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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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元淳. 대한민국독립운동가, 동아일보 기자. 2020년 건국포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6년 12월 18일 전라남도 광주군 광주면 수기옥정 293번지에서 부친 최의준과 모친 박보성의 4남 중 3남으로 태어났다. 호는 '석초(石焦)', '석아(石亞)'이다. 그는 <학어집> 등 한학을 수학하다가 1910년 광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고, 1913년 4회로 졸업했다. 이후 경성으로 상경하여 경성고등보통학교 사범과를 재학하였고, 2년간 교사로 재임했다.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가서 와세다대학 정경과에 입학했다.

1918년 12월 17일 자신의 하숙방에 찾아온 유학생 정광호와 함께 시국을 논의했다. 그들은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 자결주의를 발표했다는 소식을 신문을 통해 접한 바 있넜다. 두 사람은 논의 끝에 다음과 같이 합의했다.

우리에게 절호의 기회가 왔는데 이때에 민족적 의사표시가 없으면 미주에서 파견되는 우리 대표의 제소는 일즉이 왜적의 통치를 받아보지 못한 불평과 해외 망명객들의 잠꼬대로만 세계가 알 것이오, 국내의 이천만 오족은 왜적의 시전하 열복되어 아무 불평도 없이 왜국민 노릇을 충실히 한다고 세계에 선전한 모략은 성공하고 말 것이다. 이 모략 선전을 분쇄치 못하는 한, 우리는 영원이 노례적 생활을 면치 못하고 망국노의 대우를 받고 말 것이다. 차제 우리는 거족적 일대투쟁이 있어야 된다. 이 거족적 운동의 전구 선봉으로는 우리 유학생들이 자임하여야 된다.

두 사람은 자금운동을 하기로 결의하고, 학업을 중지한 뒤 여러 유학생과 접촉하여 독립선언서 발표 취지를 설명했다. 그들은 먼저 하숙방을 찾아온 김헌준, 김인식과 비밀결사하기로 의기투합하였고, 백관수, 최팔용, 윤창석과 함께 1918년 12월 30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동서연합웅변대회'를 개최했다. 최원순은 이 대회에서 미주 교포들이 30만 원이라는 거액의 독립자금을 모금했다는 사실을 유학생들에게 알리며, 조속한 독립선언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그 결과 조선청년독립단이 비밀리에 조직되었고, 최원순, 정광호의 지휘하에 광주 출신 유학생 10여 명이 선언서 등을 작성했다.

최원순 등은 조도전 원병위 삼림일우에 준비하였던 비밀장소에서 독립선언서 1만장을 등사하였다. 이를 토대로 1919년 2월 8일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600여 명의 유학생이 모인 가운데 2.8 독립선언이 발표되었다. 다만 최원순은 조직을 규합하는 등 막후에서 관리하기로 했기 때문에, 대표자 이름에 올리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그는 2020년 이전까지 독립선언에 가담한 사실이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 경시청은 조선청년독립단과 유학생 40여 명을 체포 및 구금하였고, 막후에서 독립선언을 지도했던 최원순 역시 검속되어 고초를 겪었다. 그는 일제 경찰이 작성한 요시찰조선인 동정 명부에서 '을호' 대상자로 분류되었고, 훈방 조치된 뒤에도 일제 형사의 감시를 받았다. 이후 동경유학생학우회 총무, 동경유학생 학우회 강연단을 맡아 1920년부터 1923년까지 조선 전역을 순회하며 강연 활동을 수행했다. 1920년 7월 10일 부산 초량좌에서 '문화발전과 언론자유'를 주제로 첫 강연을 수행했으며, 7월 11일 울산에서 '개조시대와 청년의 사명'이라는 주제로, 7월 12일엔 경주에서 '인류해방의 근본문제'로, 14일에는 대구에서, 15일에는 공주에서 '시대와 도덕'을 주제로 강연했다.

1921년에는 동경유학생 학우회 제2회 전국 순회강연단으로 귀국하여 여러 대회에서 강연했다. 7월 19일 강경 야소교 부속 만동학교여자부에서 '개성의 발휘와 현대의 문화'라는 주제로 강연하였고, 7월 20일에는 전라북도 이리좌에서 '무의식적 생활에서 유의식적 생활에'로, 8월 9일에는 광두 오웬기념각에서 '비평적 판단과 인생의 진화'를, 숭일학교에서는 '생활의 개조와 현대인의 각오'를 강연하였다. 1922년 7월 6일부터 26일까지 김와복, 이창근, 최윤식, 한위건과 함께 목포, 나주, 광주, 정읍, 이리, 전주, 강경, 조치원, 공주, 청주, 경성, 철원, 원산, 영흥, 홍원, 단천, 성진 등을 순회하며 강연하였다.

1923년 와세다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뒤 도쿄 여자의학전문학교 출신인 현덕신과 1923년 6월 16일 중앙교회 예배당에서 김창준 목사의 주례로 결혼하였고, 이후 동아일보에 입사하여 기자로 일하면서 한국 최초의 언론인 조직인 '무명회'와 '철필구락부'에 참여해 조선기자대회의 개최를 주도했다. 이무렵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발표하자, 그는 동아일보에 <이춘원에게 문하노라>를 게재해 이광수의 주장을 통렬하게 비판했다.(자세한 내용은 후술.) 1925년 1월 31일 무명회 임시총회를 열어 전조선기자대회 개최를 제안해 승인받은 뒤, 전조선기자대회 준비위원회 상임위원을 맡았다.

전조선기자대회는 1925년 4월 15일부터 17일까지 천도교 기념관에서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 참석항 기자는 455명이었고, 그는 김기전, 김정신, 강호, 민태원 등과 함께 현직 기자를 대표하여 언론인의 사명을 주제로 하는 강연을 하였다. 또한 "언론의 권위를 신장 발휘하고, 신문 및 기타 출판물에 관한 현행 법칙의 근본적인 개선을 기하며, 언론집회 및 결사의 자유를 구속하는 일절 법규의 철폐를 기하자"는 내용의 <전조선기자대회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후 1925년 11월 28일 태평양문제연구회 위원에 부임하기도 했다.

1926년 8월 22일, 최원순은 동아일보에 <횡설수설>이라는 제목의 논설을 게재했다. 그는 이 논설에서 "총독정치에 대한 비평이야말로 정말 기발하다. 현대의 총독정치는 조선인을 이롭게 하고 이익되게 하는 인사는 박해하고 배척하면서도, 조건인을 해롭게 하고 불리하게 하는 놈들은 절대적으로 보호하는 방침이라고, 그러므로 말하기를 총독정치는 악당 보호정치라고. 참으로 기발하다."라고 비팡했다. 그는 이 일로 체포되어 1926년 11월 8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6년 12월 2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3개월을 구형받았지만, 1927년 2월 17일 '소화 2년 7일 칙령 제11호 대사령 제1조'에 의거해 사면 통보를 받고 1927년 2월 7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했다.

1927년 신간회 창립대회에 참석해 백관수 등과 함께 간사를 맡았으며, 신간회 경성지회 제2회 정기대회에 대표자 후보 및 간사 후보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논설 <극동 정국의 장래>, <일본 정국의 추세>를 게재해 국제정세를 논평하였고, <중국은 공상화할 것이냐? - 사회주의적 국가로>에서는 "중국의 혁명군의 혁명은 성공하는 동시에 사회주의적 국가로 변하리라"고 예측했다. 이후 동아일보 편집국장 대리를 지냈으나, 건강이 좋지 않아 중도 사퇴하고 광주로 낙향하여 무등산 자락에 '석야정'을 짓고 요양하였다.

1928년 광주에서 동아일보 광주지국장을 맡았으며, 최흥종 목사와 함께 민족계몽운동과 빈민 구제 활동을 위한 계유구락부를 결성했다. 계유구락부는 1934년 광주천 호안공사와 직강공사가 실시되면서 강제 철거된 금동과 양동, 학동 일대 천변 영세민에 대항 구제 활동을 펼쳤으며, 안창호여운형을 초청해 강연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1934년 6월 26일 서서평 선교사가 타계했을 때 최원순을 중심으로 계유구락부 회원들이 광주 최초의 사회장을 단행하기도 했다.

1936년 7월 6일, 최원순은 석야정에서 폐결핵이 악화되면서 아내 현덕신이 지켜보는 가운데 세상을 떠났다. 향년 41세. 그가 말년을 보냈던 석야정은 최흥종 목사에게 넘어가 '오방정'으로 변경되었고, 이후엔 허백련 화백이 인수하여 명칭을 '춘설헌'으로 변경했다. 현대 춘설헌은 허백련 화백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20년 최원순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다.

이광수의 민족 개조론 비판[편집 | 원본 편집]

최원순은 1920년 5월 10일 잡지 <현대>에 '개도의 근거'를 기고해 개조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현대사회를 불공평한 사회로 규정했다. 그는 현대의 조직과 제도로는 사회의 건전한 진취와 향상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사회의 진정한 행복을 위하여 우는 각 민족도 호상적 협조에 인하야 전 인류의 진정한 행복을 기할 수 잇다는 의미에서 현대 세계는 개조되어야" 하고, "진실한 생존은 적극적인 진취와 향상에 잇기 때문에 더욱히 강대하고 심절한 개조의 필요가 잇다"고 주장했다. 이렇듯 그는 1920년대 초반에 유행한 개조론에 긍정적인 입장이었다. 하지만 조직과 제도에서 개조의 필요성을 주장했을 뿐, 민족 전체를 개조해야 한다고 보지 않았다.

1923년 이광수가 <민족개조론>을 출간하면서 사회의 파장이 커지자, 최원순은 동아일보에 '이춘원에게 문하노라'라는 제목의 논설을 게재해 이광수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는 이광수에게 5개 항에 걸친 질문을 던졌다.

1. 열악하다는 것은 조선 민족성의 엇더한 것을 의미하는가?


2. 민족성 개조주의의 윤리적 근거가 무엇인가?

3. 한 민족성이 선량하다, 열악하다 판단하는 그 기준이 어대잇는가?

4. 조선인의 과거 변천을 다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자각업시 추이하야가는 변화와 갓흔 변화외다"하는 이유는 어대잇는가?

5. "민족개조는 도덕적일 것"이라고 하는 말은 무엇을 가라치는가?

첫번째 질문은 이광수가 말한 민족성이라는 개념과 정의가 문제가 있다는 데서 출발했다. 최원순은 조선민족성의 열악함을 논하려면 먼저 민족성이란 개념에 부합해야 할 것이나, 이광수의 '민족성'은 귀스타브 르 봉이 정립한 민족성 이론에 부합하지 않으며, 이광수가 주장힌 열악한 조선민족성인 "허위, 비사회적 이기심, 나태, 무신, 겁나, 사회성의 결핍"은 조선의 민족성 요건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민족성이라고 통론한 열악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이광수가 논하는 조선민족성은 다른 민족과 구별되는 특징도 아니고 유전적이지도 않으며, 민족에게 공통적이지도 않기 때문에 이론적인 근거가 없는 일방적인 주장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두번째 질문은 이광수가 "민족의 개조는 도덕적 방명에서부터 들어가야만 한다. 조선 민족 쇠퇴의 원인은 도덕적 원인이 근본이니, 이를 개조함에는 도덕적 개조, 정신적 개조가 가장 근본이 되는 것이다. 이 점을 자각치 못하고 오직 지식의 결핍에만 찾으려 한 것은 큰 불찰이며, 자각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주장한 것에 대한 비판이었다. 최원순은 민족성 개조주의의 윤리적 긍거를 다음과 같이 요구했다.

한 민족성이라고 하는 것은 민족적 개성이다. 그럼으로 민족적 개조는 그 개성의 개조라고 볼 수 밧게업다. "도덕"을 고창하는 "선각자" 이춘원이여! 개성을 존중하자는 현대 세계적 사조를 무시하고 "도덕적일 것"이라고 하면서 개성 개조를 "끌는 정성으로" 주장하는 이론적 근거와 윤리적 가치가 어대잇는가.

최원순은 또 이광수의 이러한 주장이야말로 조선민족을 무시하는 비윤리적인 주장이며, 식민지라는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는 조선의 역사적 조건을 두고 조선의 민족성이 문제라고 주장하며 민족의 개조를 주장한 것 자체가 비도덕적이라고 덧붙였다.

세번째 질문은 첫번째 질문과 연관된 것이다. 조선의 민족성을 개조하기 위해서는 어느 다른 민족의 행복과 번영을 위하는 표목 하에서 열악하다는 판단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세계의 풍토가 균일하지 않고 생활조건이 동일하지 않다. 그런데도 행복과 번영을 위한 유일한 길이며 진리라고 강조하는 것은 결국 '선각자 이춘원'만 알 수 있는 주장일 뿐, 객관적이고 보편타당한 주장이 아니다. 그러므로 민족적 개성이 열악하다고 판단한 것은 근거없는 주장에 불과하며, 개성이 열악하다는 것은 정립되지 않는 개념이고 성립할 수 없는 논리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성립되지 않는다고 비판했다.

네번째 질문은 이광수가 3.1 운동 이래로 한민족의 정신 변화에 대해 "이것은 자연의 변화외다. 또는 우연의 변화외다. 마치 자연계에서 끈힘업시 행하는 물리학적 변화나 화학적 변화와 기타 자연히, 우리 눈으로 보기에는 우연히 행하는 변화외다. 또는 무지몽매한 야만인종이 자각 업시 추이하여 가는 병화와 가튼 변화외다."라고 비하하고, "문명인의 최대한 특징은 자기가 자기의 목적을 정하고 그 목적을 달하기 위하야 계획된 진로를 밟아 노력하면서 시각마다 자기의 속도를 측량하는 데 잇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비판이 담겨 있다.

최원순은 일본 도쿄에서 있었던 2.8 독립선언에 이어 일어난 3.1 운동이 어떻게 자연적이고 우연적인 사건일 수 있으며, 주체적이고 거족적이었던 운동이 문명인이 계획하고 노력하는 과정과 다른 것이라고 부정할 수 있느냐고 비판했다. 또한 조선의 민중을 야만과 결부시켜 "조선인은 문명인이 아니라"는 주장은 합리적이지도, 논리적이지도 않다고 논박했다. 그는 이광수가 3.1 운동의 주체였던 조선 민중을 폄하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야만이라고 덧붙였다.

다섯번째 질문은 이광수가 생물학적이고 유전학적이며, 경제학적인 부분에 대한 개조가 아닌 '도덕적'인 취지하에 민족을 개조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에 대한 의문이다. 최원순은 1919년 3.1 운동 이후 일데의 간섲과 통제가 심해지는 상황에서 이에 대항하기 위한 독립투댕의 담론이 전개되고 있는 이 시점에, 이광수가 '도덕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 민족성 개조는 그 자체로 의심스럽고, 일제의 식민화전략을 합리화하고 있다고 봤다.

이광수는 최원순의 비판에 대해 어떤 반론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1931년 4월 잡지 <삼천리> 제14호에 '최근 십년간 필화, 설화사 - 민족개조론과 경륜'이라는 제목의 글의 게재하면서,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했다. 그는 일반 사회의 총공격을 언급하면서, "아무에게도 아첨하지 않는 내 붓끝이야말로 진리다! 이것이 옳다하고 양심이 명하는 대로 기록하며 놓으면, 그때마다 필화 사단이 따라왔지만 신념을 굽히디 않았기 때문에 민족개조론은 진리"라고 주장했다. 이후 이광수능 친일의 길로 들어섰고, 개조론은 더이상 논의되지 않은 채 사회에서 매장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