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찬호 (187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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閔燦鎬, Chan ho, Min. 대한민국독립운동가. 2016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77년 10월 21일 황해도 평산도호부 신읍방 일리 여주동(현 황해북도 평산군 상암리 여주리마을)에서 아버지 민재창(閔載昌)과 어머니 이천 서씨 사이의 5형제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가정 환경과 성장 배경에 대해서는 특별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흥사단 이력서>에 따르면 1894년 배재학당에 입교했으며 배재학당 토론 단체인 협성회에 가입해 서재필의 지도를 받았다고 한다. 민찬호는 협성회에서 주로 회계 업무를 맡았고, 제6차 임원 때는 사무를 맡았다. 그는 협성회에서 주관한 근대 교육을 주제로 한 토론에 적극 참여하는 한편 신학 공부에 집중해 한성부 정동교회 엡윗청년회에서 활동했다.

1901년 한국 감리교 서울 전도사로 임명된 민찬호는 최병헌, 노병선 등과 함께 활동했으며, 1903년 최병헌 목사가 정동교회 제2대 목사로 부임하자 윤창렬과 함께 교회 시무를 도왔다. 그는 엡윗청년회의 인제국장으로 활동하면서 청년 교인들을 위한 야학 수업에 참여했다. 이후 1905년 8월 하와이 감리교 선도부에 의해 하와이 호놀룰루 한인감리교회 제2대 교역자로 부임했다. 그는 하와이에서 한인 교회와 교육 활동에 열성을 보였다. 이 사실은 현순의 <포와유람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포와한인교회보'는 피어손과 홍승하 양씨의 전력으로 1903년 11월에 등사관으로 1주 1차 씩 발간되었으며, 논설, 주일공과, 교회 소식, 본국 소식을 게재하여 곳곳의 교회에 발송하여 판매했다. 워드만씨가 감리사로 부임한 뒤에도 전과 같은 모양으로 등사판으로서 발간하다가 한글 활자를 구입하여 인쇄하여 발간하였는데, 오늘날 구독자가 5백명 이상이며 주필로 민찬호씨가 온 힘을 기울여 일하고 있다.

'포와한인교회보'는 하와이 36개 처의 한인 교회와 전도소에 배부되었다. 이 잡지의 총 책임은 와드맨 감리사였고, 민찬호는 기자 겸 사무장이었는데, 실질적인 총책임은 그가 맡았다. 그리고 그가 협성회 시절부터 품었던 근대 교육에 대한 생각은 '포와한인교회보'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는 한 사설에서 하와이 동포들이 돈을 모아 아이들 교육에 힘을 쓰면서 국가의 위기를 어떻게 구할 것임을 골몰하는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부모와 처자는 안중에 없고 아편엥 중독되어 사회 문제를 일으키는 한인들을 매섭게 비판했다. 한편 한인감리교회는 한인 자제들이 하와이에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도록 1906년 한인기숙학교를 설립했다. 이 학교의 초대 교장은 와드만 부인이었고 교감은 민찬호였다.

민찬호는 교감으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을 위한 다양한 시설을 만들었다. 서구 기술의 상징인 사진 연습소를 설치해 학생들에게 관람하게 하여 근대 문물에 대한 관심을 유도했으며, 영단어의 의미를 한자로 표기한 <한영신서(韓英新書)>를 출간했다. 한영신서의 특징은 영어 단어에 한자로 음과 뜻을 기재해 독학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장에서 외국인들과 교류가 필요한 성인들에게도 필요한 물건임을 알렸다. 민찬호가 이러한 사전을 만들었다는 것은 그가 한문 뿐 아니라 상당한 영어 실력을 지녔음을 알려주는 대목이다.

민찬호는 하와이 감리회에서 와드만 목사 바로 맡의 직책인 집사를 맡았으며, 보고서나 연회 프로그램에서 통역과 회계의 역할을 맡았다. 그가 예배를 주도했다는 기록은 확인 가능하지만 구체적인 설교에 대해서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다만 1909년 8월 <민씨 확론(確論)>이란 제목의 <신한민보> 기사에서 그의 설교 내용이 일부나마 담겨 있다.

본항미이미(감리교)교회 목사민찬호씨가 차등의 혹점을 간파하기 위하여 지난 수요일에 청년회에서 장시간 연설을 하였다는데, 그 개의는 ‘우리가 금일 한국의 국민이 되어서 교회와 사회의 문제를 깊이 연구할 바이로다. 폐일언하고하나님의 진리를 주장하며 대체를 잡아 행하면 가히 의혹할 일이 없을지니 마셔가 영혼을 구하면서 어찌 하여 애급에 재앙을 내려 다수한 인명을 살육 하였나뇨 만일 천국을 오해하고 조국과 동포의 윤망을 냉시하면 이는 진정한교인이 아니니 반드시 영혼의 희망이 없으리라’하였다니 민씨의 정확한의논을깊이 패복하노라.

민찬호는 이 연설에서 "금일 한국 국민이 해야 할 바는 교회와 사회의 문제를 연구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것은 당시 하와이 한인 사회와 교회와의 관계성을 의식한 발언으로 보인다. 나아가 애굽(이집트)에 내린 재앙을 예로 들어 조국과 동포의 운명을 냉담하게 여기면 진정한 교인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모세가 민족을 이끌어 혹독한 이집트를 떠나 가나안으로 떠난다는 '출애굽기' 내용을 토대로 하와이 교민들에게 조국의 고통받는 동포들을 잊지 말 것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민찬호는 신홍균과 함께 하와이 각 교회 간의 상호 협조를 위해 통공회(通公會)를 조직했다. 이 단체는 하와이 각 교회 간 화합을 추진한다는 목표를 내세웠으며, 통공회 중앙회의의 장소는 한인감리교 회당으로 정해졌다. 통공회의 규례는 각 교회당의 평등을 추구했으며, 6항은 '각 교회가 실시할 계약의 구체적인 사항'으로 정리되었다. 이 항에는‘각교회 간보수공사문제’, '만약 교회간에 분쟁이 생겼을 때의 해결 문제', '통상회와 월례회를 나눠 개최하여 협력을 도모할 문제' 등 예상 분쟁에 대해 구체적으로 명시했다.

민찬호는 이후에도 하와이 지역을 순회하며 각종 자선사업을 추진했다. 하와이 농장주들에게 한인 처우 개선을 요구했고 멕시코 동포를 위한 구제 사업에도 참여했다. 하와이 교민들은 그런 그를 매우 신뢰했고, 그가 학업을 위해 하와이를 떠나려 하자 3번이나 만류해 그만두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미주 본토에서 신학을 좀더 연구하고 싶었던 그는 끝내 주민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로스앤젤레스로 향했다.

1907년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민찬호는 로스앤젤레스 교회에 자리를 잡고 업무를 시작했다. 그는 월연금을 갇어서 교회 확장을 추진하고 떠나간 교인들을 모으는 데 힘을 쏟았다. 이때 그는 멕시코에서 발생한 한인 이주 문제에 대해서도 주시했다. 그는 신한민보에 미주의 한인들이 하와이의 한인들과 달리 멕시코 한인 지원에 인색하는 것을 비판하는 사설을 싣고, 황금을 모아 고국으로 돌아가겠다는 이른바 금의환향의 꿈을 가지고 있는 이들을 비판했다. 그는 모세가 행했던 유대인 구원에 빗대어 미주는 멕시코를 잊지 말고 더 나아가 조국의 학대받는 이천만의 동포를 잊지 말 것을 당부했다. 또한 하와이는 미주 본토의 사정을 알지 못하고 미주 본토는 하와이를 알지 못하니 서로 협조하며 교류할 것을 강조했다.

민찬호는 1909년 2월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북미의 공립협회가 통합해 대한인 국민회를 결성할 때 관여했고, 흥사단에 가입해 단원으로서 활동했고, 1912년 9월부터 국민회 중앙총회 학무원으로 임명되어 교육 관련 업무를 담당했다. 이후 클레몬트 학생양성소 감독을 맡은 그는 기존 양성소 학기가 끝나는 여름에 다뉴바로 가서 장로교회 소속인 스튜어트 부인과 친목을 다지고 한인 동포들로부터 양성소 운영을 위한 후원금을 모았다. 그는 양성소 운영의 중요성을 한인 사회에 알리기 위해 노력했으며 양성소의 규모를 확대시키고자 사력을 다했다.

이후 하계 방학 때 유년하기강습소를 개최한 그는 흥사단에 소속된 인사들을 끌여들어 한인 자녀들에게 국어를 교육시키게 했다. 또한 1918년 11월 30일 시카고에서 정한경과 함께 제2차 소약소국 동맹회의에 참석해 조선 독립을 꾀할 방안을 모색했다. 얼마 후 하와이에서 국민회와 심한 갈등을 빛고 탈퇴한 뒤 독자적으로 한인기독교회를 창설한 이승만이 도와줄 것을 요청하자, 민찬호는 이를 수락하고 하와이로 가서 한인기독교회 및 한인기독학원을 관리했다. 또한 그는 하와이 교민단의 단장을 맡아 하와이 한인들로부터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1921년 7월 21일, 이승만은 독자적 지지단체인 동지회(同志會)를 창설해 하와이에서의 영향력을 굳히려고 노력했다. 이때 기존 한인기독학원 부지 계약이 1923년으로 종료되게 되자, 한인기독학원은 새로운 부지를 찾아야 했고 자연히 자금 마련이 최우선 과제로 떠올랐다. 민찬호는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1923년 6월 20일 김노디, 김영우와 학생 20명으로 구성된 방문단을 이끌고 경성으로 찾아갔다. 그들은 이후 9월 2일까지 한국의 30개 이상의 도시와 남만주까지 순회하며 모금 활동을 전개했다. 방문단은 서울에서 머무는 열흘 동안 야구 경기 4회, 배구경기 1회, 음악회 2회의 행사를 개최했고, 전국을 순회하며 모든 행사를 소화했다.

방문단 인솔을 마치고 하와이로 돌아온 민찬호는 <한인기독교보>에 편집을 맡았다. 그는 1924년 5월 한인기독교보에 성장한 한인 젊은이들이 미국의 웅변, 스포츠 대회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등 훌륭하게 적응하며 한인의 자존심을 빛내준 것을 칭찬했다. 하지만 그는 곧 비판에 직면했다. 당시 일제는 3.1 운동의 영향력을 최소화화기 위해 문화 통치를 실시하면서 '자치'를 선전하고 있었다. 이런 때에 민찬호가 모국 방문단을 조직해 한국을 방문하자, 호놀룰루 일본 총영사는 "미포 방면 한인의 배일 사상이 점차 쇠퇴하는 기쁜 현상"이라고 자평했다. 또 다른 보고서에는 '교민단은 일본 영사에게 자금을 얻어 국민보에 등재했고, 민찬호는 국민보 확장을 위해 일본 영사를 방문했다.'고 기술했다. 하와이 내 이승만 반대 세력은 이것을 빌미로 민찬호가 한국에 가서 자금을 받아내기 위해 일제에게 아부했다며 비난을 퍼부었다.

심지어 동지회 내부에서 이창규, 신형호 등 이승만을 적극 지지하는 인사들이 민찬호를 의심하는 서한을 서로 교환했다. 그들은 민찬호가 동지회 내에 흥사단의 씨앗을 심은 인물로 평가했으며, 이들을 제거하지 않으면 동지회가 안창호의 영향력 하에 놓이고 말 것이라고 여겼다. 이렇듯 내외에서 압박을 받던 민찬호는 1929년 초 결정적으로 이승만과 갈라졌다. 당시 동지회와 한인기독교회의 재정난을 극복하기 위해 경비 절감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이때 동지회는 사전 상의 없이 민찬호의 봉급 중 50달러를 삭감해 버렸다. 이에 민찬호는 자신이 심한 모욕을 당했다고 여기고 4월 18일에 가지고 있던 직함을 모두 내려놓았다. 이후 그는 이승만과의 협력 관계를 단절하고 독자적으로 민족운동을 전개한다.

민찬호는 동지회를 떠난 뒤 맥킨리 관립 중학교에서 국어교사를 맡아 80여 명의 학생들을 가르쳤고, 1930년에는 하와이 한인협회의 발기인 중 한명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1931년에는 최창덕, 홍치범 등과 함께 하와이 내의 교회 분쟁을 종식시키고자 노력했다. 이후 그는 한인상조회에 참여해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을 위한 재정을 모금하고 위문했으며, 조미구락부에도 참여해 미국에서 학위를 딴 2세대 청년들과 1세대 한인들과의 친목을 도모하는 데 주력했다. 1938년 12월 2일 호놀룰루에서 중한민중동맹단이 결성되자 이사회의 이사장과 단장이 되어 한길수의 외교 활동을 적극 후원했다.

이후 한동안 활동이 잠잠했던 그는 1940년대에 David D. Barnett 미군 장교가 쓴 <한국 정당 인물 분석>이란 보고서에서 등장한다. 바넷은 보고서에서 민찬호가 조경천, 차신호, 현순 등과 함께 하와이 군도 세력을 이끌고 그 반대편엔 이승만이 있다고 판단했다. 한편 민찬호는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지부에도 참여했다. 다만 그는 조선민족혁명당 미주지부가 한길수의 독주로 치달으면서 이승만의 국민회와 갈등을 심하게 빚으며 분열을 초래하는 것을 보고 한길수에게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냈다.

우리는 잘 조직된 이사회 하나를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귀하가 단독으로 일하시는 것은 국민회와도 싸우게 될 것이며, 하와이에 전쟁이 또다시 일어날 지도 모릅니다. 그런 것은 귀하의 임무에 이득이 되지 않습니다.

이에 한길수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보내주신 편지 잘 받았습니다. 하지만 리박사님과의 병합은 불합리하고 비실용적입니다. 그는 우리가 보유하고 있는 그러한 정보를 얻을 만한 의지도 능력도 없습니다. 그의 나이와 품위가 그러한 일을 하게끔 허락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이승만 박사는 우리의 협조 청원을 계속해서 거절하고 있습니다. 김호 의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미국 국방을 효과적으로 원조하려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이는 단지 이기적인 이유로 인해 미국 관리와 한국 대중을 호도하기 위한 겉이쳬이며 체면을 차리는 것입니다.

민찬호는 이에 다음과 같이 답신했다.

편견 없이 최선을 다해 주십시오. 제가 어제 150달러를 보냈고 가능한 더 빨리 보내겠습니다. 귀하의 실력으로 전진해 나아가십시요. 하지만 이승만 박사의 반감을 사진 마십시오. 한국은 일본의 전쟁에 대항하여 미국과 하나가 되었습니다. 중국과 한국의 수백만명과 함께 맞서게 될 것입니다.

이후 민찬호는 1943년 7월 16일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총지부 위원장에 선임되어 조선민족혁명당을 지원했다. 8.15 광복 후에는 하와이에서 목회 활동에 전념하다 1951년 후말루히아 요양병원에 입원했고 1954년 2월 5일에 노환으로 별세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6년 민찬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