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문산-봉일천 전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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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계획의 전면적 수정에 따른 재편성으로 인해 국군 제1사단의 훈련은 다른 사단에 비해 뒤떨어진 상태였다. 제11, 제12연대는 겨우 대대전술훈련을 시작한 상태였고 제13연대는 2개 대대가 전술훈련의 마지막 단계에 있었으며 제1대대는 야외훈련 중이었다.<ref name=Gaeseong-Munsan></ref>
방어계획의 전면적 수정에 따른 재편성으로 인해 국군 제1사단의 훈련은 다른 사단에 비해 뒤떨어진 상태였다. 제11, 제12연대는 겨우 대대전술훈련을 시작한 상태였고 제13연대는 2개 대대가 전술훈련의 마지막 단계에 있었으며 제1대대는 야외훈련 중이었다.<ref name=Gaeseong-Munsan></ref>


북한의 공격징후가 포착되지 않아 제1사단의 장병들은 해이해진 상태였으며, 이런 이유로 6월 24일 약 1/3의 병력이 휴가나 외출을 실시, 총병력의 57%가 자리를 비웠다. 보유차량과 중화기는 육군본부의 계획에 따라 후송되었으며 백선엽 사단장의 경우 고급지휘관 과정에 입교중이라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이 사단장 대리로 있었다.<ref name=Gaeseong-Munsan></ref>
북한의 공격징후가 포착되지 않아 제1사단의 장병들은 해이해진 상태였으며, 이런 이유로 6월 24일 총병력의 57%가 휴가나 외출을 실시하였다. 보유차량과 중화기는 육군본부의 계획에 따라 후송되었으며 백선엽 사단장의 경우 고급지휘관 과정에 입교중이라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이 사단장 대리로 있었다.<ref name=Gaeseong-Munsan></ref>


==북한군의 기습==
==북한군의 기습==

2015년 7월 24일 (금) 16:38 판

틀:학술

본 문서는 『6.25전쟁사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 방어작전』 을 기반으로 작성되었음을 알립니다
— ISSN 1739-2705
{{{전쟁이름}}}
Battle of Gaeseong-Munsan.jpg
군사 충돌 정보
날짜 1950년 6월 25일 ~ 26일
결과 북한의 승리
교전단체
{{{단체1}}} {{{단체2}}}
최광 소장
방호산 소장
백선엽 대령
병력:
약 2만 1000명
122mm 유탄포 24문
76mm 유탄포 72문
45mm 대전차포 168문
T-34 40대
자주포 32문[1]

개요

개성-문산지구 전투는 청단, 연백, 개성, 고랑포 일대에서 국군 제1사단이 북한군 제1, 제6사단과 맞서 싸운 전투이다.[2]

전투전 상황

방어계획의 전면적 수정에 따른 재편성으로 인해 국군 제1사단의 훈련은 다른 사단에 비해 뒤떨어진 상태였다. 제11, 제12연대는 겨우 대대전술훈련을 시작한 상태였고 제13연대는 2개 대대가 전술훈련의 마지막 단계에 있었으며 제1대대는 야외훈련 중이었다.[2]

북한의 공격징후가 포착되지 않아 제1사단의 장병들은 해이해진 상태였으며, 이런 이유로 6월 24일 총병력의 57%가 휴가나 외출을 실시하였다. 보유차량과 중화기는 육군본부의 계획에 따라 후송되었으며 백선엽 사단장의 경우 고급지휘관 과정에 입교중이라 제11연대장 최경록 대령이 사단장 대리로 있었다.[2]

북한군의 기습

청단-연백 전투

6월 25일 개성과 연백, 고량포 지역으로 북한군의 기습 포격으로 시작되었다. 북한군의 기습포격으로 인해 국군의 경계부대는 저항하지 못하고 분산되었다. 이에 사단장 백선엽은 즉시 13연대에게 주진지를 점령하게 하였고, 예비인 수색의 11연대를 임진강변에 투입하여 임진강선에서의 결전을 준비하였다.

12연대 3대대(이무중 소령) 11중대(한보석 중위) 좌일선에 배치하고, 10중대(조기백 중위)는 중앙에, 9중대(김두열 대위)는 우일선에 배치하여 적의 공격을 대비하도록 하고 있었다.

6월 25일 새벽 04:30 11중대 3소대장 박규송 소위가 적의 기관총 소리에 일어나 즉각 각 분대장에게 전방경계를 강화토록 지시하였다. 얼마 후 총성소리가 멎어지고 확성기로 큰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북한군의 선전방송이었다.

축약하자면 "개성과 의정부는 떨어졌고, 니들도 포위됐으니 손들고 투항해라"였다.

그러나 3소대장은 가볍게 씹고 적과 교전을 하였으나 숫자가 부족하여 큰 피해를 입고 07:30 중대본부로 철수하였다. 철수한 이후 11중대장은 3소대에게 다시 병력을 수습하여 대대본부가 있는 연안으로 출동하라 명령했고, 그 명령에 연안으로 가던 중 3소대는 화기소대와 만나게 되었다. 화기소대는 비봉산의 적으로부터 엄청난 총탄세례를 맞아 철수하던 중이었다. 이에 3소대도 화기소대와 함께 중대 본부로 복귀하였다.

11중대는 병력을 수습한 다음 용정리로 철수하였다.

10중대는 전방의 207, 209 고지를 선점하고 있었지만 북한군의 포격과 막대한 병력의 공세로 인해 그곳을 넘겨주어야 했다.

9중대의 경우 25일 03:00 예성강에 보낸 정찰대를 통하여 대규모 차량을 확인하였고, 04:30 제2소대로부터 적의 포격을 받고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이에 9중대는 예비소대를 치악산 방면으로 파견했지만 치악산을 선점한 북한군의 공세에 철수하였다.

날이 밝을무렵 9중대장은 한 통의 전화를 받는데 내용을 축약하자면 "이미 국군은 졌고 인민군이 이겼으니 항복하자"였다. 그 말을 들은 9중대장은 개소리 그만하라 빨갱이야 했다고 카더라

상황이 이렇게 되어가자 3대대 부대대장 박관영 소령은 9중대를 강화도로 철수하라 명령을 하달했다.

연안의 3대대 본부와 10중대는 이날 새벽 적침보고에 따라 비상령을 하달하고, 연안서와 협조 사이렌을 울려 영외 거주 장병, 외출 방병, 그리고 비번 근무중인 경찰까지 빠른 시간 내에 소집할 수 있게 되었다. 병력을 수습한 이후 10중대 1소대와 화기소대가 05:00 전방으로 출동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전방에 도착하였을 때 이미 2소대와 3소대는 와해된 상태였다.

3대대장은 민관의 철수를 위해 비봉산을 장악하여 시간을 벌려고 하였지만 북한군에 의해 이미 비봉산이 점령된 상태였다. 이에 10:00 대대는 철수하게 되었다. 대대는 13:00 석포에 도착하여 어선으로 강화도로 철수하였다. 11중대는 교동도로 철수하여 이후 인천으로 철수하였다.

개성전투

12연대(전성호 대령) 2대대가 개성을 담당하고 있었고, 3대대는 예비로 대기하고 있었다.

2대대장(한순화 소령)은 6월 25일 새벽 4시 포성 소리에 잠을 깼다. 이후 작전장교로부터 "04:00부터 적이 포격과 함께 공격중"이라는 보고를 받는다. 대대장은 우선 예비 중대에게 출동명령을 내리고 상황실로 나갔다.

대대장은 먼저 연대장에게 상황을 보고하고, 각 중대장에게 현 진지 고수명령을 내린다. 이때 개성시내에서도 적 포탄이 낙하되어 시내는 온통 혼란에 휩싸였다.

송악산에 배치된 제6중대(백원담 중위)는 04:00 적의 집중 포화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고, 통신기기가 파괴되어 통신두절되었다. 거기에 안개로 인한 시계제한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거기에 중대장이 적탄에 사망하면서 중대는 와해되었다.

대대 우측을 방어하던 7중대장 김영선 중위는 03:00 비둘기고지의 소대로부터 적과의 총격전이 있었다는 보고를 받고 비둘기 고지로 가 현황을 살피고 돌아서려고 할 때, 북한의 포격이 시작되었다. 중대장은 중대 지휘를 위해 중대 관측소로 향했지만 그곳은 이미 북한군에게 점령된 상태였다. 이에 중대장은 본부요원들에게 철수를 명령하고 대대에 보고하였다. 이에 대대에서는 자남산으로 철수하라는 명령을 하달하였고, 이 명령에 따라 중대는 자남산으로 철수하였다.

이 와중에 7중대 1소대는 적의 기습에 고립되었고, 안개가 걷힌 다음에 고립된 것을 파악하여 필사의 노력으로 남으로 탈출하였다.

7중대장이 이미 자남산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이미 북한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다.

5중대장은 문산으로 가는 도로변에서 철수중인 대대장과 일부 병력을 만났다. 이 병력은 연대장 전성호 대령의 지시에 따라 송악산을 고수하기 위해 분전하였지만 이미 적에게 점령된 고지를 탈환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대대장은 와해된 병력을 수습하고 있었고 그 와중에 5중대와 접선하게 된 것이다.

2대대장이 연대본부에 도착했을 때, 이미 본부 쪽에 화염이 하늘로 치솟아 오르고 있어, 다시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한편 12연대 1대대(신현홍 소령)는 24일 오후부터 장병들의 외출 외박으로 인해 일부 잔류인원만 남았을 뿐 거의 텅 비어있었다. 25일 아침 연대 연병장에 포탄이 떨어지자 전성호 대령은 즉각 1대대의 잔여병력과 본부병력을 고남리에 배치하여 적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그러나 이미 적의 공세에 개성시가 위협을 받게 되었고 전성호 대령은 이에 연대본부를 문산으로 철수하기로 결심하였다. 이에 연대참모들을 모두 불러 철수준비를 지시하고 차량부족으로 인해 불필요한 물자는 파기하라고 명령하였다. 이때 참모들이 연대장에게 "군인가족을 빨리 남하시켜야겠다"우리 가족이라도 살려요!!고 말을 하자, 연대장은

"개성시민 피난 대책도 없는데 무슨 군인가족이라고 부족한 차량을 주냐!!!"하고 대노했다고 한다. 진정한 군인

간단히 연대장 전성호 대령에 대해 설명하자면, 과거 중국군에 복무하면서 일본군과 맞써 싸운 독립투사였고 1945년 해방시 귀국하여 53세라는 나이에 소령으로 임관하여 18연대 부연대장을 거쳐 12연대장으로 임관하였다.

이후 퇴각 도중에 연대장은 2대대장, 1대대장을 고남리 부근에서 만나게 되었다. 연대장은 여기서 대대장들과 사후를 논의했는데, 연대장은 개성을 기습 탈환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한순화 소령이 특공대를 통합 지휘하여 10시 개성시 남대문까지 전진하였다.

마침 북한군은 개성시를 쉽게 점령한 것에 방관하고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고, 이에 특공대가 일제사격을 가해 북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그러나 곧바로 북한군의 반격에 버티지 못하고 철수하게 되었다. 특공대는 17:00 영정포에 도착하여 어선으로 19:00 김포로 도하 퇴각하였다.

고량포 전투

임진강 방어선 구축

봉일천 전투

철수 작전

1사단은 전쟁이 터지자 마자 방어하기 어려운 개성을 즉각적으로 포기하고 임진강 이남 문산으로 부대를 이동 임진강을 방패로 삼아 적의 진군을 막아냈다. 1사단은 북한군 6사단을 효과적으로 저지하여 전선을 고착화시켰고, 북한군이 서울 서북부로 진입하는 것을 방어해냈다. 하지만 7사단이 붕괴되어 전선이 붕괴되어 어쩔 수 없이 철수하게 되었다.

철수과정에서 한강교가 조기 폭파당해 한강교를 통한 철수가 불가능하게 되었고, 이에 백선엽은 한강을 도하하라 명령하였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중화기를 운송할 수 없게 되었고, 대부분의 중화기들을 파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1사단은 질서정연하게 철수하여 사단 건제를 대부분 유지하는데 성공하여, 서울방면 사단 중에서는 제일 나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각주

  1.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 전쟁사:2권 북한의 전면남침과 초기방어작전』, p.172
  2. 2.0 2.1 2.2 전쟁기념관 개성-문산지구 전투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