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 앙투아네트 베퀴 뒤 바리 백작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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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앙투아네트 베퀴 뒤 바리 백작부인
Jeanne Antoinette Bécu comtesse du Barry
Madame Dubarry1.jpg
1781년작 초상화
인물 정보
본명 잔 앙투아네트 베퀴
다른이름 뒤바리 부인
출생 1743년 08월 19일
프랑스 왕국 보쿨레
사망 1793년 12월 08일 (49세)
프랑스 왕국 파리
국적 프랑스
종교 로마 가톨릭
배우자 기욤 뒤 바리
가족 아버지: 장 밥티스트 고르만드 드 보버니에 (추정)
어머니: 안나 베퀴 드 캉티니

잔 앙투아네트 베퀴 뒤 바리 백작부인 (Jeanne Antoinette Bécu comtesse du Barry)는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국왕 루이 15세로얄 미스트리스(프랑스어: maîtresse-en-titre 메트레상티트르)로 퐁파두르 부인과 함께 루이 15세의 대표적인 정부(情婦)이자 대중에서는 마담 뒤 바리, 뒤바리 부인(Madame du Barry)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퐁파두르 부인과 더불어 루이 15세와 사이에서 자식을 본 적은 없다.

흔히 알려져있는 뒤바리 부인은 틀린 표기로 뒤는 드에 해당되는 단어이다. 즉 준말을 올바르게 표기하면 바리 부인 내지는 바리 백작부인이 옳다.

상세[편집 | 원본 편집]

만화 《베르사유의 장미》및 마리 앙투아네트를 동정적으로 그린 창작물에서는 후술할 자존심 싸움 문제때문에 악역으로 나오며 악랄하거나 방탕한 요부로 보일테지만 사실 세간의 편견과 달리 순박하고 순한 성품을 가진 처녀였다. 초상화들도 방탕과 퇴폐는 커녕 순박하거나 청초한 이미지고 루이 15세의 정부가 된 후에도 정적을 만들지 않았기에 숙청에서 피할 수 있었으며 그녀를 싫어했던 사람들도 대화를 나누어보니 사람이 달라 마음을 여는 등 기본적으로 선량했었다. 다만 신분 때문에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사치가 심했던건 그녀가 보석을 좋아했던 것도 있거니와 자선 사업에도 신경을 썼기 때문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루이 15세의 정부(情婦)가 되기 전[편집 | 원본 편집]

바리 부인은 부유한 평민인 퐁파두르 부인과 다르게 하층민 출신이다. 아버지는 불명이나 당시 수도자인 장 밥티스트 고르만드 드 보버니에가 그녀의 친부로 추정되고[1], 어머니는 재단사(내지는 요리사)이다. 찢어지는 가난으로 인해 파리로 이사를 갔고, 바리도 15세가 되면서 여러 가지 직업을 거쳤다. 그녀의 운명이 바뀐 건 바리 백작과 만난 것으로, 바리 백작은 포주로 악명(?)이 높아 애인과 정부에게 매춘을 시켰는데, 바리 부인도 바리 백작에게 후원받으면서 코르티잔이 되었다. 그 뒤 바리 부인이 사교계 파티에서 루이 15세와 염분을 쌓자 바리 백작은 본격적으로 그녀를 루이 15세의 여자로 만들기로 결정. 왕의 정부는 일단 유부녀라야 했고, 바리 부인은 귀족이 아니였기에, 그녀를 자신의 남동생인 기욤 뒤 바리 백작과 결혼시켜 백작부인으로 만든 뒤 베르사유 궁에 보냈다. 루이 15세는 뒤바리 부인을 정부로 삼기로 결정. 뒤바리 부인도 남편인 기욤 뒤 바리 백작과 이혼해 메트레상티트르 칭호를 받았다.

왕의 정부로서[편집 | 원본 편집]

정부였지만 루이 15세의 왕비인 마리 레슈친스카[2]가 사망했기에 뒤바리 부인은 사실상의 왕비 위치에 있었다. 정치나 외교에 관심이 없었기에 퐁파두르와 달리 정치적인 행사는 안 했지만, 매춘부 출신이라는 이유로 루이 15세의 딸들에게 반감을 샀다. 이는 루이 15세의 손자며느리 마리 앙투아네트(당시엔 황태손비)도 마찬가지였다. 앙투아네트는 친정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로부터 엄격한 성윤리 교육을 받았기에 매춘부가 왕의 정부라는 것도 불쾌했고, 시고모들로부터 뒤바리 부인에 대한 뒷담을 들으며 뒤바리 부인을 완전히 혐오하게 되었다. 그래서 앙투아네트는 절대로 뒤바리 부인에게 말을 걸지 않았다.

결국 뒤바리 부인은 루이 15세에게 “앙투아네트가 나를 무시한다”며 떼를 썼고, 루이 15세는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편지를 보내 질타했다. 정부나 애첩을 개인적으로 싫어했으나 당시 사회상 막을 수 없었던 마리아 테레지아는, 딸의 시할아버지의 항의에 굴복하고 만다. 친정어머니로부터 ‘예의를 지키라’는 호통을 들은 마리 앙투아네트는, 결국 공식 석상에서 뒤바리 부인에게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는 여전히 뒤바리 부인을 싫어했고, 자존심 싸움에서도 패배했기에, 뒤바리 부인의 선물이나 호의를 끝까지 받아들이지 않았다.

말년과 최후[편집 | 원본 편집]

은퇴한 뒤바리 부인

루이 15세 사후 뒤바리 부인은 다른 왕의 정부들이 그러했듯 베르사유 궁을 나갔고, 루이 16세의 명에 의해 바스티유 수도원에 있다가 루브시엔 성에 머무르게 되었다. 그녀는 남은 재산을 가지고 여러 남자들과 연애하며 여유롭게 보냈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당시 그녀는 영국 런던에 있었기에 화를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보석 문제로 자신의 저택에 가보기 위해 프랑스 파리를 방문했다가 극단적인 공화주의자에게 잡혔고, 결국 단두대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대중문화 속의 바리 부인[편집 | 원본 편집]

관련 문서[편집 | 원본 편집]

외부 참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참고로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는 독신으로 정결을 지켜야 한다.
  2. 폴란드 공주 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