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

개요[편집 | 원본 편집]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다. 조선 말 손꼽히던 부자 집안의 6형제중 넷째. 한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설명하는데에 거론되는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1910년 국권피탈이후 재산을 처분했다. 이후 만주로 이주하였는데 그때 전재산을 급처하였다. 급처한 전재산은 당시 40만원 정도로 현재 시세로 환산한다면 600억원에 육박한다. 이마저도 급하게 처분한 재산이고 급처하지 못한 재산은 그냥 버리고 갔다고.

이후 이회영 형제는 남만주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만들고 신흥 강습소를 세워 무료오 운영하며 독립운동과 민족 교육과 독립군 양성에 힘썼다.

시대[편집 | 원본 편집]

이회영(1867-1932)이 독립운동을 전개한 시대는 나라와 민족이 가장 많은 변혁과 고난을 겪었건 격동의 시기였다. 일본은 청일전쟁에 이에 을미사변(1895)을 일으켰고 러일전쟁에서 이긴 기세를 더욱 강화하여 을사조약(1905)까지 강제로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반대하는 국민 투쟁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언론, 상소, 오적 암살의 기도와 의병의 궐기 등으로 대항하였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거기에다가 민족 수난의 국치 한일합병(1910)마저 단행되어 식민통치로 들어갔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편집 | 원본 편집]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될 조짐이 보이자 이회영은 이를 저지하려 노력했다. 우선 당시에 의정부 참찬이었던 이상설을 통하여 참정대신 한규설이 조약 체결을 거부하도록 부탁하였다. 또 외부교섭국장이었던 친동생 이시영에게 말하여 외부대신 박제순도 참정대신 한규설과 함께 조약 체결을 거부하도록 권고하였다. 고종 황제의 시종무관 민영환에개도 이상설이 부탁하여 황제께서 이를 완강히 거절하시도록 아뢰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은 이토 통감이 일본군 사령관 하세가와를 시켜 왜군으로 궁중을 포위하고 이완용 등 오적과 결탁하여 강제로 조약을 체결하게 하면서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1907년에는 전국 규모의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창립에 깊이 관여하는 한편, 제 2회 만국평화회의 개최지인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밀사로 파견하는 일에도 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또한 애국운동으로서의 교육 진흥을 위해 이동녕, 안창호, 이승훈, 박승봉 등과 함께 협의를 통해 평양 대성학교, 정주 오산학교, 안동 협동학교, 서울 상동청년학원에 뜻있는 교사들을 추천 파견하고 자신도 서울의 상동청년학원 학감으로 취임하였다. 비밀결사 신민회의 활동을 국권회복과 애국계몽운동으로 확대 발전 시켰다.

만주에서의 독립운동[편집 | 원본 편집]

이회영 일가는 집단 망명 후 추가가에 정착하였는데, 많은 한인들이 그들을 따라 몰려와서 추가가 일대가 한인 마을로 변했다. 그곳에 살던 중국인들에게 중국을 해치려는 것으로 오해를 받기도 했지만, 이회영이 북경의 원세개 총통을 찾아가 조선인들의 망명 동기와 앞으로의 활동 계획을 설명하고 협력해 줄 것을 부탁하여 승낙을 받아낸 덕에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근거지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이후 이회영의 둘째 형 석영은 거금을 쾌척하여 통화현 합니하에 독립군 양성을 위한 기지를 매입하였다. 그리고 1912년 봄에 독립운동가들의 노천 군중대회를 열고 최초의 항일 혁명단체이며 만주 한인들의 자치기관인 경학사를 조직하였다. 그 다음에 그들은 무관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신흥강습소라는 이름으로 개교하였다. 이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 중에는 일본군 1천 2백여 명을 사살한 청산리대첩에 가담한 독립군들이 많았다. 특히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 서간도 지역의 무장독립군 서로군정서,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의 활약이 매우 컸다. 이회영은 1932년 일본 경찰의 고문에 의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북경과 상해 그리고 천진에서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중국 망명에서의 빈곤[편집 | 원본 편집]

1919 2월 북경으로 망명한 이회영은 그곳에서 자신의 두 동생과 재회했다. 세 사람은 한 목사와 함께 상해로 떠났으며 상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회의를 했다. 그는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열린 대한민국임시의정원 회의레서 이회영은 동생 이시영과 함께 의원으로 참가했고, 이 회의에서 현순이 이회영을 국무총리로 추천하였으나 부결되었다. 또한 이회영이 대한민국임시회의 중심인물이 되지 못해서 임정을 반대한다는 오해를 받게되자 이회영은 국무위원장 추대를 거절한 채 다시 5월 중순 북경으로 떠났다.

북경에는 부인 이은숙과 장남부부, 남매와 함께 셋집에 얻어 살고 있었다. 이 집에 이회영이 합류하며 상해, 만주, 또는 국내에서 오는 독립운동가들이 꼭 거쳐가는 필수코스로 변모했고, 유학에서 오는 젊은이들이 사랑방이며 연락처가 되었다. 매일 10~40명에 이르는 손님이 찾아와 집이 좁았기에 이회영 가족은 새로운 집을 얻어 이사하게 된다. 이후 한차례 더 이주하고 이 거처에 자주왔던 인물들을 이규창의 기억대로 적으면 내노라하는 굵직한 독립운동가들이 등장하는데 대표적으로 김규식·신채호·김창숙·안창호·조소앙·조성환·박용만·이천민·김원봉·이광·송호성·홍남표·유석현·어수갑·류자명·이을규·이정규·정화암(정현섭)·김종진·소완규·임경호·한진산·이정열·한세량·최태연·박숭병·성준용·윤기섭·고운흥... 그리고 국내에서는 이득년·유진태·유창환·김진호·윤복씁·홍증식·정인보·변씁태·이관직 등이 있다. 1920~1922년 이회영 집은 여러 독립운동가들이 다녀가며 막대한 비용이 들었기에 궁핍한 생활을 해야만 했고, 1922년 이후 국내의 후원이 모두 끊겨 생활고가 심해지니 이회영 가족은 1925년경 집세가 싸고 좁은 집으로 이사하기도 했는데 이는 조선에서 제일가는 부자라 해도 아쉬움이 없었던 이회영의 조선 생활과는 대비되는 모습이다. 1925년 3월에 일어난 밀정 암살 사건은 이회영 일가는 더욱 힘들어졌다. 불행은 이에 그치지 않고, 북경에 돈 전염병인 성홍열로 이규학의 두 딸과 젖먹이인 이규창의 남동생이 사망했으며, 이규창의 여동생이 뇌막염에 걸려 입원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다. 이후로도 생활고를 해결할 수 없자 1925년 9월경 부인 이은숙이 홀로 국내로 돌아가 생활비를 마련하기로 했으며, 귀급한 이은숙이 급한대로 옛 동지들로부터 주선받은 돈을 북경에 보냈다. 이 돈으로 밀린 및은 갚고 이사하였다고한다.

아나키즘[편집 | 원본 편집]

이회영은 19세기 후반, 2-세기 초 격변기에 새로운 사상 수용의 선구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제국주의 세력의 침략 속에서 새로운 사상의 선구자로서 삶을 살았으며 사회진화론을 수용, 실력양성운동에 종사했다. 일제강점기에는 민족해방운동을 이끌어갈 반제국주의적 사고체계로서 아나키즘을 선구적으로 수용했다. 서구의 새로운 사상을 수용한 이회영은 조선에서 약관이 지나며 계급적 불평등과 불평등한 봉권적 인습을 타파하는데에 앞장섰다. 그는 자신의 집의 노비를 불어주었으며, 남의 집 노비에 대해 경어를 쓰는 등 봉건적 신분제도에 앞장 서 반기를들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여성의 개가를 장려하고, 과부인 여동생을 개가시키기 위해 시집에서 자기 집으로 데려오며, 거짓 부고를 전한 뒤 여동생을 적당한 혼처에 시집을 보냈다고 한다. 이를 보아 알 수 있듯 그는 신문물과 사상의 선구안을 가진 혁명가였다. 이 당시 지배층을 중심으로 개혁운동이 일어났는데 고종은 황제중심의 광무개혁을 진행했고,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한 개화파들은 자주독립운동과 자유민권운동을 전개했다. 그는 이때 이상설, 여준과 함께 남산 엽정에 올라 국내외의 정치적 정세를 검토·비판했다. 그는 이러한 형태의 개혁대신 국민의 계몽, 신진 정치가들과의 결합, 국내외 문제에 대한 빠르고 확고한 정책의 수립을 강조했다. 이후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1919년 4월 임시정부 조직에 관한 논의가 각 방면에서 활발히 진행되었다. 이회영은 당시 문제로 삼고 있는 민족해방운동의 조직이란 것이 실제 운동에 있어서 각 방면에서 서로 연락하여 중복되거나 마찰이 일지 않고 민첩하게 진행되어 나가도록 지도할 수 있고 서로 협동·협력할 수 있는 방법과 조직을 세우자는 것이므로, 그 조직형태가 정부라는 행정적인 조직과는 근본적으로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정부를 조직하게 되면 그 명칭으로 인해 지위와 권력을 다투는 분규가 끊이지 않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며, 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것에 대해 반대했다. 이회영의 반정부적 입장과 반중앙집권적 조직관은 아나키즘의 정부에 대한 비판과 자유연합주의적 조직관에 닿아있다. 이것은 신채호의 영향으로 추정되는데, 신채호로부터 아나키즘에 관한 지식을 습득한것으로 보인다. 이회영은 이전부터 신분평등과 인간의 자유에 관심을 가지고 실제로 실천하고 있던 그는 모든 인간과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추구하며 정부나 국가와 같은 권력기구에 반대하는 아나키즘에 자연스럽게 공감했던것으로 여겨진다. 이회영의 아나키즘 수용은 어느 날 갑자기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자신이 평소 품고 있던 자유·평등사상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이회영은 “지배없는 세상, 억압과 수탈이 없는 세상”을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 자신의 일관된 정견이며, “반드시 四民平等한, 만인이 자유평등을 누릴 수 있고, 따라서 공평하게 다같이 행복을 누리며 자유발전할 수 있는 기회가 균등하게 부여될 수 있는 사회”를 건설하고자 하는 것이 자신의 정치사상이고, 자신의 이상은 자유합의적인 자유연합의 이상과 합치한다고 설명하면서,“ 내가 의식적으로 무정부주의자가 되었다거나 무정부주의로 전환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으며, ...(중략)... ‘지금이 옳고 지난 것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는[覺今是而昨非]’식으로 본래는 딴 것이었던 내가 새로이 방향을 바꾸어 무정부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라고 술회했다. 즉 자신이 이러한 사상을 가지게 된 것은 갑자기 이루어진 180도의 사상전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본래 자유주의적인 자유사상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경 독립운동 단체 관계[편집 | 원본 편집]

그는 군사통일회의나 대조선공화국에 참여하지 않았다. 참여 거부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는 또 다른 감투싸움을 우려한것으로 전해진다. 이회씁은 상해 임시정부의 외교독립노선에 반발하여 직접행동으로 맞서고 있는 의열단과 다물단에 간접적으로 관여하씀다.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대부분인 의열단에 대한 지도하기도 하였으며, 채호와 함께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할 무렵에도 함께 의견을 나누었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