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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건국 ==
== 대한민국 건국 ==
===제1공화국===
===제1공화국===
제1공화국은 {{날짜/출력|1948-7-17}} 제헌헌법이 공표되면서 시작했다.<ref>제헌 국회는 {{날짜/출력|1948-5-10}} 선거로 뽑혔으니 엄밀히 말해 제1공화국 때 일어난 것은 아니다.</ref> 중요 사건으로는 6·25 전쟁과 [[4·19 혁명]]이 있다.
{{본문|제1공화국 (대한민국)}}
====[[6·25 전쟁]]====
{{날짜/출력|1950-6-25}} 북한은 북위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하였다. 남한의 이승만 정권은 이를 사전에 파악하지 못하였고, 곧 서울을 거의 저항 하나 없이 북한에게 내준다. 이로 인해 많은 남한의 인사들이 죽거나 북한으로 납치되었다. 이후 미군이 전쟁에 참여하였으나 북한군의 진격을 막지는 못하였고, 결국 [[8월 12일]]즈음부터는 낙동강 방어선에서 죽기살기로 버텼다.
 
곧 북한이 적화통일을 할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믿던 순간, [[9월 15일]]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하면서 전세가 확 기울었고, 남한군과 연합군은 북진을 시작해 곧 [[9월 26일]]에는 서울을 탈환하고 [[10월 20일]]에는 북한의 수비를 뚫고 [[평양직할시|평양]]을 탈환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사람들은 남한 주도의 통일이 곧 이루어지리라 믿었다.
 
하지만 이를 위협으로 본 [[중국]]은 [[10월 25일]] 북한 측에 참여하였고, [[11월]] 중순부터 중국의 본격적인 공세가 시작되었다. [[12월 6일]]에는 평양의 다시 북한 측으로 넘어갔고, 해를 지나 [[1951년]] [[1월 4일]]에는 서울까지 다시 북한이 점령한다. 북한군과 중국군은 [[화성시|화성]]-[[여주시|여주]]-[[원주시|원주]]-[[삼척시|삼척]]를 잇는 선까지 진격하였으나, 보급 문제 등으로 인해 더 이상 진격을 하지 않았다. 이를 깨달은 연합군 측은 다시 공세로 전환하여 서울을 수복하였고, [[6월]] 즈음부터는 현재의 [[휴전선]]에서 전선이 고착화하였다. 이후 몇 년간의 협상 끝에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맺어졌고 한국 전쟁은 휴전이 되었다.
 
6·25 전쟁은 한반도 전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으며, 거의 모든 것을 리셋시켰다. 그나마 있던 남한의 산업은 거의 다 갈아엎어졌고, 피난으로 대이동이 일어나 기존의 양반제를 사람들의 기억에서 확실하게 없앴으며, 또한 지방 유지들과 실권자들의 권력을 무력화했다. 그리고 기존 사회를 주름잡던 인물들이 대거 사형, 실종, 또는 전사하면서 사회 구조를 완전히 바꿔버렸다. 이를 통해 현대 한국의 사회 구조가 생겨났다.
====[[3·15 부정선거]]====
1960년 3월 제4대 대통령 선거와 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집권세력인 자유당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은 비록 입지가 많이 낮아졌어도 당선은 무난할 것 같았다. 심지어 경쟁자인 민주당 조병옥은 선거 한 달 전 병사한다. 하지만 부통령 선거의 경우 자유당 후보인 이기붕이 민주당 후보인 장면을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당시 자유당은 늙은 이승만이 아닌 이기붕을 중심으로 내각이 운영되었다.
 
1960년 3월의 부통령 선거 때 이기붕의 세력은 부정선거를 할 생각을 한다. 자유당과 이승만이 이끌던 권위주의체제에서 중앙의 내무장관을 중심으로 한 내각의 내집단은 지방조직을 통제함으로 공무원, 경찰, 유권자를 선거에 동원할 수 있었다. 부정선거의 기획자는 당시 내무장관이었던 [[최인규]]이다. 이 부정선거를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여러 문제가 생겼다. 야당의 선거유세에 학생참여를 하지 못하도록 일요일에도 학교에 오게 한다.{{ㅊ|뭣이}} 이에 [[2월 28일]] 대구 경북고등학교 학생들이 이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인다. 이에 전국 각지에서 부정선거를 비난하는 고등학생들의 시위가 일어났다.
 
[[3월 15일]], 아주 대놓고 부정선거를 한다. 농촌의 주민들에게 3인조 공개투표를 강요하였고, 군대에선 이승만을 찍은 사람이 120%{{ㅊ|120%는 어떻게 해야 나오는 거지}}, 또한 득표율은 당연히 조작되었다. 발표된 결과는 이승만 89%, 이기붕 79%였다. 특히 이기붕은 883만 대 184만으로 장면을 압도하는 수치였다. 이에 격분한 국민들은 들고 일어나니...
====[[4·19 혁명]]====
부정선거 당일인 [[3월 15일]] 마산에서 항의 시위가 일어나고, 이 과정에서 고등학생 [[김주열]]이 경찰의 최루탄에 맞아서 사망한다. 경찰은 시신을 바다에 버렸는데, [[4월 11일]] 시신이 발견된다. 이게 도화선이 되어 부정선거를 비판하는 시위가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되었다. 서울에서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시작이었다. 1000여 명의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데모를 벌이면서 재선거를 요구한다.
 
그 다음날인 19일 대학생 뿐만 아니라 중고등학생도 시위에 동참하고, 오후에 국회의사당 앞의 시위대 2000여 명이 대통령 관저 경무대로 향한다.  이에 경찰은 발포하고 21명이 사망, 172명이 부상당한다. 이에 흥분한 시민들은 시위대에 합세하고, 서울 전체에서 시위대의 수는 20만 명을 넘었다. 이날 오후 서울을 포함한 주요 도시들에 계엄령이 선포되어 계엄군이 들어선다. 이 계엄사령부의 발표에서 이날 사망한 민간인은 111명, 경찰은 4명이었다. 부상자는 민간인에서 558명, 경찰은 169명이었다.
 
20일에 계엄령 때문에 서울은 일단 멈추었지만 대구나 인천, 전주 등에서는 학생 데모가 계속됐다다. 25일 민주당은 이승만이 물러날 것을 권고하는 안을 국회에 제출한다. 이날 오후 27개 대학 285명의 교수들은 부정선거와 4·19사태의 책임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의 하야를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인다. 이 다음날인 26일 시위하는 군중들이 다시 서울의 거리를 메우기 시작하며, 이들이 경무대로 갈 때 그 수가 이미 10만을 넘었다. 이에 이승만이
{{인용문|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이승만}}
라는 성명을 발표, 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며, 27일 경무대를 떠나 사저 이화장으로 돌아온다.
 
[[5월 29일]],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하와이로 가게 된다. 이승만이 다시 귀국할 마음도 있었지만 정치 상황 때문에 결국 귀국하지 못하며 [[1965년]]에 하와이에서 삶을 마감한다.
=====의의=====
4·19 혁명은 한반도 역사에서 국민이 봉기하여 정권을 무너뜨린 최초의 사건이다. 조선은 말할 필요도 없는 신분제 사회였고, 일제 강점기 때는 세금만 냈지 정치적으로 참여할 기회는 없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고서야 국민이 나라의 주권자가 되었다. 이 국민이 일어나 정부를 무너뜨린 4·19는 민주주의의 기본 원리인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역사적인 사건이며, 민주혁명으로 평가받는다.
 
=== 제2공화국 ===
=== 제2공화국 ===
 
{{본문|제2공화국 (대한민국)}}
=== 제3공화국 ===
=== 제3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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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4공화국 ===
=== 제4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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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5공화국 ===
=== 제5공화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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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6공화국 ===
=== 제6공화국 ===
 
{{본문|제6공화국 (대한민국)}}
==참고문헌==
*이영훈. “대한민국 역사”


{{각주}}
{{각주}}
[[분류:한국사]]
[[분류:한국사]]
[[분류:대한민국의 역사]]

2015년 10월 27일 (화) 19:31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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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韓民國의 歷史

동아시아의 반도의 국가 대한민국의 역사이다.


대한민국 수립 이전

일제 강점기

1910년까지 존속했던 조선 왕조(혹은 대한제국)가 틀:날짜/출력 경술국치로 종결된 이후 일제의 조선총독부의 지배 아래 통치받던 한반도는 당연히 여러 반일성 개인/단체의 활동들이 전개되었고 그중에선 이승만, 김구 등 여러 뜻있는 인사들이 상하이에서 함께 하여 아예 건국을 미리 준비하던 경우도 있었는데 이 모임에서 국명이 '대한민국'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결성된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실효성은 전혀 없는 이름뿐인 정부조직이었다(하지만 나름대로 독립군들을 지원하고 전용 의용군을 창설하는 등 노력을 하고 있었부터 나온다.

미 군정기

틀:날짜/출력 2차 세계대전에서 미군의 히로시마나가사키 핵폭탄 투하,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와 관동군의 붕괴, 만주 상실로 인해 전의를 완전히 상실한 일본이 결국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면서, 한반도는 자유의 땅이 되었지만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

일본이 패망한 이후 일본과 맞서 싸운 소련, 미국이 일본을 대신하여 한반도를 통치하게 되었고 이 중 소련은 지리상으로 가까운 한반도 북부를 소련군 소속 항일인사였던 김일성을 대표로 통치하였고 반대로 미국은 지리상으로 (일본과) 가까운 한반도 남부를 통치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군정과 소련군정으로 양분되어 통치되면 분단이 일어날까 걱정했던 여운형을 주축으로 한 조선인민공화국이 급히 발표되는 등 건국 시도가 수차례 있어왔지만, 미국은 한반도 내 모든 독립적인 정부수립을 위한 조직이나 정당들의 활동을 무시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들은 미군정에 소속되어 활동할 것을 분명히 하였다. 미군정에 의해서 결국 조선인민공화국이나 상하이 임시정부 모두 부정되었고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 통일 단독 정부수립을 위하여 제1,2 차 미소공동위원회를 통해 타협점을 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서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 우위의 정부를 수립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결렬. 더군다나 동아일보에서 오보를 내는 바람에 사람들의 의견이 결정적으로 나뉘어버렸다. 이로 인해 미국은 UN에 한반도 정부수립문제를 상정해버렸고 UN에서는 남북총선거를 통해 정부수립을 하자고 결의하였다. 그러나 1948년 소련은 남한의 인구가 더 많았기 때문에 불리하다고 판단하였고 결의안을 거부, 38선 이북으로 UN선거관리위원회의 방북을 차단하였다. 결국 남한만의 단독선거(5·10 총선거)를 하고 이를 통해서 수립된 정부가 제헌국회와 이승만을 제1 대 대통령으로하는 제1공화국이다.

대한민국 건국

제1공화국

제2공화국

제3공화국

제4공화국

제5공화국

제6공화국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