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복 (18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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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昇馥. 호는 평주(平洲).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5년 5월 18일 충청남도 예산군 대술면 상항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독립유공자 이남규의 손자로, 어렸을 때 서당에서 한학을 배우고 장통보통학교, 휘문고등보통학교, 그리고 남궁억이 교장으로 있던 청년학원(靑年學院)에서 수학하였다. 그러다 형 이민복(李敏馥)과 함께 연해주로 이주하였고, 1913∼1919년에 노령과 북만주에서 이동녕·이회영·이시영·이상설 등과 교류하며 독립운동 기반을 마련하고, 독립운동의 방략을 모색했다.

1920년에는 연해주에서 박은식과 함께 <청구신문(靑丘新聞)>을 발간하고 신문활자를 노령으로 운반하던 중 일경에 붙잡혀 6개월간 구금당하였다. 동년 7월 블라디보스톡에서 박용만·이민복·조성환 등이 조직한 대한국민군(大韓國民軍)을 지원하기 위해 김병희(金炳僖)와 함께 귀국하여 군자금 모집활동을 폈다.

1921년에는 이시영·조완구·조소앙 등과 함께 임시정부 국내 연통제(聯通制)의 조직결성을 위해 힘썼으며, 1923년 김상옥 의사의 종로경찰서 폭파의거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었으며 동년 7월 홍명희·홍증식(洪增植)·김찬(金燦) 등과 함께 사상단체 신사상연구회(新思想硏究會)를 조직하였다. 또한 1926년 9월에 개최된 사상단체 정우회(正友會)의 집행위원회에서 위원으로 선임되었는데, 정우회는 정우회선언을 통해 사회주의자와 민족주의자의 제휴를 주장하여 민족협동전선(民族協同戰線)인 신간회 결성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1927년 1월 신간회 결성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였으며, 동년 2월 동회의 지회 결성에도 힘써 1927년 11월 이관용(李灌鎔)·권태석 등과 함께 신간회 예산지회를 주도·조직하였다. 또한 1928년 6월 조선교육협회(朝鮮敎育協會)의 정기총회에서 평의원으로 선출되어 민족교육에 힘썼으며 1927∼1933년 조선일보 이사 겸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언론창달에 노력하였다. 그러다 만보산 사건의 진상을 보도하여 민심을 혼란에 빠뜨렸다는 이유로 안재홍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 징역 8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1936년 3월에는 여운형의 도움을 받아 중국 항주에 있는 항공학교를 졸업하고 남경·상해 방면에서 독립운동을 하려던 정필성(鄭必成)을 중국으로 망명케 하였다. 1945년 3월 일본헌병사령부의 예비검속으로 구속되어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다가 8.15 광복으로 석방되었다.

광복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의 교통부장에 선임되었으나 고사하였고, 1946년 국민당(國民黨) 총무부장에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동년 국민당이 한국독립당과 합당하자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으며, 1948년 신한국민당(新韓國民黨)의 중앙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한편, 1946년부터 1948년까지 민주일보사의 부사장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51년 낙향해 한학 연구와 농업에 종사하였다. 1978년 10월 31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이승복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0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