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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톨릭]]
[[분류: 카톨릭]]

2015년 4월 23일 (목) 18:42 판

라틴어 : Ordo Fratrum Hospitalis Sancti Ioannis Hierosolymitani


영어 : Sovereign Military Hospitaller Order of St. John of Jerusalem of Rhodes and of Malta.


한국어 : 성 요한의 예루살렘, 로도스, 그리고 몰타의 군사 주권 구호기사단

구호 기사단은 십자군 시기에 카톨릭계 기사단이다.현재는 일종의 자선기관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역사

탄생

구호기사단의 탄생은 1048년 아말피 공화국의 상인이 이집트의 칼리프로부터 예루살렘종교나 인종에 관계 없이 순례자들을 위한 병원, 수도원과 교회를 세우는 것을 허락받았고, 곧 이들이 기사단으로 발전하개 된다. 그 뒤 창시자인 복자 제랄드에 의해 자치를 얻게된 기사단은 1113년 교황 파스칼 2세가 내린 대칙서를 통해 인정받았으며, 또한 그들의 지도자를 다른 종교 당국이나 평신도들에 의해 간섭을 받지 않고 선출할 권리도 얻을 수 있었다. 교황이 내린 교칙서로 인해 구호기사단은 평신도 수도 기사단이 되었으므로 모든 기사들은 신앙심이 깊어야 하고, 또한 가난, 사랑, 순종이라는 세가지 규율을 따라야만 했다.

예루살렘 왕국의 설립됨에 따라 기사단이 병자들을 치료하는 일뿐만 아니라 순례자들과 병자들을 군사적으로 지키는 일 역시 담당하게 되었. 앞에서 현재의 상징이 쓰이기 시작한 때도 이 때쯤 된다.

성지 상실

하지만 십자군 국가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1291년에 아크레를 상실함과 동시에 모든 성지를 상실하게 된다. 이에 기사단은 과거 십자군에 의해 정복된 적이 있는 키프로스의 리마솔로 가게 된다. 거기에서 병원을 키우고 순례자를 보호하고이슬람 함선을 공격하기 위한함선들을 건조하였다. 그러나 기사단의 크기가 점점 불어남에 따라 키프로스 왕국에서의 셋방살이는 점점 더 불편해 져갔으며 기사단은 새로운 보금자리를 고려하게 된다.

로도스 시기

그러던 중 1310년, 한 제노바 상인의 도움을 받아 당시 비잔틴 제국령이던 로도스 섬을 공략하여 자기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게 된다. 로도스 섬은 중근동과 유럽을 잇는 전략적 위치에 존재하였고, 성 요헌 기사단은 이제 배를 제 2의 말로써 사용하여 동지중해 곳곳을 휘저어 다니게 된다.

또한 이 시기는 기사단이 통치 체제를 정비한 시기이기도 한다. 기사단의 기사들은 유럽의 각 지방에서 왔고, 그들이 온 출신국에 따라 프랑스출신의 프랑스, 프로방스, 오베르뉴 그리고 영국(스코틀랜드아일랜드를 포함), 아라곤(나바로를 포함), 이탈리아, 독일로 나누었으며,[1]그들은 각각의 수도분원, 수도원, 관할 구역 및 기사령을 지니게 했다. 한편 기사단은 기사단장(로도스 공)과 원로원에 의하 통치되었다. 그들은 유럽의 주요 국가에 로비를 하여 관계를 유지 시키곤 했다. 기사단의 고위직은 서로 다른 출신의 기사들에게 주어졌으며, 하부 조직들 역시 마찬가지 였다.

하지만 16세기,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그들의 눈길을 로도스로 돌리었다. 당시 구호기사단은 배를 타고 이슬람 선박을 약탈하고 있었으며, 일부 사람들은 이를 '이슬람의 목이 박힌 가시'같다고도 표현하였다. 이에 오스만 튀르크 제국은 기사단을 토벌하고 싶어했고, 제국의 술탄인 쉴레이만 대제가 직접 참여한 1521년의 공방전에 의하 쫓겨나게 된다.[2]

몰타 시기

다행히도 1530년, 매년 몰타의 매를 1마리씩 바친다는 조건으로 카를 5세 시기의 스페인으로부터 몰타 섬을 받아낸다. 이 때, 기사단은 그 어떠한 기독교 국가로부터 중립을 지킬 것을 결정한다.

그 뒤 1565년에는 기사단장 장 드 라 발레트가 이끄는 기사단원들은 오스만 튀르크 군을 상대로 아직 성 밖에 지어지지 않은 몰타 섬을 수비하는데 성공한다. 이 승리 이후에 기사단은 현재의 몰타의 수도가 되는 발레타를 건설한다.[3] 이 때에 기사단은 교회와 궁전, 방어시설과 요새들을 건립하였다. 또한 큰 병원[4]을 지었는데, 이 병원은 당시 유럽에서 가장 효율적인 병원 중 하나로 손꼽혀왔다. 그 외에도 해부학 학교와 약학 시설을 설립하였다.

그 외에도 구호기사단원은 이슬람 해적들을 상대로 큰 역활을 향하였다. 비록 그들은 소수였기는 했지만 멀리는 에게 해 인근까지 가서 이슬람 선박을 털어오기도 하였다.

방황기

하지만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 때 이 섬의 전략적 가치를 본 나폴레옹은 이 섬을 점령한다. 기사단의 규정에는 같은 기독교인들과는 싸워서는 안된다는 규정이 있었으므로, 기사단은 저항하지 않고 이 선을 떠나게 된다. 그리고 1802년이 체결된 아미엥 조약으로 기사단이 몰타 섬을 되찾는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만다.

그 뒤 메시나, 페라라, 카타니아[5] 등을 돌던[6] 기사단은 1834년 로마 아벤티노 언덕의 마지스트랄 빌라와 궁전에 치외법권 지역을 가지게 되어 정착한다.

로마 정착 이후

로마 정착 이후에는 구호기사단은 구호업무를 주 업무로 전환하였으며, 20세기에는 수 많은 국가에서의 구호업무로 크게 성장하였다. 특히 기사단장 루드비코 치기 알바니 델라 로베르가 이끄는 기사단원들은 제 1차 세계대전제 2차 세계대전때 수많은 구호업무를 진행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구호 업무의 범위를 전 세계 밤위로 넓히었다.

같이보기

참고 문헌

  1. http://www.orderofmalta.int/history/639/history-order-of-malta/?lang=en
  2. 로마멸망 이후 지중해 세계 下편, 시오노 니나미네? ISBN 8935661937

주석

  1. 후에 카스티야와 포루투칼이 추가된다.
  2. 이 때 쉴레이만 대제는 일종의 기사도를 베풀어서 기사단원들에게 무구를 제외한 모든 원하는 물건을 가지고 성을 나가게 해준다. 이로 인해 기사단은 또 다시 설욕의 기회를 가질 수 있게 되고, 이슬람 쪽은 기사닼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된다.
  3. 이 도시의 이름은 도시의 건립자이자 공방점 당시 기사단장이던 라 발레트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4. 구호기사단의 본래 업무는 구호 업무였다.
  5. http://ko.wikipedia.org/wiki/카타니아
  6. 이 때 기사단은 소속도 러시아 정교회 소속으로 바뀌고 기사단장도 러시아 황제가 맡는 촌극도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