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문산-봉일천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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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랑포 전투 ===
=== 고랑포 전투 ===
고랑포에서 대원리간의 경비임무를 맡은 제13연대 제3대대는 지휘소를 아곡동에 두고 제11중대를 좌측, 제10중대를 우측, 제9중대를 예비대로 두었다.
고랑포에서 대원리간의 경비임무를 맡은 제13연대 제3대대는 지휘소를 아곡동에 두고 제11중대를 좌측, 제10중대를 우측, 제9중대를 예비대로 두었다.
제11중대는 04:30 부터 전투를 시작하여 전방 소대들이 북한군 일부를 격퇴하고 이후 공격에 대비하였으나 이미 북한군의 주력은 대덕산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전방 소대는 임진강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장단을 우회해 오후에 임진강을 도하하였다.
동일한 시각 제10중대장 박형수 중위는 112고지의 제1소대장 장재만 중위에게 1개 중대가 진지에 올라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이후 연락이 끊어졌다. 대대장 유재성 소령으로부터 고랑포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중대장은 제1소대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북한군 선두부대가 사격을 집중하자 방향을 틀어 임진강 남쪽의 59고지에 부대를 배치했다. 북한군이 임진강을 도하를 시도하자 우선적으로 이미 임진강 남쪽 53고지를 점령한 북한군에게 화력을 집중해 분산시킨 뒤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포격전을 벌였다. 06:00 중대의 포탄이 바닥나자 북한군이 자하리쪽으로 남하했다. 북한군이 대대본부까지 다다랐을 것이라 판단한 중대장은 석포로 철수를 명령했다.
대대장은 북한군을 지연시키면서 철수해 금곡리 부근에 집결하라는 지시를 받고 각 중대에 하달하려 했지만 이미 통신이 차단된 상태였다. 대대장은 전방중대가 여의치 않은 사태에 직면했다고 판단, 91고지와 무명고지를 점령해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기로 했다.
06:00 포탄이 숙영지 주위에 떨어지며 전차 7대가 남하하자 대대장은 제9, 제12중대의 중화기를 도로변에 배치시켰다. 장단경찰서의 경비주임 김기태 경위가 탑승한 차량을 파괴한 전차가 잠시 멈추자 바주카와 박격포 사격 명령을 내렸지만 파괴에 실패하고 오히려 역습을 당했다. 대대장은 제9중대 제1소대장 장두철 중위를 포함한 8명의 특공대를 선발하여 저지시키려 했지만 모두 전사하고 실패했다. 이어 화기중대의 김일하 병장 등 7명이 특공대를 자청해 전차의 측면에 수류탄을 투척했으나 실패하고 되돌아왔다.
대대장은 현 위치 사수가 불가능하자 남쪽 85고지로 철수시켰다. 17:00 제10중대와 합류하고 강을 건너 22:30 금곡리에 집결했다.


=== 문산 전투 ===
=== 문산 전투 ===

2015년 7월 30일 (목) 10:18 판

틀:학술

본 문서는 『6.25전쟁사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작전』 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 ISSN 1739-2705
{{{전쟁이름}}}
Battle of Gaeseong-Munsan.jpg
군사 충돌 정보
날짜 1950년 6월 25일 ~ 28일
결과 북한의 승리
교전단체
{{{단체1}}} {{{단체2}}}
최광 소장
방호산 소장
최율석 대좌
백선엽 대령
병력:
약 2만 1000명
122mm 유탄포 24문
76mm 유탄포 72문
45mm 대전차포 168문
T-34 40대
자주포 32문[1]

너무 분량이 많고 겹치는 부분이 많아 가장 오래걸리고 정성(?)이 들어갈 것 같지만 위키니트의 저력을 보여주겠습니다.

개요

개성-문산-봉일천 전투틑 북한군 제1보병사단이 25일 국군 제13연대를, 제6사단이 제12연대를 공격하며 시작되었다. 이에 국군 예비대 제11연대가 올라가 임진교를 중심으로 문산에서 방어를 하였지만, 북한군 주력이 26일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27~28일 전투로 국군의 일부가 역습에 성공하였으나 북한군이 미아리에서 서울 시내로 진출하였다는 소식이 전달되었으며, 이에 행주와 이산포 2개 지점에서 한강을 도하, 철수하였다.

국군 제1사단의 작전지역은 대체로 임진강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분리되며, 전방 38선 일대는 예성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세분되었다. 지역 내에는 예성강, 사천, 사미천, 임진강, 문산천, 곡릉천 등 여러 하천이 있어 방어작전에 유리하였지만 반대로 철수작전에 큰 지장을 초래하였다. 철수를 하여 북한군의 입장이 되어보기.

전투전 상황

북한군

본래 국군 제1사단을 상대하던 북한군은 제3, 제7경비여단이었지만, 6월 23일 기동훈련을 가장한 제1보병사단이 남천에 배치되었으며, 중공군 제166사단과 독립군 제4사단이 모태인 제6보병사단이 사리원으로 이동하였다.

한국군

1950년 4월 22일 제1사단장에 부임한 백선엽 대령은 작전지역을 돌아본 방어계획을 전면 수정하였다. 유사시 개성, 연백, 청단 등 주요 지구를 포기하는 이 계획은 총참모장 채병덕 소장의 승인을 받았다. 방어계획의 전면적 수정에 따른 재편성으로 제1사단은 6월 초까지 진지구축작업을 마치고 임진강 철교 폭파를 계획하였다.

제1사단은 중대 전술훈련을 마치고 대대 전술훈련을 하고 있었으며, 23일 비상경계가 해제된 장병들은 24일 육군본부의 명령으로 1/3이 휴가를 떠나고 남은 병력의 1/3은 외출 또는 외박 중이었다. 또한 보유차량의 대부분이 차량정비 계획에 따라 기지창으로 후송되었으며, 사단장은 6월 14일부터 보병학교 입교를 위해 자리를 비운터라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이 사단장 대행 중이었다. 추가적으로 용산의 육군회관 낙성식에 많은 고급지휘관들이 초대되어 전쟁 전 날 사단장대리 최경록 대령과 제13연대장 김익렬 대령 등 많은 장교들이 외출한 상태였다.

전투

6월 25일 04:00 북한의 포격이 시작되고 많은 병력과 전차들이 기습공격을 가했다. 경비부대가 분산하게 되자 제1사단장은 제13연대로 하여금 주진지를 점령하고 예비인 수색의 제11연대에게 임진강선에서의 방어를 준비시켰다.

제12연대장 전성호 대령은 개성의 방어를 위해 제3대대를 예성강 서쪽 연백에, 제2대대를 개성 북쪽에 배치하였다.

청단-연백 전투

예성강에서 청단 서쪽의 해안까지를 담당한 제12연대 제3대대의 대대장 이무중 소령은 좌측 청단-대흥리에 제11중대, 중앙 대흥리-포운리에 제10중대, 우측 포운리에서 예성강에 제9중대를 배치하여 적의 공격을 대비토록 하였다. 대대본부는 연안에 위치하였다.

04:30 제11중대 제3소대장 박규송 소위가 기관총 소리가 들리자 각 분대장에게 경계를 강화토록 지시하였다. 얼마 후 총성이 멎더니 확성기로 큰 소리가 들려왔다. 북한군은 의정부와 개성이 이미 점령당했고 너희들은 포위되었으니 손들고 투항하라고 헛소리 대남방송을 펼쳤다. 얼마 뒤 교전으로 큰 피해를 입은 제3소대는 07:30 중대본부로 철수하였다. 제3소대는 중대장 한보석 중위로부터 대대본부가 있는 연안으로 출동하라 명령을 받았지만 이동 과정에서 철수중인 화기소대를 만나 이미 연안이 점령되었다는 말을 듣고 방향을 돌려 중대와 합류해 용정리로 철수하였다.

제9중대의 경우 03:00 예성강에 보낸 정찰대로부터 북한군이 남하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으며, 04:30 제2소대로부터 적의 포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에 중대장 김두열 대위가 예비소대를 치악산 방면으로 파견했지만 이미 치악산을 선점한 북한군의 박격포 공격에 철수하였다.

날이 밝자 중대장은 백천서장으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는데 "인민군이 내려왔으니 다같이 항복합시다"였다. 그 말을 들은 중대장은 "개소리 그만하라 빨갱이 새끼야"라고 했다 카더라. 이후에 알게 되었지만 북한군이 백천경찰서를 점령하고 서장을 사칭해 건 전화였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제3대대 부대대장 박관영 소령은 제9중대에게 강화도로 철수하라 명령을 하달했다. 철수 과정에서 예상강 교량의 여부를 확인하지 않았다.

연안의 제3대대 본부와 제10중대는 적침보고에 따라 비상령을 하달하고, 연안서와 협조해 사이렌을 울려 영외 거주 장병, 외출 방병, 그리고 비번 근무중인 경찰까지 빠르게 소집하였다. 제10중대장 조기백 중위는 05:00 제1소대를 출동시켰지만, 전방의 207, 209고지를 선점하고 있던 제2, 제3소대는 이미 북한군의 포격과 공세로 인해 그곳을 넘겨주어야 했다.

제3대대장은 민관의 철수를 위해 비봉산을 장악하여 시간을 벌려고 하였지만 이미 북한군의 수중에 들은 후였다. 10:00 대대는 철수를 시작하였고, 13:00에 석포에 도착하여 어선으로 강화도로 철수하였다. 제11중대는 교동도로 철수하였으며 대대의 일부 병력은 인천으로 철수하였다.

개성 전투

제12연대 제2대대는 예성강 동안에서 제13연대가 있는 대원리까지의 지역을 서에서 동으로 제5, 제6, 제7중대 순서로 배치된 상태였다. 04:00 포성에 잠을 깬 대대장 한순화 소령은 작전장교에게 교전 중이라는 보고를 받았다. 대대장은 먼저 연대장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각 중대장에게 현 진지 고수명령을 내렸다. 이때 개성시내에서도 포탄이 낙하되어 시내가 혼란에 휩싸였다.

지역 내 주요 도로를 담당했던 제5중대는 1개 대대규모의 북한군에게 기습을 받아 분산되고 연락선이 차단되었다.

송악산에 배치된 제6중대는 집중 포화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 통신기기가 파괴되었으며 안개로 인한 시계제한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거기에 중대장이 백원담 중위가 사망하면서 중대는 와해되었다.

제7중대장 김영선 중위는 03:00 비둘기고지에서 총격전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고 현황을 살펴보았다.[2] 중대장이 돌아서려고 할 때, 북한군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중대장은 지휘를 위해 관측소로 향했지만 이미 북한군이 인공기를 꽂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에 중대장이 본부요원에게 철수를 준비시키고 대대본부에 보고하자 대대본부가 위치한 자남산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07:00 중대가 자남산에 이르자 북한군이 밀려들고 있었기에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송악산 지역 고수에 실패하고 철수중인 대대장과 일부 병력은 문산으로 이동중인 제5중대와 만났다. 대대장은 낙오병과 함께 연대본부로 이동했으나 이미 본부 방향에서 화염이 치솟고 있어 다시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예비대인 제1대대는 24일 오후부터 장병들의 외출 외박으로 일부만이 남고 거의 비어 있었는데, 25일 아침 연병장에 포탄이 떨어지자 연대장 전성호 대령이 제1대대의 잔여병력과 본부병력을 고남리에 배치하여 공격에 대비시켰다. 그러나 멀지 않아 연대장이 연대참모를 집합시켜 철수준비를 지시하고 불필요한 물자는 파기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참모들이 연대장에게 군인가족을 빨리 남하시키자고 하자 우리 가족이라도 살려요!! 연대장은 "개성시민 피난 대책도 없는데 군인가족이라고 부족한 차량을 주냐"라고 대노했다고 한다. 진정한 군인

연대장 전성호 대령의 과거를 소개하자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일본 제국군과 맞서 싸운 독립투사였고, 1945년 해방 때 귀국해 53세라는 나이에 소령으로 임관하였다. 군대 두 번 다녀오기. 이후 제18연대 부연대장을 거쳐 제12연대장으로 임관해 서부의 요충지인 개성의 경비를 맡았다. 국K-1들 보고있냐?

고남리 부근에서 제2대대의 철수병력과 만난 연대장은 제1, 제2대대장과 함께 사후대책을 논의하였고 개성시내에 있는 북한군을 역습하기로 결정했다. 제2대대장 한순화 소령이 제1중대와 특공대를 이끌고 10:00 개성시 남대문까지 전진하여 대열을 정비중인 북한군을 기습,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곧바로 북한군의 반격에 버티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이들은 17:00 영정포에 도착하여 어선으로 19:00 김포로 도하 퇴각하였다.

연대본부와 제1대대는 문산으로 후퇴하였다.

고랑포 전투

고랑포에서 대원리간의 경비임무를 맡은 제13연대 제3대대는 지휘소를 아곡동에 두고 제11중대를 좌측, 제10중대를 우측, 제9중대를 예비대로 두었다.

제11중대는 04:30 부터 전투를 시작하여 전방 소대들이 북한군 일부를 격퇴하고 이후 공격에 대비하였으나 이미 북한군의 주력은 대덕산 남쪽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전방 소대는 임진강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받고 장단을 우회해 오후에 임진강을 도하하였다.

동일한 시각 제10중대장 박형수 중위는 112고지의 제1소대장 장재만 중위에게 1개 중대가 진지에 올라오고 있다는 보고를 받았지만 이후 연락이 끊어졌다. 대대장 유재성 소령으로부터 고랑포를 사수하라는 명령을 받은 중대장은 제1소대를 지원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북한군 선두부대가 사격을 집중하자 방향을 틀어 임진강 남쪽의 59고지에 부대를 배치했다. 북한군이 임진강을 도하를 시도하자 우선적으로 이미 임진강 남쪽 53고지를 점령한 북한군에게 화력을 집중해 분산시킨 뒤 임진강을 사이에 두고 포격전을 벌였다. 06:00 중대의 포탄이 바닥나자 북한군이 자하리쪽으로 남하했다. 북한군이 대대본부까지 다다랐을 것이라 판단한 중대장은 석포로 철수를 명령했다.

대대장은 북한군을 지연시키면서 철수해 금곡리 부근에 집결하라는 지시를 받고 각 중대에 하달하려 했지만 이미 통신이 차단된 상태였다. 대대장은 전방중대가 여의치 않은 사태에 직면했다고 판단, 91고지와 무명고지를 점령해 아군의 철수를 엄호하기로 했다.

06:00 포탄이 숙영지 주위에 떨어지며 전차 7대가 남하하자 대대장은 제9, 제12중대의 중화기를 도로변에 배치시켰다. 장단경찰서의 경비주임 김기태 경위가 탑승한 차량을 파괴한 전차가 잠시 멈추자 바주카와 박격포 사격 명령을 내렸지만 파괴에 실패하고 오히려 역습을 당했다. 대대장은 제9중대 제1소대장 장두철 중위를 포함한 8명의 특공대를 선발하여 저지시키려 했지만 모두 전사하고 실패했다. 이어 화기중대의 김일하 병장 등 7명이 특공대를 자청해 전차의 측면에 수류탄을 투척했으나 실패하고 되돌아왔다.

대대장은 현 위치 사수가 불가능하자 남쪽 85고지로 철수시켰다. 17:00 제10중대와 합류하고 강을 건너 22:30 금곡리에 집결했다.

문산 전투

제11연대(연대장 최경록 대령)는 25일 11:00~15:00 사이에 문산으로 이동하였다. 당시 병력이 980명이던 제11연대는 임진강 철교 부근 마정리에 제1대대, 임진강 나루터 남쪽에 제2대대, 지휘소가 설치된 적전리에 제3대대를 배치하였다. 연대가 배치되는 동안 외출했던 장병들이 귀대, 1,500명으로 병력이 증가되었다.[3]

제12연대 일부가 철교를 통해 철수한 것을 확인한 최경록 대령은 사단장에게 철교 폭파를 건의하였고 실행하였지만 불발로 인해 실패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군이 임진강 철교를 폭파하리라 판단했던 북한군은 보유한 전차를 제11연대 방어선에 보내지 않았고, 이윽고 공격을 개시한 북한군 제15연대의 공격을 수차례 격퇴했다.[3]

파평산 전투

제1사단의 우익을 담당한 제13연대(연대장 김익렬 대령)는 제1, 제2대대를 파평산에 투입하여 방어선을 구축하였다. 1개 대대 규모의 북한군이 다가오자 격퇴시키는 활약을 하였으나 26일에는 북한군이 전차를 앞세워 공격하였다. 이에 국군은 2.36인치 바주카를 사용하였으나 한 대의 전차도 파괴하지 못했다.[3]

제1대대장 김진위 소령은 18명을 선발하여 대전차특공조를 편성하였다. 특공대원들이 81mm 박격포탄과 수류탄을 묶어 만든 폭탄을 안고 전차의 무한궤도 밑으로 뛰어들자[4] 전차들은 기동을 멈추고 정지하였는데 하필이면 예광탄에 전차 옆 초가집이 불타올랐으며 전차에 옮겨 붙은 것을 목격한 후속 전차대는 적성으로 되돌아갔다. 얼마 후 북한군 1개 연대가 제13연대를 공격하였으나 방어에 성공하였다.[3]

임진강 방어선 붕괴

26일 국군 제1사단은 증원병력과 함께 방어선을 강화하고 기회를 보아 반격할 준비를 하였으나 우편의 제7사단의 철수로 우익에서 북한군 제1사단의 협공을 받을 상황에 놓였다. 또한 임진강 철교 폭파 저지에 성공한 북한군 제6사단이 철교를 이용해 본격적으로 전차를 투입하기 시작하자 전차를 막을 방법이 없었던 국군 제11연대는 문산 남쪽으로 후퇴하였다.[3]

그러나 북한군이 진격을 멈추고 후속부대를 기다리자 제11연대는 역공을 가했으며 북한군을 임진강 북쪽으로 되돌리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우려한대로 제13연대가 북한군 제1사단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자 전선을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한 백선엽 대령은 철수명령을 내리게 된다.[3]

결과

국군 제1사단이 철수함에 따라 북한군 제6사단은 완벽히 노출된 김포반도를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사단은 질서정연하게 철수하여 사단 건제를 대부분 유지하는데 성공하여, 서울방면 사단 중에서는 제일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각주

  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방어작전』, p.172
  2. 비둘기고지는 북한군의 위치에서 200m 거리로 평소에도 서로 욕배틀 욕설을 주고받았다.
  3. 3.0 3.1 3.2 3.3 3.4 3.5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Gaeseong-Munsan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텍스트가 없습니다
  4. 일본 제국군이 실행한 자폭전술과 다를 바 없는 행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