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
Marie Antoinette d'Autriche
Vigée-Lebrun Marie Antoinette 1783.jpg
1783년작 초상화
인물 정보
본명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잔 도트리슈로렌
(Marie Antoinette Josèphe Jeanne d'Autriche-Lorraine)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폰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
(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von Österreich-Lothringen)
출생 1755년 11월 02일
오스트리아 대공국 빈 호프부르크 왕궁
사망 1793년 10월 16일 (38세)
프랑스 왕국 콩코르드 광장
국적 오스트리아
프랑스
직업 오스트리아공주프랑스의 왕세자비 → 프랑스왕비
종교 가톨릭
신체 154cm
배우자 루이 16세
가족 형제자매: 요제프 2세, 레오폴트 2세, 마리아 카톨리나
아버지: 프란츠 1세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딸: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
아들: 루이 17세

마리 앙투아네트 도트리슈(Marie Antoinette d'Autriche, 1755년 11월 2일~1793년 10월 16일)는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 루이 16세왕비이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란츠 1세와 황후 및 오스트리아 여대공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이다. 결혼 전 이름은 마리아 안토니아 요제파 요한나 폰외스터라이히로트링겐(Maria Antonia Josepha Johanna von Österreich-Lothringen)이었으나, 결혼 후 마리 앙투아네트 조제프 잔 도트리슈로렌(Marie Antoinette Josèphe Jeanne d'Autriche-Lorraine)으로 바꾸었다.

이 없으면 케이크(내지는 과자)를 먹어라”라는 희대의 망언을 한 왕비로 유명하지만, 후술하듯 그녀를 폄훼하기 위한 악성 루머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망언을 한 적이 없었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유년기[편집 | 원본 편집]

마리 앙투아네트(마리아 안토니아)는 1755년 11월 02일 오스트리아의 호프부르크 궁전에서 프란츠 1세와 마리아 테레지아의 11녀로 태어났다. 어릴 때의 마리 앙투아네트는 지능에는 문제가 없었지만, 집중력이 낮고 산만한 아이로 공부에 큰 흥미를 못느껴서 학습부진을 일으켰는데, 후일 시집가게 될 국가 프랑스어를 유독 못해서 어려움을 겪었다. 자매들 중 바로 윗 언니인 마리아 카롤리나와는 사이가 좋았고, 마리아 크리스티나는 어머니의 편애를 받았기에 싫어했었다.

프랑스 왕태자비[편집 | 원본 편집]

프로이센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동맹을 맺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는, 동맹을 강화시키기 위한 일환으로 정략결혼을 내세웠다. 이해관계가 맞은 두 적국은 프랑스는 당시 왕태자가 된 루이 오귀스트를, 오스트리아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내세워 결혼시켰다. 그렇게 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14살이 되자 베르사유 궁에서 루이 오귀스트와 결혼식을 올리고 왕태자비가 되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태자비였을 적, 시할아버지 루이 15세의 정부(情婦) 뒤바리 부인과 자존심 문제로 대립했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어머니의 엄격한 성윤리 교육으로 인해 매춘부나 정부를 혐오하고 있었는데, 뒤바리 부인을 싫어한 루이 15세의 딸들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내세워 권위적으로 대립했었다. 친정어머니의 교육과 시고모들의 영향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뒤바리 부인을 좋아하지 않았다.

결국 뒤바리 부인은 루이 15세에게 떼를 썼다. 루이 15세는 직접적으로 손자며느리를 설교할 수 없으니 대사를 시켜서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간접적으로 알려주는 식으로 처리했다. 마리아 테레지아도 정부의 존재에 대해서 불쾌했지만, 당시 사회상 막을 도리가 없었다.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의 공주가 아닌 프랑스 왕태자에게 시집온 왕태자비 신분이기에, 딸에게 예의를 차리라고 훈수.

결국 마리 앙투아네트는 뒤바리 부인에게 말을 걸게 되었다. 단, 대중매체에서와 달리 뒤바리 부인은 마리 앙투아네트를 시기하거나 아래로 보지 않았으며, 말을 걸어주길 바랐던 것도 정말 친해지고 싶었던 것이었다고.

프랑스 왕비[편집 | 원본 편집]

루이 15세가 천연두를 이기지 못하고 1774년에 사망하자, 루이 오귀스트는 루이 16세로 즉위하게 되었고, 마리 앙투아네트도 왕비로 승격되었다.

프랑스 혁명[편집 | 원본 편집]

최후[편집 | 원본 편집]

어린 아들 루이 17세와 근친상간을 한 죄라는 누명을 쓰고 1793년 10월 16일. 단두대에서 처형당하고 말았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프랑스 혁명 당시에는 혁명가나 대중들이 마리 앙투아네트를 어떻게든 폄훼하기 위해 부정적인 면도 과장시키거나, 케이크 악성 루머나 포르노의 여주인공으로 만들었고, 사형시킬 빌미를 만들기 위해 아들 루이 17세와 근친상간을 했다는 누명을 씌워 루이 16세와 더불어 무능한 왕비의 상징이자 방탕과 문란, 사치의 대명사로 꼽혔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는 사료들이 발견되었고, 부정적인 평가들도 과장 내지는 선동 목적으로 지어내거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딱히 잘못하지 않은 것도 뒤집어 쓴 것이 밝혀져, 재평가를 받게 되었다. 오히려 딸 마리 테레즈를 데리고 빈민가나 농가를 다니면서 동정심을 가르치려고 했었고, 감자를 이용해서 복지에 신경을 쓰는 등, 이상적인 왕비로서의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악행으로 과장된 것도 10대 소녀인 것을 감안하면 봐줄법하거나 철없는 행동에 불과한 짓들이었다. 봉건제와 왕정 시대의 왕비로서는 큰 흠집이 없었지만, 시민혁명 열풍과 계몽사상 유행으로 재정이 파탄난 프랑스를 살리지 못한 시대를 잘못 태어난 인물이다.

원인과 해명[편집 | 원본 편집]

마리 앙투아네트가 성품과 별개로 악성 루머까지 씌이면서 프랑스 대중들의 큰 미움을 받았던 건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것과 프랑스 왕국 재정상황이 심각하게 안 좋았다는 점, 비난여론의 방패막이가 되어줄 공식 정부가 없었다는 점이 꼽히고 있다.

정치적인 이유
사실 그녀가 평생 비난을 받았던 핵심 이유였다. 일단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왕국의 적국 오스트리아 대공국의 공주였으며, 루이 16세와 결혼한 것도 당시 급성장하던 프로이센 왕국을 견제하기 위해 적국끼리 이해관계가 맞은 정략결혼이었다. 때문에 결혼했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정적 및 대중들로부터 ‘오스트리아 여자’라고 비난받았고, 더 나아가 오스트리아의 스파이로 의심받는 처지로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것이 그녀의 발목을 잡는 존재였다. 정작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빠 요제프 2세가 프랑스 내정에 간섭하려고 할 때마다 제지했고, 본인도 정치엔 큰 관심이 없었다.
귀족들과 관계
그렇다면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 서민들의 증오만 받고 귀족들에겐 지지를 받았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되려 프랑스 골수 귀족들도 그녀가 오스트리아 출신이라는 것을 탐탁치 않게 여겼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폴리냑 백작부인을 비롯한 자기 또래의 귀족들하고만 어울렸기에, 앙투아네트의 파벌에 끼지 못한 귀족들은 항상 악담을 퍼부었었다. 때문에 신흥 귀족(브루주아)들이 앙투아네트의 악평 작업을 쉽게 할 수 있었다.
사회적인 이유
루이 16세는 선대 왕들과 달리 공식 정부인 메트레상티트르(maîtresse-en-titre)와 이외 정부들을 둔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아내에게만 헌신하는 남자였다. 때문에 프랑스 대중은 루이 16세를 마초적이지 못한 남자로 여겼다. 덩달아 당시 철이 없었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루이 16세를 약간 만만하게 보고 어머니에게 뒷담을 까다 혼난 적이 있어서, 안 그래도 ‘일개 오스트리아 여자가 왕을 농락한다’는 이미지까지 씌였지, 도덕적, 종교적 명분으로 비난할 법한 정부가 없으니 대신 오스트리아 출신 프랑스 왕비를 비난하는 식으로 여론을 돌렸다. 심지어 사치의 대명사로 꼽히는 파티도 원래는 메트레상티트르가 주최하는 것인데 루이 16세는 정부가 없었기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대신 파티를 열었고, 본인도 파티를 좋아했기에 더더욱 사치를 부린다는 오명을 쓴 건 덤이다.
사치에 대해
사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전대 왕비나 정부에 비해 큰 사치를 부리지 않았는데, 20만 리브르밖에 쓰지 않았으며 3%나 할당된 예산 중 10%밖에 쓰질 않았다. 문제는 당시 프랑스는 루이 14세와 루이 15세가 남긴 막대한 빚과 미국의 독립전쟁 투자 비용으로 인해 재정 상태가 너무 안 좋았고, 마리 앙투아네트의 사소한 사치와 품위유지를 위한 비용마저 쓸데없는 사치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케이크 루머에 대한 해명
이 대사는 루이 14세의 왕비였던 마리아 테레사가 했다는 설이 있는데, 이마저도 굶주리는 백성을 폄훼하기 위한 말이 아니라 동정하는 의미로 “먹을 만한 케이크나 과자라도 구해줄 수 없을까?”라는 뉘앙스로 한 말이라고 한다. 게다가 마리아 테레사도 바보같이 순박했었으며 케이크 루머에 대한 해명이나 원안도 동정에 가까운 말이었다는 추측이 대세로 꼽히고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 자신도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한다는 뉘앙스로 “브리오슈를 먹일 수 없나요?”라고 말했었는데 폄훼 목적으로 말했다고 보기가 힘들다. 오히려 굶주리는 백성에 대한 폄훼 및 세상물정을 모르는 망언을 진짜로 한건 서진의 2대 황제인 사마충(혜제)으로 “밥이 없으면 고깃죽을 먹으면 되지 않느냐”라는 말을 대놓고 한 것으로 유명했다. 게다가 사마충도 현대에서는 지적장애에 준하는 정신 장애를 앓고 있었다.

이야깃거리[편집 | 원본 편집]

  • 한스 악셀 폰 페르센과는 숨겨진 연인 관계로 유명해, 대중매체에서도 페르센과 연애담은 항상 나오고 있다. 때문에 루이 16세와 사이에서 낳은 자녀마저 페르센의 자식이라는 오해를 산 적이 있었는데, 페르센과는 육체적인 불륜을 저지르지 않았다.
  • 마리 앙투아네트 증후군은 그녀의 이름을 따 만들어진 머리카락이 하얘지는 현상으로, 처형 당일 마리 앙투아네트의 머리가 하얗게 새버렸기에 붙여진 것이다.
  • 마리 앙투아네트는 확실한 미녀는 아니었지만, 좋은 피부 덕분에 예쁘장하게 생겼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러나 합스부르크의 혈통이었기에 합스부르크 특유의 유전병주걱턱과 매부리코를 가지고 있어서 어릴 때는 치아 교정을 하고 다녔고 항상 부채를 들고 얼굴을 가렸었다.
  • 한때 레즈비언이라는 루머까지 씌여 일부 동성애자 단체에서 마스코트로 삼은 적이 있었다. 당연히 이 레즈비언 루머도 마리 앙투아네트를 폄훼하기 위한 근거 없는 악성루머 중 하나로, 당시 동성애를 죄악시했던 시대였기에 동성애자라고 딱지를 붙인 것이다.

대중문화 속의 마리 앙투아네트[편집 | 원본 편집]

주인공으로 나온 매체
  • 순정만화 《베르사유의 장미》에서는 오스칼과 같이 투톱 주인공으로 마리 앙투아네트는 역사 파트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 오토메 게임 《장미에 숨겨진 베리테》에서는 마리 앙투아네트 자신은 조연 여캐로, 주인공인 리제가 자신의 대행을 맡고 있다.
조단역으로 나온 매체
마리 앙투아네트를 모티브로 삼은 가공인물

외부 참조[편집 | 원본 편집]

위키백과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