황제가 차례차례로 등극하면서 몰락해갔고, 476년 게르만족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게 된다.

중세 로마(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 A.D. 330~1453

비잔티움 제국 = 동로마 제국 = 중세 로마 제국

사실상 다 같은 말이다. 다만 서유럽 역사가들이 중세 로마를 이전이라 비교하려고 만든 말이지만 사실상 당시에는 동로마 제국이 로마 제국이었다. 공식 명칭또한 'Imperium Romanum'.

동로마 제국은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시기의 고토회복전쟁을 통해 과거 이탈리아와 북아프리카의 영토를 잠시 되찾았으나 전염병이 돌고 재정난이 심해지면서 얼마 가지 못했다. 그 후 이슬람 세력이 떠오르면서 한때 위축되기도 하였으나, 9세기부터 11세기까지 마케도니아 왕조, 콤니노스 왕조가 부흥을 이루었다. 그러나 제4차 십자군 전쟁의 여파로 일시기 문을 닫게 된다.

1261년 십자군 국가인 라틴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여 제위를 회복하나, 풍파를 겪은 제국은 더 이상 과거의 제국이 아니었다. 제국은 소아시아의 영토를 잃어버렸고 그 땅에서 일어난 투르크인들의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차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4세기에는 오스만의 속국이나 다를 바 없는 신세로 전락했으며 1453년 수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마지막 황제인 콘스탄티노스 11세가 전사하면서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후 모레아와 트레비존드의 최후의 잔존 세력이 남아 저항했으나 모두 오스만 제국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제국은 당대에는 로마 제국 그 자체로 여겨졌으나, 근대에 들어 서구권 역사가들에 의해 비잔티움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로마 제국과 분리된 역사로 여겨져왔다.

문화

미술

로마의 미술은 그리스의 헬레니즘 미술과 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로마인들은 헬레니즘 미술품을 적극적으로 사들였으며 헬레니즘 문화권에 로마 제정기를 포함시키는 경우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1] 하지만 로마인들은 단순히 그리스 미술을 수용하지 않았으며, 자신들의 필요에 맞게 응용하고 취향에 따라 변화시켰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그 유명한 콜로세움우리가 인터넷에서 세우는 콜로세움이 아니다으로, 로마의 실용적인 구조와 그리스의 미적 양식이 잘 결합되어 있다고 평가받는다. 또한 콜로세움을 보면 여러 아치가 결합된 형태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는 종전의 그리스 미술에선 확인할 수 없는 로마 건축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으로 로마인들은 이 기술을 이용하여 거대한 돔 형태의 천장을 만들기도 하였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판테온으로 기원전 25년 로마의 모든 신에게 예배하기 위해 만든 건축물이며[2] 현대까지 남아있는 유일한 고대 신전이기도 하다. 이는 이 신전이 나중에 교회로 개조되었기 때문.[3]

평가

기원전 753년이라는 건국 연도를 일단 곧이곧대로 믿는다면, 이 제국은 약 2200년간 이어져왔다. 사실, 굳이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다고 해도 가장 보편화된 위대하고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던 대제국이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신성 로마 제국은 중세 서유럽에서 종교적 이유로 로마 황제위를 되살린 것이다. 일종의 설정놀음으로, 사실 로마 제국의 진정한 의의를 계승했던 것은 동로마 제국이 더 가깝다.

로마의 계승을 주장한 국가들

근대 이전까지 유럽에서 '제국'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로마 제국 제위와의 연관성이 있어야 했다. 그래서 여러 나라에서 자신들이 로마 제국의 황위를 이었다고 주장했다.

신성 로마 제국은 교황이 부활시킨 서로마 황제 제위이다. 막말로 교황이 '정통 로마'인 동로마 제국에게 꿀리니까 황제를 하나 만든 것에 가깝다.

러시아 제국은 로마 제국, 정확히는 동로마 제국을 계승했다고 주장했다. 비잔티움 황제 콘스탄티노스 11세의 여조카라 러시아의 황제가 결혼을 해, 러시아 황제는 동로마 제국의 황위를 계승했다고 선언했다. 심지어는 로마, 제2로마 콘스탄티노플을 이어 제3로마가 바로 모스크바라고 선언까지 했다. 또한 러시아 제국의 문양을 동로마 제국의 쌍두독수리로 교체하였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정교회권의 최강대국으로서 역할한 역사도 있다. 그래서 모 러시아 학자는 로마 제국은 기원전 753년부터 러시아 제국이 망한 1917년까지로 잡는다. 그럼 2670년이 된다.

오스만 제국 역시 비슷한 주장을 했는데, '로마 노바', 즉 '새로운 로마'인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국가가 자신들이니 자신들이 로마 황통을 이었다는 것이다.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메흐메트 2세는 자신을 '카이세리 룸', 즉 '로마의 황제'라고 자칭했다. 이 호칭은 뒤를 이은 바예지드 2세까지 이어지다가 나중에 술탄 직위에 병합되었다. 오스만 제국에서 살아가던 정교회 신자들은 '룸', 즉 '로마인'이라고 불렸는데 근대에 민족주의가 발흥하고 오스만이 빌빌대기 시작하면서 저마다 독립국을 이루었다.

각주

  1. 네이버 지식백과, 헬레니즘의 시대범위 (두산백과)
  2. 이탈리아에서 보물찾기, 곰돌이 co., 강경호, 아이세움 ISBN 9788937848278
  3. 이 문단의 전반적인 내용은 서양미술사(E.H.곰브리치, 예경, ISBN 8970840656)의 내용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