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신

현덕신.jpg

玄德信.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의사. 2020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운동가이자 동아일보 기자인 최원순의 아내이다.

1 생애[편집]

1896년 1월 12일 황해도 해주군에서 연주 현씨 현종국과 김유순의 1남 2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현덕신이 보통학교를 졸업할 무렵 온 가족이 평안남도 평양부 대찰리 28번지로 이주했다. 부친 현종국은 선교사였으나 일찍 죽었고, 친오빠 현석칠이 가장으로서 그녀를 돌봤다. 현석칠은 3·1 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 4월 1일 충남 골주 영명학교에서 만세시위를 모의한 혐의로 체포되어 도초를 겪은 독립운동가이며, 평양 남산교회와 평양 유정교회 목사로 재임하기도 했다. 현덕신은 이러한 오빠에게서 개화 사상과 민족의식을 전수받았다.

1911년 이화학당에 입학한 현덕신은 1915년 12명 중 1명으로 이화학당 중등과를 제8회로 졸업했다. 이후 평양에 있는 사립 진명여학교 교사로 부임하여 2년강 교사로 재직하다가 1917년 사직하고 1918년 일존으로 유학을 떠났다. 이후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의학을 공부하다가 1919년 초 김마리아를 통해 독립 선언 발표를 준비하던 조선청년독립단에게 독립자금 40원을 전달했다. 1919년 2월 8일 동경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2·8 독립 선언이 발표되었을 때 김마리아, 황신덕과 함께 했다. 이 일로 인해 일제 경찰에게 검속되어 며칠 동안 구류된 후 풀려났다.

1920년 1월 도쿄노동동지회가 개편된 조직인 조선고학생동우회에 가담했으며, 1920년 3월 1일 도쿄 히비야공원에서 3·1 운동 1주년을 기념하는 대회가 열렸을 때 최승만, 박승철 등과 함께 태극기를 뿌리며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다시 검속되어 조사받았다. 이후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백관수와 함께 일본 경시청의 '갑급' 요시찰 대상이 되어 형사들의 감시를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개의치 않고 유영준과 함께 조선여자친목회의 총무를 맡으면서 손정규, 황신덕, 성의경과 함께 조선여자의 교육보급을 도모하고 지식을 함양할 목적으로 여자흥학회를 조직하였고, 여자흥학회 부회장으로서 기관지 <여자계>를 발행하였다.

현덕신은 여자계에서 "1919년의 수호가 과연 무엇인가. 광명일가 진리일가 평화일가, 활발한 긔운인가"라고 질문한 뒤, "혁혁한 일광은 능히 일만 미균을 근절할 수 잇고, 천래의 비는 일만 수육을 양육할 수 잇으니, 새로이 암흑을 탈출하자"라고 주장했다. 그녀는 여다계 편집부원으로서 발간까지 책임졌고, 1920년 3월 29일 조선여자 종교심 향상과 단결을 확고히 할 목적으로 여자청년회를 조직했다. 또한 김마리아, 황애시덕, 송복신, 정자영 등과 함께 동경여자유학생회를 조직하여 유학생간의 친목을 도모하고 배일사상을 고취했다.

1921년 11월 4일 태평양회의 대 조선독립운동 계획을 위해 조선청년기독회관에서 학우회의 계획을 수맂하응 임시총회가 열렸을 때, 현덕신은 조선청년독립단 대표 이동재, 김송은, 방건성과 함께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채택했다. 그해 11월 22일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였고, 귀국 후 서울 죽첨정 부인성서학원에 머무르며 2, 3년 동안 총독부 의원에서 실습한 뒤 총독부 의원 산부인과에서 간호사로 근무했다. 또한 1923년 6월 16일 와세다대학 졸업생이자 2·8 독립 선언에 함께 참여한 최원순과 중앙교회 예배당에서 김창준 목사의 주례로 결혼했다.

1924년부터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의사로 재직하면서 간호부들에게 생리위생학을 가르쳤고, 정신의학교 생물교사를 겸직했다. 이때 그녀는 머리카락을 손질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단발을 단행해 사회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이에 대해 "무슨 주의나 이념, 또는 유행으로 그런 게 아니라, 그저 시간을 아끼고 편의를 도모하기 위해 단발하였다"고 밝혔다.

동아일보 1926년 1월 6일자 기사 '빈부와 의료기관'에서, 현덕신은 "빈민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위생에 관한 의료기관을 될 수 있으면 국가에서 경영하여 영리를 위하지 말고 전부가 국민의 생명을 위하는 기관이 되어야 하며, 돈 있는 사람도 국민이고 돈 없는 사람도 국민이니 귀중한 생명을 서로 아껴주기 위해서 평등한 권리로 병 치료를 받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부녀의 생명을 위해 여의사가 필요하며, 여자가 경영하고 여자 환자만 보는 병원인 여성 전문 병원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녀는 1924년 5월 8일 동아일보에 <공창 폐지와 사회결함>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기고해 공창 폐지를 강력히 주장하며 여성 인권의 신장을 촉구했으며, '초임부의 주의할 일', '빈부와 의료기관', '여름철의 어린아이 위생' 등 여러 글을 동아일보에 기고해 대중의 의학지식을 신장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 신간회의 자매단체인 근우회 창립에도 관여해 1927년 5월 27일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근우회 창립총회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27년 5월 27일,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서 여학생들이 "조선인 학생에 대한 대우를 개선할 것, 조선인 교원 채용을 늘릴 것, 재봉선생을 조선인으로 교체할 것" 등의 요구를 제시하며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이에 근우회는 조사위원으로 현덕신과 황신덕, 김선을 파경하여 사건을 조사한 뒤, 조사 결과를 토대로 대안을 수맂하려 했으나 일경의 제지로 무산되었다.

1927년 10월 남편 최원순의 건강이 악화되자 직장을 그만두고 남편을 따라 광주로 이동하여 무등산 자락에 지어진 '석야정'에서 남편을 간호했다. 이후 여부인의원을 광주에 개원하였으며, 1931년 만주 조난동포구제 광주협회를 결성하여 김팔례, 최용균, 김용환, 최현숙과 함께 집행위원을 맡아 피난동포 구원운동을 전개했다. 한편 근우회 활동도 지속하여 1929년 1월 제2차 근우대회에 참석해 중앙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고, 근우회 광주지회 설치를 위해 노력한 결과 1929년 5월 29일 홍학관에서 부녀 45명을 모아 근우회 광주지회 창립총회를 개최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근우회는 1931년경 일제 경찰의 압력으로 해체되었다.

1936년 7월 6일, 남편 최원순이 폐결핵을 이기지 못하고 4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13년간 해로한 남편의 죽음은 그녀에게 깊은 슬픔을 안겼다. 하지만 그녀는 슬픔을 이겨내고 대외 활동을 지속하여 광주 YWCA의 부회장을 맡아 제 5대 회장 김정현을 보좌하여 여성운동을 전개했다. 8·15 광복 후 건국부녀동맹 초대 부회장에 선출되었고, 독립촉성애국부인회 3대 회장, 대한부인회 전남지부 회장을 역임하면서 문맹 퇴치, 공창 폐지, 윤락여성 선도 및 미연 방지 등 여성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다. 또 1947년 3월 28일 안중근 의사 37주기 추도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1949년 아들 최상옥과 함께 현덕신병원 안에 신생유치원을 열고 유아교육에 힘쓰다 이듬해 6·25 전쟁이 발발하자 전라남도 나주로 피난헸다. 1951년 광주로 귀환한 뒤 신생보육학교를 개교하여 신생아를 기를 교사 양육에 힘을 쏟았으며, 대한부인회 전남도본부 회장에 당선되어 군경 원호사업, 전쟁미망인 재활사업, 고아 선도 및 구제 사업을 적극적으로 실시했다.

1955년에 병원장 직임에서 물러나 유치원과 교육 사업에 종사했으며, 1959년 5월 5일 어린이날 광주공원에 '어린이 헌장탑'을 세우고 '콩쥐팥쥐', '금싸라기 은싸라기' 등 어린이 연극을 무대에 올렸다.

1960년 가을 유치원에서 직무를 보던 중 쓰러졌고, 병세가 악화되어 더이상 대외 활동을 하지 못하고 3년간 투병 생활을 하다 1963년 11월 27일 사망했다. 향년 67세.

대한민국 정부는 2020년 현덕신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2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