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원 (1892년)

김용원 (1892).jpg

金庸源.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초년기[편집 | 원본 편집]

1892년 3월 24일 충청남도 대전군 기성면 원정리 덕동(현 대전광역시 서구 원정동 덕골)에서 경주 김씨 참봉 김도의와 은진 송씨 송헌달의 딸 사이에서 태어났다. 자는 중옥(仲玉), 호는 강산(剛山) 또는 무이천(無二天)이고, 이명은 백상열(白相悅)이다. 그는 송애 김경여의 8대손으로 양반 가문에서 태어났으나, 자산은 별로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훗날 일본 형사에게 심문받을 때 생계 상태는 어떠냐는 질문을 받자 "본가는 농업을 하고 있었는데 생계는 곤란하다"라고 답변했다. 또한 자산 정도에 대해 "논이 2두락 있으나 값은 모른다. 또 동산은 별로 없다. 그리고 부친의 명의로 되어 있고 내 명의의 것은 조금도 없다."고 대답했다.

김용원은 어려서부터 품성이 청수하고 맑고 지혜로웠으며 유희를 즐겨하지 않았다 하며, 7세부터 부친에게 한학을 수학하였다. 이때 번거롭게 감독을 하지 않아도 학업을 열심히 했다고 한다. 이후 대전에서 계부 김준의한테 한학을 수학하던 중 1910년 한일병합 소식을 듣고 울분을 토로하다 신학문을 수학하고자 수학했다. 그는 1915년에 집필한 수필에서 당시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나는 본래 강래[1] 출신으로 계부한테 수학할 때 시대가 마침 이러하여 독서열이 나지 않고 눈물만 떨어지니 (중략) 약간의 동무와 무리를 지어 강을 건너 북쪽을 향하니, 내 나이 24살이라.

김용원은 상경한 뒤 중동학교에 입학한 것으로 보인다. 중동학교는 1906년 4월 창립된 대표적인 사립학교로, 김용원이 입학했을 당시에는 야간부만 존재했다. 그는 1912년 중동학교에서 1학년 과정을 마치고 1913년 4월 12일 휘문의숙 2학년으로 진학했다. 그는 휘문의숙에서 한국사, 외국사, 지리, 물리, 화학, 언어, 수신, 국어, 산술, 식물, 농업, 도화, 창가, 체조 등 여러 과목을 익혔다.

학적부에 따르면, 그의 2학년 성적은 그다지 좋지 않았으나 3학년 때는 38명 중 5등, 4학년 때는 35명 중 11등을 하는 등 우수한 편이었다. 한문과 창가 등의 과목은 아주 우수했고, 본사와 기하, 영어, 조어 등도 우수했다. 반면 대수나 화학은 점수가 낮았으며, 일본어 역시 저조했다. 다만 결석은 많았던 것 같다. 2학년 때는 768시간 중 145시간(19%), 3학년 때는 844시간 중에 98시간(12%), 4학년 때는 424시간 중에 127시간(30%)를 결석한 것으로 되어 있다.

학적부에 따르면, 그는 서울 중부 전동의 조철희의 집에서 거주한 것으로 되어 있다. 조철희는 43세의 광업회사 지배인이며 그와는 친척간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기록에 따르면, 휘문의숙의 1년 학비가 50원이었다고 한다. 이종사촌 형인 김유희는 당시의 김용원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겉으로는 학업을 하는 유학생이었으나, 속으로는 국체를 회복하려는 마음이 간절하였다. 항상 학도들 가운데 뜻이 맞는 친구를 취하여 깊은 교제를 하였다. 간혹 충의의 마음을 이기지 못하여 자주 비분강개하여 눈물을 흘리고 격렬한 언동을 하였기 때문에 왜경들로부터 사찰의 대상이 되었다.


- 김유희, <강산 김용원선생 사실기>, 1934년 7월.

또한 김유희는 김용원이 장성하면서 신체가 장대하고 용모가 엄숙했으며, 언행 또한 위엄이 있었고, 심성이 청렴결백하고 모든 일에 정직한 마음으로 선을 취하고 악을 배척했다고 묘사했다. 또한 완력이 뛰어나 남을 돕는 일을 꺼리지 않는 등 의사(義士)의 풍모가 있어 모는 이들이 공경하고 중하게 여겼다고 한다. 김용원은 휘문의숙에 다닐 때 여러 편의 수필과 시를 지어 망국인으로서의 깊은 회한과 독립 의지를 표명했다.

1915년 2월에 집필한 4절의 시에 이러한 그의 의지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제1절은 "우습고 우습도다", 제2절은 "애통하고 애통하다", 제3절은 "울고 싶다 울고 싶다"로 문장이 시작된다. 제 4절에서는 "우습되 아프고, 통탄스럽되 눈물이 나오는 것은 부끄러움에 연유한 것이 아닌가"라면서 나라를 잃은 부끄러운 민족임을 뼈아프게 생각했다. 그는 여기서 더 나아가 민족이 막힘을 뚫고 움츠림을 떨치고 일어날 것을 맹세하며 선비의 정신을 일으켜 복수하겠다고 다짐했다. 또한 1915년 7월에 집필한 <몽견초패왕>에서, 그는 꿈쏙에서 시서를 불사르고 집을 불태우고 가슴에 맺힌 한을 남김없이 풀어냈으며, 초패왕으로부터 한 권의 책과 장검을 받았다고 서술했다.

국내에서의 독립운동[편집 | 원본 편집]

1916년 3월 24일 휘문의숙을 졸업한 김용원은 그해 5월 경 청주의 친구 이중각과 함께 이종사촌 형인 김유희를 만나 '흥복'과 '독립'의 계획을 논의했다. 김유희는 자신은 기질이 나약하고 몸에 병이 있어 뜻을 같이 없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격려했다.

모든 일에 지성이 있으면 신명도 감응할 것이다. 대사를 도모하려면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할 것이며, 일에 임하여 규합함에는 먼저 용모를 보고 그 심지와 의기를 살펴 서로 화합된 연후에 계획을 도모해야 할 것이다. 또한 그대의 성품이 너무 강하니 모름지기 부드러움이 강한 것을 이긴다는 마음으로 천하의 선비들을 포용해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위로는 재상부터 아래로는 지방의 군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왜인들에게 아첨하는 자를 셀 수가 없다. 함께 도모할 사람은 백 명 가운데 두세 명이 안될 것이다. 그대는 모름지기 조심하고 조심해야 할 것이다.

이후 그는 이중각과 함께 보은의 법주사에 들어가 항일의 벙법을 협의하였으며, 6월에는 안변의 석왕사로 옮겨 동지들을 규합할 것을 협의했다. 그러던 중 조선총독이 함경도 지방을 시찰하러 오자, 그는 총독의 뒤를 밟으며 기회를 보았다. 그러나 그의 행동을 이상하게 여긴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체포되었고, 안병경찰서에 수감되었다가 20여 일 만에 풀려났다. 1917년 공주의 마곡사로 들어가 승려학교에서 얼마 동안 가르치며 독립사상을 비밀리에 전수했으며, 1918년 봄에는 일본으로 들어가 덴노를 암살하려 했으나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귀국하여 호남 지방 등지에서 동지를 모았다.

하지만 그의 행적이 일본 경찰에게 탐지되자 충남 금산군 진산의 태고사에 잠시 은거하였다. 이때 그는 절의 동쪽과 서쪽에 석탑을 쌓았는데, 현재도 그 탐의 일부가 남아 있다고 한다. 1919년 3.1 운동이 발발했을 때, 그는 만세시위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아무런 소득이 없자 크게 실망했다. 1924년 신문 조서 때, 그는 3.1 운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대정 8년 3월의 만세소동때 조선은 독립한 것으로 생각하고 나는 당시 향리에 있으면서 크게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소동은 대단하였지만 결국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너무나 헛된 소동에 불과했다.

1919년 8월 서울 공평동의 전동여관에서 이면호로부터 대동단 가입을 권유받은 그는 이면호의 소개로 전협을 만나 대동단에 가입했다. 이면호가 어떤 인물인지는 현재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그에 대해서는 김용원 신문 조서에서만 나왔고, 그 외의 대동관 관련 자료에는 일체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대동단에 가담한 그는 의친왕을 상하이로 망명시키기 위한 계획에 참여하여 권총 1자루를 받았다.

1919년 11월 9일 오후 8시, 김용원은 전협 등 동지들과 함께 서울 공평동 3번지의 셋집에 집결했다. 의친왕은 밤 11시경에 도착하였고, 전협은 의친왕에게 상하이 행을 권유하며, 이는 고종 황제의 독살과 일본의 조선 병탐의 부당성을 만방에 알리는 데 그 뜻이 있다고 밝혔다. 의친왕은 처음에 당황헀고, 의친왕을 모시고 온 정운복은 상하이 망명을 반대했다. 이때 김용원은 나창헌, 동창률과 함께 정운복을 옆방으로 끌고 가 정운복을 방바닥에 메어 꼽고 권총을 빼어 들었다. 정운복은 사색이 되어 뜻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의친왕은 대동단원들의 뜻을 받아들여 상하이 행을 결심하고 전협이 미리 준비해 둔 옷을 입고 초라한 여행자로 변복했다. 의친왕은 준비해 둔 인력거에 전협과 함께 탔고, 김용원은 정운복에게 재갈을 물린 채 나창헌, 한기동, 송세호 등과 함께 다른 인력거에 탔다. 새벽 3시경 세검정을 지나 날이 밝을 무렵에 고양군 은평면 구기리에 도착하였고, 다시 수색역까지 이르자 대동단원 이을규가 여행증명과 차표를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의친왕은 11월 10일 오전 11시발 안동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일행은 이을규, 정남용, 한기동, 송세호 등 모두 5명이었다. 이 중 한기동은 개성에서, 송세호는 신의주에서 하차하고 나머지 3명이 신의주를 따라 안동역에 도착했다. 이들은 안동의 이륭양행 주선으로 배를 타고 상하이로 향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안동역에는 이미 일본 경찰이 진을 치고 있었으며, 결국 의친왕과 정남용, 이을규가 체포되었다. 이후 대동단원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 선풍이 이어져 전협을 비롯하여 최익환, 한기동, 송세호, 최성호 등 30여 명이 체포되었다.

한편, 김용원은 의친왕 일행을 수색역까지 안내한 뒤 나창헌 등과 함께 정운복을 끌고 북만 밖의 산속에 있는 외딴 집에 은신하였다. 두 사람은 정운복을 한 방에 유폐시키고 교대로 감시했다. 그런데 전협 등이 모조리 체포되었다는 소식이 들어오자, 김용원은 대전의 집으로 내려와 숨었다. 그는 상하이로 가기로 하고 그 전에 충청도 논산과 공주, 금산 일대를 돌며 700 여원에 달하는 군자금을 모집했다. 이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총장 노백린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한편, 그는 양주 출신의 의병장 김규식과도 연결되어 함께 활동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유희의 강산사실기에 따르면, 김용원은 김규식, 이면호 등과 함께 피를 마시고 동맹하여 '한성사령부'를 설치하고 그의 부실인 김우승이 각지에 연락을 취하여 강중견, 김성택, 채근병, 이범수 등을 규합하여 활동하였다고 한다. 이로 볼때 그는 1919년 12월부터 국내에서 군자금 모금 운동을 전개할 때 양주 의병장 김규식과도 연결이 되었던 듯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편집 | 원본 편집]

1920년 3월 27일, 김용원은 부실 김우승과 동지 이덕화와 함께 변장하고 신의주까지 간 뒤, 그곳에서 배를 타고 안동현으로 망명했다. 이어 배를 타고 상하이로 이동하여 먼저 망명한 대동단원 나창헌을 만났다. 이어 1920년 11월 철혈단을 조직하고 나창헌을 단장으로 추대했다. 철혈단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정책에 반대하여 '철혈'과 같은 정신으로 의열투쟁을 전개하고자 설립된 독립운동 단체였다. 그렇지만 그는 임시정부 활동에도 참여하여 1921년 5월 9일 의정원 상임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후 경무국장 김구가 내무총장으로 선임되자, 그는 후임으로 경무국장에 임명되었다.

김용원은 1921년 9월 29일 개원한 제9회 임시의정원에서 제7과의 상임의원으로서 김태연, 조완구, 윤기섭, 김원식 등과 함께 활동했다. 이와 관련해서 임시의정원 1921년 10월 5일 회의기록에 그의 발언 내용이 남아 있다. 이날 회의에선 '임시예산 정부일임 요구의 안'이 안건으로 회부되었다. 이 안건은 임시정부의 예산을 정부에 일임하여 달라는 정부의 요구에 대한 처리의 건이었다. 이때 대다수 인사가 동의했지만, 김용원은 반대했다.

차안대로 승낙한다 하면 일이 잘못 되겠소. 가령 정부에 쓸 것을 대략이라도 예상할진대 충분히 설명하여 주고, 쓸 것을 알지도 못하고 승낙한다함은 무의미한 것이라 차안을 퇴각함이 좋을 줄 아오.

즉, 그는 정부에서 사용할 예산을 책정하지도 않고 일체를 위임하여 달라는 정부의 요구는 무리한 요구라며 반대한 것이다. 한편 같은 날 '태평양회의에 출석할 대표인선 동의요구안'이 상정되었다. 이 안건에서는 임시정부 대표로서 이승만서재필을 파견하기로 했는데, 김용원은 찬성의 뜻을 밝혀 요구안이 통과되게 했다. 또한 1921년 11월에는 태평양회의에 관한 임시정부의 후원과 지도를 목적으로 설립된 외교후원회에 간사로 선임되어 태평양회의 축하회를 거행하는 동시에 홍진, 신익희 등 25명과 함께 연서한 청원서를 재미 각국 대표자에게 송부했다.

대한민국 임시국회의원 등은 세계의 평화, 동아의 행복 및 정의 인도를 위하여 관계 열국의 국회 및 지방의회에 대하여 한국독립 자주의 조건을 태평양회의에 제출하고 완전한 해결을 수행하여 인류의 행복을 증진할 것을 바람.

1922년 2월 18일, 김용원은 임시정부 의정원 의원을 사임했다. 후임으로는 김구가 선임되었다. 그가 사임한 이유는 분명하지 않으나, 그 외에도 황중현, 이진산 등 많은 이들이 의원직을 사임한 것을 봤을 때 임시정부의 내부 문제와 관련이 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임시정부는 태평양회의에서 한국의 문제가 거론 조차 안 되자 대표 이승만이 일처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게 아니냐는 불신이 팽배했다. 사실 이승만은 1922년 1월 한국의 독립을 요구하는 문서를 태평양회의에 제출하는 등 열심히 활동했지만, 결과가 따라주지 않아 비난에 휩싸였다. 이에 친 이승만 계열 인사들이 반발했고, 임시정부는 분열하였다. 결국 1922년 2월 하순 이시정부 내각은 총사직 했다. 김용원은 이러한 임시정부의 모습에 회의를 느끼고 사직한 것으로 보인다.

김유희의 <강산 김용원선생 사실기>에 따르면, 김용원은 1921년 족제 김노원과 김태원 등 동지들과 함께 사찬성 주석을 방문하여 대접받고 육군군관학교에 입학하였다고 한다. 이때 그가 황포군관학교에 입학했다고 알려졌지만, 황포군관학교는 1924년 6월에 개교했으니 입학할 수 없다. 그가 상하이로 데리고 간 친척 동생 중에 대전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했던 김노원이 있었는데, 김노원은 1923년 운남강무당에 제16기로 입학한 사실이 확인 됐다. 이로 볼 때, 김용원은 운남강무당에 입학하여 군사학을 수학한 것으로 추정된다.

김유희의 <강산 김용원선생 사실기>에 따르면, 김용원은 1년간 군사학을 수학한 뒤 북경과 만주를 오가며 무장투쟁을 위한 계획을 추진했다. 그러나 그는 곧 병에 걸렸다. 1924년의 신문조서에 따르면, 그는 1923년 1월경 늑막염에 걸려 베이징의 일화대인병원에 입원했다고 한다. 그가 입원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일본 경찰은 그의 상태를 고향 집에 전보로 알렸다. 이에 동생 김독원이 베이징으로 가서 김용원을 고향집으로 데려왔다.

체포, 그리고 옥고[편집 | 원본 편집]

1924년 4월 귀향한 김용원은 요양 생활을 하면서 일본 경찰의 감시를 받았다. 그는 이런 상황에서도 비밀리에 군자금 모금을 추진했다. 그해 8월 말 서울의 창성동에 사는 오근영을 만났고, 오근영의 안내로 수원군 수원면 남창리에 사는 이규연을 찾아가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공채를 내보여 8원 50전을 수령했다. 그러나 이규연이 9월 15일 수원경찰서에 신고하면서 그의 행적이 발각되었다. 수원경찰서로부터 신고 정보를 입수받은 동대문경찰서는 창성동에 살고 있던 오근영을 9월 16일 체포했다. 이와 동시에 사법계 형사들을 대전으로 급파하여 고향 집에 있던 김용원 역시 체포했다.

김용원은 체포된 다음날인 9월 17일 동대문경찰서에서 신문을 받았다. 그는 신문 자리에서 자신의 성명, 나이, 직업, 주거, 본적, 교육정도, 재산정도, 가족 관계, 전과 여부 등을 밝힌 뒤, 대동단에서의 활동, 이규연에게 공채를 판 일 등을 집중 추궁받은 끝에 결국 실토했다. 다음날 신문에서 대동단에 참여하게 된 과정과 의친왕을 망명시키려던 과정에 대해 자백했다. 공판은 1924년 10월 29일 오전 9시에 경성지방법원에서 열렸고, 검사는 김용원에게 징역 3년, 오영근에게는 징역 1년형을 구형했다.

김용원의 변호를 맡은 김병로는 이규연을 증인으로 불러 김용원과 오근영이 공갈을 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겠다며 증인 출석을 신청했으나, 검사는 지금까지 충분히 조사했으니 필요하지 않다는 의견을 말하고 판사 역시 변호인의 의견을 각하했다. 이후 김병로는 제령위반의 건은 인정하지만, 공갈의 부분에 대하여는 피해자의 진술과 피고들의 진술이 서로 달라서 증명이 충분하지 못하다며, 무죄의 판결이 있기를 바란다고 변호했다. 이어 김용원이 현재 신병 때문에 고생하고 있으니 집행유예를 내려줄 것을 바란다고 변론했다.

김용원과 오영근에 대한 판결은 11월 3일 오전 9시에 열린 공판에서 있었다. 김용원은 징역 2년, 오영근은 징역 8개월을 받았다. 김용원은 11월 5일 <상소권포기신청서>를 경성지방법원장에게 제출하여 상소를 포기했다. 그 후 병이 재발한 그는 11월 7일 형집행저리 처리되어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그는 집에서 요양하면서 동지들과 함께 영남지방을 다니면서 수양했다. 그러던 중 병이 쾌차하자, 안동지방 등지에서 동지를 모아 독립운동을 꾀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일제는 1927년 1월 20일 그에게 내렸던 형집행정지를 취소하고 다시 체포하여 공주형무소에 구속했다. 그러다 덴노의 은사라며 형량을 1년 6개월로 감형하였지만, 다시 '강도교사죄'를 덧붙여서 1927년 2월 24일 징역 2년 6개월을 선고해 형량이 오히려 늘어났다. 김용원은 감옥에서의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병이 재발했다. 이에 일제는 1927년 3월 15일 그의 형 집행을 다시 정지시키고 병보석으로 석방했으나, 감시를 철저히 했다.

옆집에 살았던 황규옥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8살 때(1927년) 집 앞에 조선 버드나무가 있었는데, 어느 날 오전 10시경 수십 명이 그곳에 모여 집회를 했다고 한다. 김용원의 집에서 음식을 준비했는데, 콩나물 반찬에 보리가 섞인 밥을 옹기그릇에 퍼 먹었고, 막걸리가 동이채 있었으며 약 2시간 정도 집회를 가진 후 두계 쪽으로 떠났다. 그런데 그날 저녁 양복 입은 경찰들이 와서 김용원을 찾자, 황규옥의 부친이 지팡이를 짚고 나와서 야단쳤다고 한다. 이에 경찰들은 뒷산 언덕 위에서 사흘 동안 감시했다고 한다. 또한 황규옥은 김용원이 외출할 때 방갓을 쓰고 지팡이를 집고 행전을 치고 다녔다고 증언했다.

일제는 김용원의 병이 조금 나아지자 1928년 10월 25일자로 행집행정지를 취소하고 다시 구속시키려 했다. 그는 11월 18일 오후 6시경 부여경찰서 은산주재소에서 파견된 도순사에 의해 부여군 은산면 금공리에서 체포되었다. 이후 압송되던 중인 오후 6시 반경에 회곡리 노상에서 순사를 때려눕힌 후 탈출했다. 그는 조병채의 안내로 청양, 부여 일대를 돌며 은신했다. 그러나 논산군 양촌면 임화리의 양지학 집에 은신하면서 중국으로 망명할 계획을 세우던 중 일본 경찰의 습격으로 체포되었고, 11월 21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그는 이 일로 12월 2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받았으며, 그를 숨겨준 조병채, 조돈행, 이진옥, 이덕재의 아내 이씨 등도 모두 체포되어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김용원은 잔여 형기를 채우기도 전에 다시 12월 27일 공주지방법원에서 '강도교사죄'로 징역 1년 6개월 형을 추가로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러다 수감된 지 5년 2개월 만인 1934년 2월에 병보석으로 출감하였으나, 1934년 6월 13일 옥고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고향에서 병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 김용원에게 건국포장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14년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이돈직 사건[편집 | 원본 편집]

2003년 12월 17일, 오마이뉴스는 김용원의 공적이 가짜 독립운동가의 공적으로 끼어넣어졌다고 폭로했다. 보도에 따르면, 전직 국회의원을 지낸 계룡건설 이인구 명예회장의 조부 이돈직은 사후에 대전애국지사숭모회에 의해 독립운동가로 떠받들어졌으며, 은평공원, 효평동, 대덕구 비래동산 등 여러 곳에 그의 공적을 기린 비석이 세워졌는데, 비석의 내용은 이돈직이 김용원과 함께 독립운동을 했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중 은평공원에 세워진 것은 2000년 대전시청이 대전애국지사숭모회에게 1260만원의 보조금을 지원하여 세워진 김용원의 생애비와 휘호비인데, 비석 앞면에 이돈직의 생애와 휘호가 첨가되었고 김용원의 행적은 뒷면에 새겨졌다.

그러나 실제로 이돈직이 독립운동을 했음을 입증하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았으며, 국가보훈처 역시 이돈직의 독립운동 행적을 확인할 자료가 불충분하다고 밝혔다. 게다가 김용원의 독립운동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원정동 김용원 공적비' 역시 바꿔쳤다고 한다. 1990년 대전시장이 원판 비문을 세겼는데, 1997년 비문을 떼어내고 다시 새겨넣는 과정에서 이돈직의 이름을 임의로 기입했다는 것이다.[2]

오마이뉴스 보도 후 논란이 확산되자, 대전 서구청 관계자는 "아직 현황을 파악중이지만 당초 대전애국지사숭모회가 세우기로 한 생애비와 실제 세운 비가 내용이 서로 다른데다 엉뚱한 사람의 생애비가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며 "김용원 선생의 후손들과 협의해 비문 수정 등 조치를 취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휘호비의 경우에도 불법으로 세워진 만큼 건립 경위를 확인해 수정 또는 철거 조치하겠다"고 덧붙였다.[3]

2004년 2월 16일, 대전서구청은 은평공원에 세워진 이돈직의 생애비를 철거했다. 서구청 관계자는 “세워진 비문이 사실과 다르다는 문제제기에 따라 비문을 철거하고 관련자들을 대상으로 사실확인 작업을 벌이고 있다”며 “정확한 진위가 확인되는 대로 비문 내용을 수정해 다시 세울 예정”이라고 밝혔다.[4]

그러나 대전시청은 휘호비 철거에 대해서는 소송이 진행 중인 상황이니 곤란하다고 밝혔다.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이 조부의 독립운동 행적이 허위라고 폭로한 오마이뉴스와 MBC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기 때문에, 재판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비문을 수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용원 선생 후손인 김옥경씨는 “국고보조사업의 집행 과정에 대한 관리감독 소홀로 조상의 행적이 엉터리로 작성된 책임을 미루는 것은 직무유기”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씨는 “현재 이와 관련해 누구와도 법적 소송이 진행 중인 건은 없다”고 덧붙였다.[5]

2006년 2월 13일, 대전지방법원은 이인구 명예회장이 오마이뉴스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에 대해 기각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이돈직이 반일 항일투쟁을 하고 애국지사 김용원과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원고 측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실증적인 자료를 찾아보기 어려운 점 등에 비춰볼 때 기사내용이 허위라고 단정할 수 없다"며, 대전애국지사숭모회가 김용원 선생의 휘호비와 생애비를 세운다며 대전시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예정에 없던 이돈직의 휘호비와 생애비를 앞면에 세웠다"는 <오마이뉴스> 보도에 대해서도 "사실이 인정되는 만큼 허위라 볼 수 없다"고 덧붙였다.

재판부는 또 <오마이뉴스>와 비슷한 취지의 내용을 보도한 MBC PD수첩의 '친일파는 살아 있다 3'편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도 같은 취지로 "이유 없다"며 기각했다.다만 재판부는 MBC < PD수첩 >의 보도내용 중 "이돈직이 친일파라는 듯한 인상을 준 보도내용은 명예훼손이 인정된다"며 원고 측에 모두 3천만원을 지급하고 '정정보도' 하라고 판시했다. 이에 대해 변호사는 PD는 '친일파라는 언급은 이돈직이 아닌 다른 사람을 지칭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형사사건에서도 이를 인정했다"며 "MBC측과 상의해 항소 여부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6]

2006년 4월 13일, 민족문제연구소 대전지부와 615공동선언실천민족공동위원회 대전충남본부, 과거사청산 특위는 은평공원 비문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대전시 염홍철 시장에게 보내는 공개질의서를 공개했다. 이들 단체는 성명에서 "대전시가 '확인되지 않은 독립운동 행적'을 기리는 비문 수정 요구에 6년째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며 "이는 역사왜곡을 부추기는 행태'라고 지적했다. 이어 "비문에 당초 사업목적과 다른 엉뚱한 사람의 공적을 끼워 넣은 것이 명확히 드러났음에도 염 시장이 국정감사장에서까지 동문서답으로 일관했다"며 "이는 역사왜곡을 묵인, 조장하는 행위로 철거하지 않을 경우 응징에 나설 것"이라고 경고했다. [7]

2007년 1월 15일, 오마이뉴스는 아직도 은평공원 비문이 수정되지 않은 까닭에 대해 대전시청 관계자에게 질의했다. 관계자는 "보조금을 지원한 해당단체에 수 차례 시정을 촉구하고 부탁도 했지만 시정조치를 하고 있지 않다"며 "대전시로서는 행정행위가 종료된 만큼 더 이상 조치할 방도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사업시행자가 엉뚱한 사람의 비석을 세우는 잘못은 했지만 법적으로 위법 여부를 따질만한 사안은 아닌 것으로 판단했다"고 강변했다고 한다. 이에 앞서 대전시는 시민사회단체의 문제제기에 대한 답변을 통해서는 "비문 수정 및 삭제는 사업을 벌인단체가 애국지사 김용원 선생 후손과 협의해 할 일로 대전시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비영리단체 국고지원법에는 사업계획서와 다른 용도로 보조금을 사용했을 경우 환수할 수 있도록 하고 있고, 허위사실을 기재한 경우 징역 또는 벌금형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때문에 대전시가 편파적인 행정을 넘어 의도적으로 직무를 유기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되었다. 김용원의 후손인 김옥경씨는 "대전시가 잘못 세워진 비문의 인물이 전직 국회의원을 지낸 건설회사 명예회장의 조부이기 때문에 문제해결을 꺼리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8]

2009년 7월 13일, 대전시는 은평공원에 세워진 이인구 명예회장 조부 이돈직의 휘호비를 철거했다. 이날 휘호비는 중장비에 의해 쪼개져 건축 폐기물로 실려 나갔다. 휘호비 철거는 비문을 철거하라는 대전고등법원 판결에 따른 것이었다. 대전고등법원은 지난달 원고인 대전시와 피고인 대전애국지사숭모회에 보낸 조정결정문을 통해 "대전시가 휘호비를 임의 수거해가고 휘호비를 세운 애국지사숭모회는 이의 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조정안을 내놓았다.[9]

2019년 7월 24일, 대전 대덕구청은 대덕구 무궁화동산에 있는 이돈적의 독립운동 행적을 담은 공적비와 기념비를 철거했다. 이 공적비와 기념비는 이인구 계룡건설 명예회장이 고문으로 있던 대전애국지사숭모회가 1994년에 세운 것이었다. 공적비 이름이 '기미 3.1독립만세기념비건립비'로 돼 있지만 실제 내용은 "이 지역에 만세운동을 지휘 주도한 선열로는 의병인 창의군 일대 중군장 이돈직 선생이었다"라고 명시되어 있었다. [10]

이리하여 김용원의 공적을 가로채어 독립운동가로 둔갑한 이돈직의 기념물은 대부분 철거되었으나, 1997년 한국독립유공자협회가 대전 동구 효평동에 세운 비문은 현재까지 남아 있다. 이 비문에는 이돈직의 의병 활동과 만세운동을 기록하고 있는데, 한국독립유공자협회는 수정 또는 철거 요구를 지금까지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