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애시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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黃愛施德. 황애덕(黃愛德), 황에스터(黃Esther)로도 불린다.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여성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년기[편집 | 원본 편집]

1892년 4월 19일 평안남도 평양부 외성 대찰리에서 부친 황석청과 모친 홍유례 사이에서 6녀 1남 중 4녀로 태어났다. 이명은 '황애덕', '황에스더'이다. 부친 황석청은 본관이 제안 황씨로, 양반 가문의 자손이었다. 본래 이름은 황석헌이었으나, 아버지가 평안감찰사 민영휘 수하의 감찰로 있을 때 소실이 타인과 언쟁을 벌이다가 큰 잘못을 저지르는 바람에 온 가족이 사람들을 피해 숨어 지내야 해서 이름을 바꿨다고 한다. 그렇지만 넓은 토지와 80칸의 주택을 소유하고 있어서 생활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어머니 홍유례도 부유한 집안의 출신으로, 12마리의 소에 예물을 싣고 시집왔다는 소문이 돌 정도였다고 한다.

황석청은 유교를 신봉하는 선비로, 자녀들에게 전통적인 유가교육을 실시했다. 집안에는 큰 서당이 있었고, 어린 황애시덕은 서당에 다니며 가정교육을 받았다. 그러다 어머니가 막내 여동생 황신덕을 낳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아기는 뱃속에서 나왔지만 탯줄이 나오지 않아 산모와 아기 모두 목숨이 위태로워진 것이다. 급히 명의란 명의는 모두 불렀지만 신통치 않아 어쩔 줄 모르고 있을 때, 이웃 주민이 "서양 의사에게 가보라"고 권했다. 이에 황석청은 아내를 미국인 여의사이자 의료선교사인 로제타 홀[1]이 있는 남산현 병원으로 데려갔고, 다행히 수술이 성공하면서 산모와 아기 모두 무사했다.

황석청은 이 일을 계기로 서양 문명에 뜻을 두었고, 친척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온 가족을 이끌고 개신교에 입교했다. 이후 황애시덕은 가족과 함께 매월 3일 집에 찾아오는 여의사 로제타 홀의 설교를 들으며 신앙을 키웠고, 근대학문을 접했다. 러일전쟁 발발 후 고향을 잠시 떠나 배재라는 시골에서 1년간 피난했다가 다시 평양성내로 들어왔다. 부친은 작은 점포를 운영했고, 모친은 로제타 홀의 요청으로 기홀병원에서 근무했다.

부친은 13살이 된 황애시덕 대신 9살인 여동생 황인덕을 정진여학교에 입학시켰다. 황애시덕은 서운하면서도 1년간 꾹 참았다. 그런데 1년 후엔 막내딸 황신덕을 입학시켰으면서 황애시덕은 입학시키지 않았다. 이에 화가 난 황애시덕은 단식 투쟁을 벌였고, 모친 홍유례도 딸을 지지했다. 결국 황석청은 딸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정진여학교 3학년에 편입시켰다. 사실 황석청은 황애시덕이 이미 한자와 숫자를 깨우쳤기 때문에 더이상 교육이 필요없다고 생각해 학교에 보내지 않으려 했지만, 황애시덕은 꼭 학교에 가고 싶었기에 단식투쟁을 통해 뜻을 이뤘다.

이리하여 어렵게 입학한 정진여학교는 서북지역 최초의 여자교육기관으로, 1896년 아서 W. 노블 여선교사가 설립했다. 이 학교에서는 한문, 산술, 서양식 뜨개질, 지리, 수학, 음악, 교리문답, 사민필지 등을 가르쳤다. 그렇지만 학교의 최대 목표는 기독교 전도인을 양성하는 것이었으므로, 종교 과목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황석청은 이에 불만을 품고 교장에게 "성경 외에 다른 과목도 충실히 가르쳐달라"고 요청하는 편지를 보냈으나 무시당하자 화가 나 자녀들의 학교 출입을 금했다. 하지만 아내가 뒷문으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걸 알고도 모른 척 했다고 한다.

이렇듯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황애시덕은 정진여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이화학당에 진학하려 했다. 그러나 부친은 "배울 만큼 배웠으니 혼인하라"며 진학을 반대했다. 이에 황애시덕은 또다시 단식투쟁을 벌였고, 모친도 지지했다. 결국 황석청은 이번에도 딸의 고집에 못이겨 마침 장학금을 지급하겠다는 이화학당에 딸을 진학시키는 걸 허락했다.

황애시덕은 이화학당에서 국어, 한문, 산술, 역사, 지리, 성경, 영어, 이과, 도화, 생리, 음악, 작문습자, 재봉, 체조 등 다양한 과목을 공부했다. 그리고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많은 친구를 사귀었는데, 특히 양매륜과 절친한 관계가 되었다. 그녀는 여름방학을 맞아 서울에서 유행하는 옷차림으로 친구 양매륜과 함께 평양에 돌아오기도 했다고 한다.

1910년 이화학당을 졸업한 뒤 숭의여학교 교원으로 임명되어 평양에 귀환했다. 이 시기, 그녀는 평양을 여러차례 방문하여 애국 강연 활동을 전개하던 안창호에게 깊은 감명을 받았다. 훗날 그녀는 "안창호의 연설이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잊혀지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또한 당시 평양에서 전개되던 1907년 평양 대부흥에 깊은 영향을 받아 독실한 개신교 신자가 되어 여러 여선교사 및 전도부인들과 교류했다.

황애시덕은 숭의여학교 교원으로 지내면서 부모로부터 결혼을 강요받았다. 그러나 그녀는 두 언니가 결혼생활을 불행하게 보낸 것을 지켜봤고, 자신은 절대로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겠다고 다짐했다. 급기야 14살 때 약혼했던 박씨와 파혼하고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독립운동[편집 | 원본 편집]

황애시덕은 비밀리에 비밀결사를 조직하기로 마음먹고, 숭의여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후 후배들을 가르치고 있던 김경희와 접촉했다. 김경희는 황애시덕에게 안정석이효덕을 소개했고, 이들은 황애시덕의 뜻에 공감하여 교사와 학생들을 더 끌어들인 후 1913년에 송죽결사대를 결성했다.

송죽결사대의 회장은 김경희가 맡았고, 초대회원인 황애시덕, 안정석, 최의경, 박치은, 이효덕, 박효숙은 송형제라 불렸다. 그리고 나중에 가담한 최자혜, 박경애, 채광덕, 최순덕, 이마대, 서매물, 홍마태, 황신덕(황애시덕의 여동생), 김옥석 등은 죽형제라고 불렸다. 송죽결사대는 전원 찬성을 얻어 사진 1장을 사진첩에 붙이면 대원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 후에는 매월 회비 30전을 내야 했으며, 매월 15일 밤 12시에 열리는 회의에 참석해야 했다. 모임 장소는 학교 기숙사 지하실이었다. 대원은 다음 4가지 규칙을 반드시 지켜야 했다.

첫째, 절대로 남의 험담이나 비평을 하지 말 것.


둘째, 일본 물건을 쓰지 말고 국산품을 애용하여 국산 장려를 일삼을 것.

셋째, 옷고름을 달지 말고 단추를 달아 물자를 아낄 것.

넷째, 회원들은 명주나 무명, 모시옷만 입을 것.

모임이 시작되면 먼저 태극기를 펴서 경의를 표하고 나라의 독립을 갈구하는 기도를 했다. 이후에는 각자 자신을 성찰하고 서로를 비판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들은 군자금을 모아 해외에서 활동하는 독립운동단체에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여자상회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머리카락, 떡, 자수 등을 팔았다. 대원들은 졸업 후 혹은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갈 경우에는 그곳에서 활동하면서 전국적인 조직으로 확대하려 하였다. 구체적으로는 조선 13도에 대원을 파견하여 세포조직을 통해 독립사상을 전파했다.

황애시덕은 3년 동안 숭의여학교 교사이자 송죽결사대 책임자로 활동했다. 그러다 여의사 로제타 홀의 일본 유학 권유를 받아들여 1917년 일본 도쿄의 동경여자의학전문학교[2]에 입학했으나, 1년 만에 의학이 자신의 길이 아니라고 판단해 그만뒀다. 그녀는 일본에서 여학생들을 포섭해 송죽결사대에 가입시키고, 비밀리에 모임을 가졌다. 김마리아, 나혜석, 정자영, 유영준 등이 이 모임에 참석했으며, 일본 경찰을 피하기 위해 명부서류 대신 앨범을 만들어 각자의 사진 아래에 송, 죽 등으로 표시했다. 모임은 도쿄 칸다에 있는 한인교회를 이용하다가 그곳마저 위험하다고 느끼고 하숙집 골방을 이용했다.

이들은 일제 비누 대신에 녹두가루를 사용했고, 의류도 무명과 명주로 만들어 입는 등 국산품 애용에 앞장섰다. 또한 황애시덕은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에도 가입해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녀는 김마리아와 더불어 잡지 <여자계>를 창간했고, 1917년 10월 17일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 임시총회를 개최했다. 이후 여자계 3호부터 발행인이 되어 좀더 폭넓은 여성 대중을 위한 잡지로 발전하도록 노력했다. 그러던 1919년 1월 6일 일본 유학생들이 가진 모임에 김마리아와 함께 참석한 그녀는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이 주창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독립선언을 발표해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전 세계에 보여야 한다는 취지에 적극 동의했다.

1919년 2월 8일 오후 2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약 40명의 학생들이 모여 2.8 독립선언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는 황애시덕을 비롯하여 김마리아, 노덕신, 유영준, 박정자, 최제숙 등 여학생들도 참가했다. 황애시덕은 이 자리에서 국내 여학생들을 단합시켜 운동을 일으키고, 하란사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하기 위한 기금을 마련하는 임무를 맡았다. 이후 2월 28일, 일본 경찰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일본 여성으로 변장하고 기모노 허리띠(오비)에 비밀 서류를 넣어 머리카락을 히사시가미 스타일[3]로 틀어올린 후 귀국길에 올랐다.

부산에 무사히 도착한 뒤, 그녀는 기차를 타고 경성부로 상경해 박희도, 송진우를 만나 2.8 독립선언에 대해 설명했다. 이후 김마리아와 대화한 뒤 그녀로부터 "이화학당을 근거지로 항일여성운동단체를 조직하자"는 권유를 받고 즉시 승낙했다. 이후 경성에서 3.1 운동이 발발하자, 안국동에서 효자동을 지나는 시위대와 합세하여 독립만세를 열창한 뒤 친척집에서 하룻밤을 보낸 후 다음날 동생 황인덕의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인 3월 2일 박인덕의 방에서 김마리아, 김하르논, 박승일, 신준려, 안숙자, 나혜석, 손정순, 안병석[4], 안병수[5] 등과 모임을 가졌다.

후에 나혜석이 일본 형사에게 진술한 내용에 따르면, 김마리아가 이날 모임에서 "남자들이 3월 1일 독립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여자 쪽은 어찌 할 것인가"라고 묻자, 황애시덕이 "부인단체를 만들어 독립운동을 하고, 남자단체와 연락을 취하며, 남자단체에서 활동할 수 없을 때에는 여자단체가 이를 대신하여 운동하자."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이날 김마리아, 박인덕, 나혜석, 황애시덕 등이 간사로 뽑혔고, 3월 4일 다시 모여서 하란사와 신마실라를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시키려 했다. 하란사는 이미 떠났으니 신마실라를 보내려 했지만 여비가 없었다. 이에 황애시덕은 3월 6일 일본 여성으로 변장하여 경기도 개성, 황해도 황주, 해주, 사리원, 평안남도 평양 등 각 지방의 동지를 찾아가 여비를 마련하려 했다.

그녀는 평양에 있는 안정석의 집에 찾아갔고, 그곳에서 노파로 분장한 뒤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경비를 마령했다. 자금을 히사시가미 속에 감추고 경성에 돌아와 신마실라에게 건네주었다. 그후 동생 황인덕의 집에 숨어 있다가 3월 19일 나혜석의 자백을 받아낸 일본 형사의 급습으로 체포되었다. 이후 서대문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5개월 만에 내한선교사 빌링스의 주선으로 석방되었다. 출옥 후 일시적인 단체가 아닌 항일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 단체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마침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된 김마리아를 찾아갔다.

그녀는 김마리아의 소개로 정신여학교 교사인 이혜경, 장선희, 김영순, 신의경, 정신여학교 출신의 간호원 이정숙, 전도사 백신영 등괴 만나 독립운동단체를 설립할 목적을 설명했다. 이후 1919년 10월 19일 정신여학교에서 미술, 음악, 영어 등을 담당하던 천미례 여선교사의 집에서 16명과 함께 김마리아의 문병을 간다는 명목으로 모여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회장엔 김마리아, 부회장엔 이혜경, 총무에 황애시덕, 서기에 신의경, 김영순, 부서기에 황인덕, 교제원에 오현관, 적십자장에 이정숙, 윤진수, 결사장에 백신영, 이성완, 재무원에 장선희 등이 선정되었다. 그리고 지부는 경성부, 부산, 대구, 원산 등 19군데에서 결성되었으며, 가입 인원은 총 650여 명에 달했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본부의 모임장소는 정신여학교의 지하실이었다. 그들은 학교의 등사판을 이용하여 인쇄물을 작성하고 본부의 인장 및 각종 서류를 전부 지하실에 감췄다. 그러나 2달 후 검거 선풍이 일면서 황애시덕을 비롯한 회원 전원이 체포되어 대구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후 황애시덕은 김마리아와 함께 심한 고문에 시달렸고,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고 공소했지만 1920년 12월 27일 기각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녀는 지정받은 감방에 절도범들이 들끓는 것에 큰 충격을 받고 1주일 동안 이들과 말 한마디도 않고 울기만 했다고 한다. 그녀는 후에 이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내가 잇는 방은 절도방이었는데 제일 고약하엿습니다. 사람들이 어떠케 더럽고 마음성이 나뿐지 서로 엇바꿔 누어 잇으면서 창자가 꿰지게 쿡쿡 차고 야단이니 그 광경이야 굉장하지요. 싸흠과 욕설, 간수의 말도 듣지 않고 하루에 2, 3분씩 운동 겸 소풍을 쪼이는 것, 때리는 것, 밥 조꼼 주는 것 등 암만 형벌을 가하여도 듣지 않고 사람들이 어떠케 고약한지 한 번은 내가 미결로 잇을 때 차입들인 옷을 입고 잇엇는데 내가 잠을 들은 줄 알고 막 코를 후비고 춤을 콱콱 받앗습니다.


- <동광>, '대구여감의 0141호', p.48. 1931년 10월.

황애시덕은 독립운동을 펼치던 자신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 지내는 것에 억울함을 느꼈다. 게다가 감방에서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자 깊은 절망에 빠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 마음을 다잡고 같은 방에 수감된 죄수들을 돌보기로 결심했다. 그녀가 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려 하자, 죄수들은 비웃었다. 하지만 그녀는 끈질기게 그들을 가르쳤고, 다른 동지들에게도 함께 동참할 것을 권했다. 또한 그녀는 병든 이들을 위해 의학지식을 동원하여 치료했다.

한편, 그녀는 새벽에 일어나 공장에서 일한 후 저녁 늦게 감방으로 들어오는 생활을 하였고, 음식은 콩밥과 소금국만 먹었다. 공장에서 하는 일은 하루 종일 새끼줄로 만든 방석에 앉아 죄수들의 옷을 만들거나 수를 놓는 일 등이었다. 하루 13시간 꼼짝없이 일하다 보니 무릎에 이상이 생겨 이후에 계속 고생했다고 한다. 제일 견딜 수 없던 것은 바늘이나 실을 빼돌렸는지 검사하기 위해 몸수색을 받는 것이었다. 그녀는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며 나라를 빼앗긴 조상들을 원망했다고 한다.

이렇듯 그녀는 낮에는 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죄수들에게 성경, 산술, 한글 등을 가르쳤다. 죄수들은 어느덧 그녀에게 감화되어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그녀는 동지들과도 벽을 통해 소통하면서 바깥 정보를 입수했다. 그러다 복역 기간 1년을 남겨두고 모범수로서 김영순, 장선희 등과 함께 가출옥했다. 출옥 후, 그녀는 그동안 자신이 일반 여성 대중과는 거리가 먼 소수 지식인 중심의 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러면서 자신이 절도범들과 함께 지낸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일반 여성들에게도 교육을 베풀고 함께 나아가야 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고 여겼다. 그녀는 곧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농촌운동 및 여성운동에 사명을 걸기로 결심했다.

농촌운동 및 여성운동[편집 | 원본 편집]

922년 6월 YWCA 기성회가 발족하자 즉시 가담하였고, 1923년 8월 조선 YWCA 연합회가 창립되어 제1차 정기총회가 열렸을 때 형장제정위원 겸 연합위원으로 선정되었다. 황애시덕은 이 시기 이화학당 교사 겸 기숙사 사감을 맡으면서도 방과 후에 야학에 나가 여공들에게 한글과 수학을 가르쳤다. 1924년 조선 YWCA 연합회 제2회 정기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임되어 활동하다가 1925년 미국 유학을 떠났다.

그녀가 미국 유학을 택한 목적은 농학을 공부하기 위함이었다. 농촌사업에 남다른 흥미와 뜻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미국의 우수한 농학 기술을 습득한 뒤 조선에 돌아와서 농민들을 위해 헌신할 각오를 다졌다. 미국에 도착한 뒤 유학비를 벌기 위해 시카고에서 미국인 집의 가사도우미를 하며 공부했으나, 일과 공부를 병행하려니 너무 피곤하여 학교를 그만두고 백화점에서 향수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다 일거리를 찾아 펜실베이니아주 스크렌톤에 갔을 때 한국에 관심이 많던 웨스트 양과 숄티 부인을 만났다. 그녀는 이들의 지원으로 학비를 얻게 되자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이후 콜롬비아대학교 사범대학 농업학과에 입학해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 펜실베이니아 주입대학에서 1928년 여름부터 12월까지 5개월간 농학을 청강하고 농촌 생활을 시찰한 뒤 국내에 귀국했다. 1929년 1월 귀국한 그녀는 그해 7월 제7차 정기총회에서 농촌부 위원에 선임되었고, 1930년 5월 제8차 정기총회와 1932년 7월 제9차 정기총회에서도 농촌주 위원을 맡았다. 그녀는 회의 석상에서 미국 정부가 국고를 지원하여 가장 많은 힘을 들여 장려하는 분야가 농림교육이라고 지적하며, "조선은 농민이 8할 이상이니 농촌을 계발하는 운동이 우리 민족에게 가장 긴급하고 중요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황애시덕은 1929년 4월 협성여자신학교[6] 농촌사업지도교육과 교수로 부임했다. 그녀는 학기 중에는 학생들에게 농촌 실정과 농촌사업의 필요성을 가르쳤고, 여름방학 때는 학생들을 농촌에 파견해 실습하게 하는 등 농촌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이 학생들 중에는 '샘골마을'[7]에서 활약한 최용신[8]도 있었다. 또한 1930년 교장인 채핀부인이 <뎡말나라(덴마크) 연구>를 저술, 출판할 때 협동조합 부분의 편집을 맡았다.

황애시덕은 농촌운동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황해도 수안군 용현리에서 이상촌을 설치하기로 마음먹었다. 김노득이라는 가명으로 동지들의 의연금을 모아 10~30만 평의 땅과 낡은 집을 구입한 뒤, 그곳에 기거하며 농촌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그곳 마을 주민들의 무관심과 몰이해로 인해 마음고생을 심하게 했다. 그녀는 후에 자신이 처했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우리는 제일 먼저 이 낡은 집에 도배, 장판을 하기로 하고 도와줄 일꾼을 얻으려 했으나, 동리 사람들이 모두 블응함으로 할 수 없이 우리가 흙을 이겨 떨어진 담벽, 방바닥을 때우고 가지고 간 도재 장판지를 오려서 2, 3일 동안에 집수리를 마쳤다. 그러는 동안 동리 어른들은 멀리서 구경만 하고 아이들은 몰려왔다. (중략) 우리는 가지고 간 공책과 연필을 나누어 주었다. 구경만 하던 동리 어른들은 "그 에미네들이 무엇을 하러 왔나 했더니 연필장사구먼!" 했다. (중략) 어느 날 저녁 동네 한 노인이 와서 "이 못된 년놈들아! 해 뜨고 달 떠서 명랑한데 또 무슨 문명을 밝히려느냐?" 소리 지르며 지팡이를 휘둘러 내어 쫒기도 했다.


- 황애시덕, "유고: 황무지를 헤치며 4", <신여원>, 1972년 7월.

그녀는 이러한 악조건에도 학생들과 함께한 여름 3달 동안 낮에는 어린이, 저녁에는 청년 남녀를 모아놓고 가르쳤다. 그리고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에 학예회를 열고 그동안 배운 여러 가지를 발표했다. 이렇듯 끈질기게 노력한 끝에 얻은 성과를 정리 및 홍보하여 마침내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교육 열의를 이끌어냈다. 한편, 그녀는 자신이 구입한 땅의 주인으로서 '착취를 부인하는 새 농장주'가 되어 농촌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소작료를 전폐했다. 그럼으로써 소작인들이 힘을 내어 땅에 거름을 많이 내고 좋은 씨았을 심어 더 많은 수확을 얻고자 노력하여 옥토로 일구기를 기대했다.

또한 자신이 보유한 땅에 몇 천명 또는 몇 만명을 이주시켜 원만한 농장으로 만든 다음, 거기에 낙토를 만들고 각지에서 오는 가난한 농민들을 수용하고자 했다. 그녀는 취재기자에게 황해도 농장에서 수확한 콩 한 줌과 조 한 줌을 보여주며 자신이 이상촌 건설을 성공적으로 이루고 있음을 홍보하기도 했다.[9] 그녀는 자신이 보유한 땅이 고원지대로 주민들이 극도로 빈곤하게 살아가는 것을 보고, 고구마를 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여 고구마 싹을 많이 내어 가지고 가서 주민들에게 공짜로 나누어주었다. 또한 겨울방학, 여름방학, 농한기 강습회를 열어 동리 사람들을 모아 채소재배 등을 가르치는 한편 필요한 약품(회충약), 생활필수품(실, 세탁비누)을 가져가 싼값에 나눠줬다. 또한 자신에게 매달 오는 후원금을 토대로 강습소를 설립하여 교사들에게 월급을 줬으며, 학생들이 쓸 학용품을 보냈다.

이러한 그녀의 노고는 실제로 성과를 거뒀다. 용현리 주민들의 식량 사정은 나아졌고, 회충과 문맹이 퇴치되었으며, 일용품을 싸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그녀는 한 면에 하나의 학교를 목표로 삼고, 일제 당국이 학교 설립을 방해하고 폐쇄하기를 일삼아 어려움을 겪는 와중에도 각 처에 여러 개의 학교와 강습소를 세우고 학교 이름을 모두 성광학교라고 지었다.

황애시덕은 농촌운동과 별개로 여성운동 역시 전개했다. 그녀는 1929년 8월 18일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열린 경성여자소비조합 창립준비회에 참석해 사회사를 맡아 개회사를 했다. 그리고 1930년 3월 9일 수표청 교육협회 건물에서 열린 경성여자소비조합 창립대회에서 시무방침에 대한 설명을 담당했으며, 3월 10일 제1회 이사회에서 전무이사에 선임되었다.

그녀는 이론 확립에 주축을 담당하여 잡지에 '조선여자경제운동의 제일보'를 기고했으며, 협동조합의 필요성을 설파하면서 이것이 작은 촌락뿐만 아니라 큰 도시에서도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촌락의 조합과 같이 규모가 작으면 이익은 적지만 사무 처리가 간단하고, 도시의 조합처럼 범위가 넓으면 일이 복잡한 대신 이익은 더욱 커지는 등 나름대로 장점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 각 지역과 촌락마다 소비조합이 생기고 각 분야마다 협동조합이 생기게 되면 그 도합들을 모아 지방의 산물을 연결하여 취급함으로써 서로의 편리를 도모하게 될 거라고 전망했다.

황애시덕은 가정살림의 주체이자 소비자라는 관점에서 여성의 경제적 역할에 주목했다. 그녀는 여자소비조합이 여성운동 차원에서 "여자경제운동의 제일보"이며, 경제적 관점에서 약자인 개인 소비자와 한민족이 살 길이라고 봤다. 따라서 여성들이 협동정신으로 단결하여 조합을 결성하고 생산과 소비를 협동적으로 함으로써 금융의 압박을 줄이고 가정경제와 민족경제에 일익을 담당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황애시덕의 관점에서 경성여자소비조합은 물산장려운동과 같은 경제적 민족운동이자 여성의 경제적 역할을 강조한 여성운동이었다. 그러나 경성여자소비조합은 1932년 2월 즈음 침체 상태에 빠지다 결국 해산되었다.

1933년 11월 25일, 황애시덕은 가정부인협회 창립 총회준비위원으로 위촉되었고, 1934년 6월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임되었다. 가정부인협회의 창립 초기 주역을 담당하여 조직과 사업을 궤도에 올려놓았다. 사실 그녀는 결혼을 기피했지만, 1930년 4월 8살 연하의 박순(또는 박순보)와 결혼한 뒤 관점을 바꿨다. 그녀는 '교육을 받은 신여성이라고 해서 가정에서 지위가 보장되고 정당한 대우를 받는 게 아니다'라는 걸 자각했고, 남성 지식인들이 말로만 남녀평등과 여성운동을 주장하지만 실제로는 아내와 신여성을 무시하는 행태에 반감을 품었다.

황애시덕은 '여자가 가정살림을 맡게 되면 사회적 진출이 적게 되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사정'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가정살림은 가정일뿐만 아니라 사회적 사업이기도 하다'며, 주부의 일에 의미를 부여했다. 따라서 가정의 살림을 하는 주부는 이러한 중대한 책임이 자기에게 있음을 자각하여 아동교양문제를 힘쓰며 가정 개선에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렇지만 여성이 평생 가정에서 아이만 기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봤다. 아이는 3명 정도만 낳아 기르고, 40세 즈음부터는 가정에서 얻은 경험을 살려 사회산업과 같은 사회적 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애시덕은 1934년 5월 여동생 황인덕, 황신덕 자매와 함께 중앙보육학교[10]를 인수하여 경영했다. 그녀는 교장으로서 장차 10만원의 재단법인 설립을 목표로 정했다. 여류광업가 김정숙 등이 수만 원을 내어 기초를 튼튼히 하는 한편, 가정학원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보육과는 한 과로 편입하여 학교를 확장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자금이 부족하여 운영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1935년 4월 다른 사람에게 넘겨야 했다.

1934년 일제가 농촌진흥운동을 실시하여 농촌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 민간의 농촌운동을 억압하면서, 황애시덕의 이상촌 운동도 좌절되었다. 게다가 YWCA 연합회는 더이상 농촌운동을 벌이지 않고 농촌부녀의 단기교육기관인 농촌부녀지도자 수양소 운영에 치중했다. 그녀는 수양소 강사진에 가담하여 활동했지만, 이러한 현실에 회의를 느꼈다. 게다가 1935년 모친이 사망하고 자신의 뜻을 이어받아 '샘골마을'에서 큰 활약을 하던 최용신마저 병사하자, 그녀는 국내에 더 있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1935년 가을 만주로 떠난 그녀는 하얼빈에 도착한 뒤 동아일보 하얼빈 지부에서 일했다. 이때 하얼빈 인근의 수화농장에서 한인 소작인들이 가혹한 조건에서 일하느라 생계를 잇기 힘들어 하는 걸 목격하고, 그들을 설득해 만주에서 가장 궁벽하여 일본인들이 거의 왕래하지 않는 곳인 경성현에서 '자유농장'을 건설하게 했다. 1년 여간 노력한 결과 농민 30여 호가 이주하여 농장을 건설했고, 농장 안에 교회도 세워졌다. 그러나 정작 그녀는 마적떼 때문에 농장에 가지 못하다가 1937년 중일전쟁과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정세가 혼란해지자 더 이상 만주에 머무를 수 없다고 판단하여 조선으로 돌아갔다.

이후 일제의 전시동원을 피하고 소개령에 응하기 위해 경기도 광주군 백현리에 농장을 마련하고 농촌생활을 했다. 일본인들이 농민의 식량을 수탈하는 것을 보고 쌀을 빼앗기느니 차라리 먹어치우기로 결심해 떡, 엿, 두부를 만들어 마음껏 소비하는 걸 일과로 삼았다. 또한 낮에는 동네 아이들을 모아 한글을 가르쳤고, 밤에는 젊은 남녀를 가르치며 세월을 보냈다. 이 시기 여동생 황신덕이 내선일체를 찬양하는 등 친일파 지식인으로 활동했지만, 그녀는 대외활동을 삼갔다.

광복 이후의 행적[편집 | 원본 편집]

8.15 광복 후, 이은혜, 김활란, 여동생 황신덕 등 기독교 계열 여성운동가들과 함께 독립촉성애국부인회를 결성하였고, YWCA 연합회 이사와 여성단체총협의회 초대회장을 맡아 여성운동을 전개했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가 발표되자 반탁운동에 가담했으며, 1946년에는 여성단체협의회에 참여해 여성교육문제, 여성의 참정권 문제 타결에 힘썼다. 1948년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 여성단체총연맹 소속으로 서울 중구 선거구에서 출마했으나 한국민주당 윤치영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50년 6.25 전쟁 당시 미국에 있었던 그녀는 미국의 12개 주를 돌며 구호품을 모아 대한민국에 보냈다. 1952년 귀국하여 한미기술학교를 설립해 남편을 잃은 여성과 고아를 모집하여 그들에게 기술교육을 가르쳤다. 1960년 3월 1일 중앙여자고등학교 주최 3.1 운동 선도자 제1회 찬하회에서 찬하자로 선정되었다. 1967년 3.1 여성운동동지회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함께 한 동지들과 만났다. 1971년 8월 24일 경기도 부평[11]에서 병사했다. 향년 78세.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황애시덕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창작물에서[편집 | 원본 편집]

  • 1959년 윤봉춘의 영화 <유관순>(1959년 버전)에서 배우 강양순이 연기하였다.[12]
  • 2019년 다음 웹툰에 <조선, 황애덕을 만나다>가 연재되었다. 2020년 1월 2일 24화로 완결.[1]

외부링크[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한국 최초 근대 여의사인 박에스더의 스승이기도 하다.
  2. 현 도쿄여자의과대학
  3. 일본 전통의 여성 헤어스타일
  4.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안병석과 동명이인이다.
  5.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안병수와 동명이인이다.
  6. 감리교신학대학교
  7.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본오동
  8. 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인 채영신의 실제 모델
  9. <삼천리> 1932년 3월 "십만평 평야에 건설되는 여인집단농장, 여성의 지상촌"
  10. 현 중앙대학교
  11. 인천광역시 부평구
  12. 크레딧 상에서는 '애덕'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