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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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雲起. 호는 학은(鶴隱), 이명은 고흥원(高興園).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7년 함경남도 문천군에서 공창준(公昌俊)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공진원(公震遠)이지만 별칭인 고운기(高雲起)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부친 공창준은 홍범도의 부대에 들어가 함경도 각지에서 일본군과 맞서 무장 투쟁을 전개한 뒤 홍범도와 함께 만주로 이동하여 무송현에서 김혁(金赫), 윤세복 등과 함께 흥업단을 조직했으며, 1930년대에는 북만주에서 홍진, 지청천 등과 함께 한국독립당을 조직해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일제에 맞선 독립운동가였다. 고운기의 성장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지만 부친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을 것으로 여겨긴다. 일부 자료에 따르면, 고운기는 하얼빈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청년운동과 교육사업에 종사했다고 하며, 대종교 신자였다고 한다.

고운기는 부친을 뒤따라 한국독립당에 가입한 뒤 당군인 한국독립군에도 배속되었다. 1931년 말 약 5,6백명의 병력을 확보한 한국독립군은 부대의 편제를 갖췄는데, 공운기는 제6중대장을 맡았다. 그는 부대원들과 함께 일제의 만주 침략에 맞섰지만 전력과 무기의 열세로 인해 밀려났다. 이에 1932년 11월, 한국독립군 사령관 지청천은 길림구국군과 연합하기로 하고 고운기와 강진해, 심만호(沈萬浩)를 길림구국군이 위치한 동만주 지역으로 파견했다. 고운기는 두 동료와 함께 액목현에 이르러 길림구국군의 제13사단장 요진산을 만났다. 하지만 당시 길림구국군은 1932년 10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크게 패해 전력이 많이 상했고, 왕덕림 사령관은 장제스의 협조를 얻기 위해 난징에 가 있었다. 이에 고운기, 강진해, 심만호는 현상을 유지하고 있던 오의성, 시세영 등의 중국 부대를 찾아가 한국독립군과 합작할 것을 제의했다. 시세영은 이들의 제의를 받아들어 한중 합작을 이루기로 하고, 연합부대의 명칭을 '중한연합토군'이라고 했다.

고운기 일행은 한국독립군 본부로 돌아와 길림구국군과의 합작이 성사되었음을 보고했다. 이후 그는 사도하자, 동경성, 대전자령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투에 참가해 상당한 전공을 세웠다. 그런데 1933년 10월 동녕현성에서 연합작전을 준비하던 중 오의성 부대가 한국독립군을 기습 포위하고 총사령관 지청천을 비롯하여 3백여명의 독립군을 체포 구금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전리품 분배 과정에서 오해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길림구국군은 나중에 자신들이 오해했음을 알고 독립군을 석방시켰지만, 독립군 장정 대부분이 구국군의 포위망을 벗어나 각지로 흩어져 버렸다. 이 때문에 한국독립군은 군대로서의 조직을 더이상 유지할 수 없었다. 무장 조직이 와해되면서 한국독립당을 이끌던 인사들의 안전 문제가 시급해졌다. 여기에 일본군의 대공세가 펼쳐지고 밀정들과 마적단, 공산주의자들의 발호 역시 당의 존립을 위협했다. 이에 한국독립당과 한국독립군 인사들은 1933년 말 중국 관내로 이동했다.

고운기는 한국독립군과 함께 중국 관내로 들어온 뒤 1934년 2월 청년 장교들과 함께 낙양군관학교 한인특별반에 입교해 1년 2개월 동안 군사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1935년 4월 졸업한 그는 지청천을 따라 1935년 4월 난징에 도착하고 신한독립당 산하의 청년군사간부훈련반에 입소했다. 고운기는 훈련반을 졸업한 뒤 상하이로 가서 지청천, 황학수, 조경한 등과 함께 당을 이끌다가 다시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과 통합하여 민족혁명당을 창립했다. 또한 1935년 12월에 낙양군관학교 출신을 중심으로 한국군인회를 조직해 항일 무장투쟁을 계획했다. 이후 김약산(金若山) 등 공산 계열이 민족혁명당을 탈퇴하자, 민족혁명당은 조선혁명당으로 개편되었다. 이 시기 부친 공창준이 중병을 얻었고, 결국 1936년 4월 15일 난징에서 사망했다. 공창준은 사망 직전 아들 고운기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너는 국가민족을 위하여 진충(盡忠)하여라.

그 후 고운기는 황학수와 함께 내몽고로 파견되었다가 다음 해에 돌아와서 이시영, 김의한(金毅漢)과 함께 조선혁명당의 감찰위원이 되었다. 그러던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조선혁명당은 김구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이 주도하는 한국국민당과 홍진, 조소앙이 주도하는 재건 한국독립당과 연합하기로 하고 그해 8월 17일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했다. 이후 일본군이 난징을 공격해오자, 고운기는 임시정부와 함께 피난길에 올라 창사, 광저우를 거쳐 1938년 11월 류저우에 도착했다. 그는 류저우에서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약칭 '청년공작대') 대장을 맡았다. 청년공작대는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에 소속되어 있던 한국국민당, 재건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의 청년들을 중심으로 1939년 2월에 결성된 군사조직으로 대원은 모두 34명이었다. 고운기가 대장을 맡게 된 것은 청년들 중 나이가 많고 만주에서 한국독립군으로 활동한 경력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청년공작대는 중국인들을 대상으로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그들은 벽보, 연극 등을 통해 중국인들의 반일감정과 항일의지를 고취시키는 선전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일본군이 류저우를 압박해 오자, 그는 1939년 5월 임시정부와 함께 쓰촨성 기강으로 이동했다. 그는 기강 시내의 산꼭대기에 있는 관음암에서 청년공작대 대원들과 함께 머물렀고, 방순희. 이복원(李復源), 이흥관(李興官)과 함께 임시의정원 함경도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1940년 2월에는 임시정부 군무부 군사학편수위원으로 임명되었으며, 1940년 8월 4일 총사령부가 구성되었을 때 참모로 선임되었다. 1940년 9월 17일 충칭의 가릉빈관에서 한국광복군총사령부성립전례식이 거행되었을 때, 그는 행사의 마지막 연설을 맡아 참모의 자격으로 전방에서 활동하는 장사들에게 보내는 ‘고중국전방장사서(告中國前方將士書)’를 낭독했다.

광복군 창설 후, 고운기는 제2지대장에 임명되었다. 그는 1940년 11월 대원들과 함께 산시성 시안으로 가서 한인 장정을 모집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는 임지인 수원성(綏遠省)으로 전진하여 포두(包頭)를 근거지로 삼아 초모공작에 나섰다. 한편 중국군 제12전구 사령관 부작의(傅作義)의 중국군 각 부대와 긴밀한 연락을 취했고, 수원성 일대는 물론 일본군의 점령 하에 있는 하북성의 북평, 천진, 당산 지구와 차할성의 장가구 등 광범위한 지역에 걸쳐 공작 활동을 전개했다. 이후 1941년 제2지구대장 지달수(池達洙)와 유해준(兪海濬), 왕중량(王仲良) 등 간부들과 함께 포두를 떠나 한국교포가 비교적 많이 거주하고 북경과의 거리도 가까운 장가구 시내에 잠입하여 교포를 대상으로 초모공작을 벌여 10여 명의 청년을 포섭하여 거점을 구축했다.

그러나 포섭한 인사 중 한 사람인 최준(崔俊)이 일본 헌병대에 자수하는 바람에 거점과 조직망이 파괴되고 유해준이 체포되었다. 이에 그는 대원을 인솔하여 1941년 겨울에 시안으로 복귀했다. 그가 시안에 도착했을 때, 광복군은 1941년 11월 ‘한국광복군행동 9개준승’으로 인해 중국군에게 예속되었고 시안에 있던 총사령부는 충칭으로 철수했다. 고운기는 이에따라 1942년 10월 황학수와 함께 제2지대 대원들을 이끌고 시안을 떠나 충칭으로 귀환했다. 그는 충칭에서 임시의정원 의원으로 활동했고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9개준승을 폐지해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정정화의 회고록인 <장강일기>에 따르면, 고운기는 충칭에 돌아온 직후 병사했다고 한다. 아마도 그는 충칭에 돌아온 후 병을 얻어 1943년에 병사한 것으로 보인다. 향년 37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고운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국립서울현충원 무후선열에 그를 기리는 위패를 세웠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