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1941년 12월 7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약 4년여간 태평양 전역을 중심으로 미국일본이 주축이 되어 벌인 전쟁. 중일전쟁의 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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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7일 (일) 21:05 판

1941년 12월 7일부터 1945년 8월 15일까지 약 4년여간 태평양 전역을 중심으로 미국일본이 주축이 되어 벌인 전쟁. 중일전쟁의 연장선상에 놓인 전쟁이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의 범주에 속하는 전쟁이다.

배경

미국과 일본의 충돌 가능성은 20세기 초부터 꾸준히 제기되던 것이었다. 태평양에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던 열강은 미국과 일본뿐이었는데, 미국은 필리핀을 발판으로 서태평양에서의 세력 확대를 꾀하며 태평양상에서의 우위를 보장받고자 했고, 일본은 서태평양과 중국에 대한 전체적인 우위를 주장하며 이에 맞섰다.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양국이 각각 필리핀과 한국의 지배를 인정하는 것으로 타협을 보긴 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종료 후 일본이 독일의 중국, 태평양상의 이권과 식민지를 대부분 획득하고 미일 양국이 대규모 건함에 들어가면서 양국간에 태평양 패권을 두고 언제 전쟁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말이 1920년대부터 이미 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양국 지도부는 서로간에 전쟁은 피해야 한다는 명백한 인식을 갖고 있었고, 건함파를 억누르고 워싱턴 해군 군축 조약을 체결하며 충돌 가능성을 크게 낮췄다. 그러던 것이 30년대 초, 일본이 급격하게 군국주의에 기울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괴뢰국인 만주국을 세우고 중국 동북지역을 지배했으며, 상해사변을 연달아 일으켜 중국 침략의 기회를 엿보았으며 국제사회가 이를 규탄하자 워싱턴 군축 조약 및 런던 군축 조약을 파기하고 국제연맹을 탈퇴하였으며 최종적으로 1937년 노구교 사건을 핑계로 중국을 전면 침공,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일본이 미국과 전쟁을 각오한 것은 아니었다. 의외로 1937~38년 당시 일본 군부는 미국과 전쟁을 회피하고자 했는데 파나이 호 사건처럼 일을 저질러놓고도 뒤늦게나마 사과하며 저자세로 나오는 등 미국의 눈치를 봤다. 이는 중국이 조기에 항복할테니 그때까지만 참자는 근거없는 자신감에, 전쟁수행을 위한 전략물자 상당수를 미국에서 수입하고 있다는 현실적 문제가 동시에 작용했다.

그러나 중국에 대한 일본의 거듭된 침략과 만행을 용납할 수 없었던 미국은 일본에 대해 계속 압력을 가했고, 일본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침략을 계속했으며 독일, 이탈리아와 추축동맹을 체결한 후 1940년, 유럽열강이 전쟁으로 정신없는 틈을 타 비시 프랑스를 협박하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 일본군을 주둔시켰고, 네덜란드에게도 네덜란드령 동인도제도의 자원을 일본에게 내놓으라는 강짜를 부리기 시작했다. 중일전쟁이 장기화되면서 전략자원의 수급이 힘들어지자 이를 수급하고, 동시에 유럽열강의 공백이 생긴 동남아시아를 일본의 새 팽창대상으로 삼고자 했다.

이러한 일본의 팽창야욕에 미국은 ABCD 포위망[1]을 형성, 일본에 대한 전면적인 무역봉쇄에 돌입했다. 그 핵심은 석유였다. 석유의 대부분을 미국으로부터의 수입에 의존하고 있던 일본은 당장 석유 부족에 직면했다. 석유의 부족은 곧 전쟁수행 불가와 산업기반 붕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포위망에 가담하지 않은 국가중에는 소련이 있었으나 소련 역시 할힌골 전투로 일본과 우호관계라 보기 힘들었으며, 소련 석유 대부분은 머나먼 바쿠에서 산출되고 있어 일본에 공급할 수 없었으며, 그나마 1941년 6월 독소전쟁이 발발하면서 소련이 전략자원을 수출해줄 가능성은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팽창주의 군부와 군부가 차지한 내각은 전쟁을 멈출 생각이 전혀 없었고, 오히려 포위망을 해체시키기 위해 미국과의 전쟁을 불사한다는 강경모드로 나서게 된다.

그 과정에서 미국과 일본 모두 전쟁을 피하려고 외교접촉에 나섰으나 모두 무위로 돌아갔다. 미국은 만주국의 승인을 조건으로 대신 중국과 인도차이나에서의 침략행위 중단과 군의 전면적인 철수를 요구했으나, 일본은 이를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으로 보며 거부하고 오히려 필리핀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며 대립은 커져만 갔다.

결국 일본은 미국을 공격하여 전열에서 이탈시키고 동남아시아를 정복하여 세력권에 편입시킨다는, 후대가 보기에 실로 황당무계한 목표를 세우며 미국과의 결전에 나섰다.

전개

1941년 : 선전포고없는 공격

어제, 1941년 12월 7일은 치욕의 날로 기억될 것입니다.
— 1941년 12월 8일,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 일본 선전포고 요청 의회연설중

1941년 12월 7일 8시경(일본 시각으로는 12월 8일), 일본 제국해군 연합함대 소속 항공모함 6척에서 발진한 300여 기의 항공기들이 하와이의 진주만 하늘을 뒤덮은 뒤 대대적인 폭격에 나섰다. 미국 정부에 선전포고가 채 전달되기도 전에 이루어진 진주만 공습으로 미국 태평양함대는 보유한 전함을 모두 잃으며 반신불수가 되었다.

동시에 일본은 홍콩, 말레이 반도, , 웨이크 섬, 필리핀 등지에 동시다발적인 총공격을 개시했다. 괌은 공격 하루만에 점령되었고, 홍콩과 웨이크 섬은 격렬히 저항했으나 해를 넘기지 못하고 떨어졌다. 영국 해군 동양함대는 말레이 해전으로 전함 프린스 오브 웨일스와 리펄스를 잃으며 패퇴했고, 순식간에 서태평양의 제해권을 일본군이 장악하게 된다.

선전포고없는 공격에 미국 전역은 일제히 격분, 12월 8일 하원은 만장일치로, 상원은 반대 1표로 대일 선전포고안을 통과시키며 총력전 태세에 돌입했다.

한편, 독일이탈리아는 일본과 미국이 전쟁에 돌입했다는 소식을 듣고 추축동맹이라며 미국에 선전포고한다. 하지만 일본은 독일과 달리 소련과 중립을 유지, 1945년 8월 9일까지 소련과 충돌하지 않았다.

1942년 : 미드웨이, 과달카날. 일본의 운은 다하다.

42년 초 일본군은 남방작전으로 순식간에 동남아시아를 석권했다. 태국은 일본의 동맹국으로 참전했고, 일본군은 영국령 말레이 반도와 싱가포르, 버마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제도를 석권하고, 필리핀 바탄 반도에서 격렬하게 저항하던 웨인라이트 중장의 미군으로부터 끝내 항복을 받아냈다. 더글러스 맥아더 대장은 루즈벨트의 탈출 명령을 받고 항복 직전 탈출하여 호주로 이동했다.

일본 해군은 호주 북부의 포트 다윈을 폭격하고, 뒤이어 인도양으로 진출하여 인도양 해운을 마비시키고 실론 해전에서 승리를 거두어 인도양 방면에서 영국군의 위협을 제거했다. 뒤이어 남방의 방어선을 확고히 하고 호주 공격을 위해 뉴기니 섬 남해안의 포트 모르즈비를 공략하려 했으나 산호 해 해전으로 저지되었다.

그러는 동안 미군은 둘리틀 특공대를 동원, 일본 본토를 폭격하며 전의를 되새겼다. 본토가 폭격받자 당황한 일본은 미국 해군 항공모함 세력을 섬멸한다는 목표로 미드웨이 제도를 공략하기로 결정, 항공모함 4척을 동원한 대대적인 침공을 감행했다. 그러나 미군은 가용 가능한 모든 전력을 총동원해 반격에 나섰고, 일본은 동원항모 4척을 모조리 잃고 미군에게는 어떠한 피해도 주지 못하는 참담한 패전을 겪으니, 이것이 태평양 전쟁의 전환점 미드웨이 해전이다.

미드웨이 해전 패배 이후 일본은 호주와 미국간의 해상수송로를 차단하기 위한 목적으로 과달카날 섬에 비행장을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미군이 즉시 섬에 상륙하여 비행장을 탈취했고, 이후 1943년 초까지 이어지는 과달카날 전투가 계속된다. 이 기나긴 전투에서 미군은 일본에 막대한 소모를 강요하며 최종적으로 승리, 전세를 뒤집고 마침내 대반격을 시작한다.

1943년 : 태평양을 가로지르며

1944년 : 열도의 턱밑까지 올라오다

1945년 : 일본제국의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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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미국(America), 영국(Britain), 중국(China), 네덜란드(Dutch)의 약자를 딴 것이다. 신나게 쳐맞고 있던 중국을 빼고 오스트레일리아(Australia)를 넣어 ABDA 포위망이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