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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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靖和. 본명은 정묘희(鄭妙喜), 호는 수당(修堂).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82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00년 8월 3일 서울에서 부친 정주영(鄭周永)과 모친 김주현(金周鉉) 사이에 2남 4녀 가운데 셋째 딸로 태어났다. 조부 정낙용은 무관으로 1896년 고종이 아관파천 할 때 고종과 세자를 호위했고 공조판서를 지냈다. 그리고 아버지 정주영도 무과에 급제한 후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경상좌도 병마절도사 및 경기, 충청도의 관찰사를 역임했다. 조부는 1904년에 모든 관직에서 물러났고, 부친도 1905년 수원유수를 마지막으로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두 사람이 한일병합 후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은 것을 볼때 이들이 관직을 그만 둔 것이 일제의 침략과 관련이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정화는 명문가에서 태어났지만 체계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다. 부친이 여자에게 교육시키는 걸 극도로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회고에 따르면, 작은 오빠 봉화가 서당에 다닐 때 몰래 따라다니며 글을 읽었다고 한다. 그녀는 아버지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어렵게나마 천자문을 떼었고, 소학(小學)까지 익혔다. 1910년 가을, 그녀는 안동 김씨 가문의 김의한(金毅漢)에게 시집갔다. 김의한의 아버지, 즉 정정화의 시아버지는 농상공부대신, 경상도, 충청도 관찰사를 지낸 김가진이었다.

이후 그녀는 신학문을 익힌 남편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러다가 1914년 조부 정낙용이 사망하자, 그녀는 할아버지의 3년상을 치른 후 충청남도 예산의 대술면 시산리로 이사했다. 1930년대 말 일제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정정화의 집안이 소유한 토지는 154정보, 즉 46만 2천 평에 달했다고 한다.

3.1 운동 직후인 1919년 10월, 남편 김의한이 부친 김가진과 함께 상하이로 망명했다. 당시 김가진은 대동단 총재로 추대되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고자 했고, 임시정부 내무총장 안창호는 특파원 이종욱(李鍾郁)을 국내로 보냈다. 이종욱은 대동단 간부인 전협 등을 만나 협의하고, 극비리에 김가진의 망명을 추진했다. 김가진과 김의한은 이종욱의 안내로 10월 10일 경의선 열차를 타고 신의주를 거쳐 만조 안동에 도착했고, 안동에서 다시 이륭양행이 운영하는 배를 타고 10월 30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이무렵, 정정화는 결혼한 지 8년 만에 첫 딸을 낳았지만 불행히도 갓 태어난 딸이 죽어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가 남편이 자신에게 말도 안하고 시아버지와 함께 상하이로 망명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녀는 어떻게 할 지 고민했다. 훗날, 정정화는 이때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첫 아이를 잃은 갓 스물 아낙네의 말 못할 심정, 남편 없는 시댁에서의 고달픈 시집살이, 며느리를 친딸처럼 감싸주시고 귀여워해 주시던 시아버님의 구국이라는 대의를 위한 망명, 이 모든 조건이나 상황은 앞으로 내가 어떻게 처신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판단을 흐리게 하는 안개였다. (중략) 짧디짧은 하루해도 이 궁리 저 궁리로 여삼추같이 길게 느껴지곤 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무엇인가 내 길을 찾아야겠다는,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거센 욕구가 일어났던 것이다.

- 장강일기.

정정화는 고민 끝에 자신도 상하이로 망명하기로 결심했다. 그녀는 친정아버지를 찾아가 허락을 받고 8백원을 받은 뒤 1920년 1월 팔촌 오빠 정필화(鄭弼和)의 안내를 받으며 서울역에서 기차를 타고 의주를 거쳐 봉천에 도착했다. 그리고 봉천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산해관, 천진, 난징을 거쳐 상하이에 도착했다. 그녀는 프랑스 조계 패륵로 영경방 10호에 거주하던 시아버지와 남편과 재회하고 이곳에서 상하이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정정화가 상하이에 온 것은 독립운동을 목적으로 온 것이 아니라 시댁에 남아있는 것보다는 시아버님 곁에서 시중을 들어드리는 것이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상하이에서 시아버지를 모시면서 이시영, 이동녕, 안창호, 신규식 등 임시정부 요인들을 가까이 대했다. 그러던 중 시아버지와 남편 뿐만 아니라 임시정부 요인들의 생활이 매우 어렵다는 걸 알게 된 그녀는 그들을 위해 국내에 들어가 자금을 구해오기로 결심했다. 국경을 넘어 일제의 경비를 피해 자금을 몰래 구해와야 하는 어려운 일을 여성의 몸으로 감당한다는 건 매우 힘들 게 분명했지만, 그녀는 마음먹은 바를 과감히 실천하기로 했다. 조완구는 그런 그녀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녀는 조자룡이다. 작은 몸 전체가 담(膽)덩어리다.

정정화는 법무총장을 맡고 있던 신규식을 찾아가 자신이 국내에 들어가 자금을 구해오겠다고 밝혔고, 신규식은 그녀를 '특파원'에 임명하여 국내에 마련한 연통제, 교통국 인사들과 연계하여 자금을 모집하도록 했다. 이후 시아버지 김가진으로부터 철저한 사전 지시를 받은 그녀는 1920년 3월 초순에 상하이를 출발해 국내로 잠입했다. 그녀는 먼저 안동에서 임시정부 연락 업무를 맡고 있던 최석순을 만나 그의 안내를 받으며 압록강 철교를 건너 신의주에 도착했다. 이후 신의주에서 비밀 연락소인 이세창양복점을 찾아가 이세창(李世昌)의 도움을 받고 서울에 도착했다. 그녀는 서울역 건너편 세브란스 병원 관사에 있는 신규식의 친형 신필호 박사를 찾아갔고, 신필호 집에 머물며 연통국에서 일하는 인사들과 접촉했다.

정정화는 서울에서 210여일 간 머물며 자금을 모집한 후, 4월 초 자금을 가지고 다시 상하이로 출발했다. 그녀는 먼저 신의주의 비밀연락소인 이세창양복점에 들어간 뒤 압록강을 건너려 했지만 일제 경찰의 경비 때문에 철교를 건널 수 없었다. 이에 그녀는 배를 이용해 압록강을 건너기로 했다. 훗날 그녀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신의주에서 안동으로 빠져나가는 것은 많은 위험이 따랐다. 압록강 철교를 건너는 것이 아니라 배로 강을 건너야 했기 때문에 낮에는 움직일 수가 없었고, 밤이 되기를 기다려 이세창씨의 안내로 양복점을 빠져 나갔다. 압록강 하류에 도착한 우리는 신발을 벗어들고 진흙과 자갈이 섞여 펼쳐진 강변을 따라 맨발로 삼십 리 길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사방이 깜깜하고 바닥이 고르지 않은 밤길이어서 이세창씨의 바로 한 걸음 뒤에서 바짝 뒤꽁무니를 따라가자니 여간 벅차고 힘든 길이 아니었따. 거의 세 시간쯤 걸어 북화동에 이르렀을 때 어둠 저편에서 쪽배 하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연락이 닿아 있는 모양이었다.

- 장강일기

그렇게 압록강을 건넌 그녀는 안동을 거쳐 상하이로 무사히 귀환했다. 이후 그녀는 1921년에 다시 국내로 잠입해 친정 집으로 내려가 친정 아버지로부터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받고 개성을 거쳐 김규식의 이질(姨姪)인 서재현(徐載賢)을 대동하고 상해로 귀환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22년 6월에 3번째로 자금 모집 임무를 맡아 국내로 향한 그녀는 안동현에 도착했다. 이때 동행인 이욱(李昱)이 워낙 자신 있다고 장담하는 바람에 열차가 아니라 인력거를 타고 압록강을 건너기로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꼬리가 잡혔다. 정정화 일행은 압록강 철교 위에서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이틀 동안 심문을 받은 끝에 신분이 탄로났다. 이후 서울 종로경찰서로 압송되어 조사를 받다가 풀려났고, 시아버지 김가진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자 1922년 7월에 장례식 참석을 명분으로 시동생 김용한을 대동하고 상하이로 돌아갔다.

정정화는 임시정부 요인들의 뒷바라지를 톡톡히 수행했다. 당시 임시정부 요인 상당수는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냈다. 특히 1920년대 중반 무렵 임시정부는 이동녕, 이시영, 조완구, 안창호, 김구 등 연로한 이들이 가까스로 이끌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남편 김의한이 영국인이 경영하는 전차회사에 취직한 덕분에 적으나마 수입이 있었고, 이를 바탕으로 끼니를 해결하기 어려운 그들에게 식사를 제공했다. <장강일기>에 따르면, 김구는 배가 출출할 때면 "후동 어머니, 나 밥 좀 해줄라우"하며 찾아왔고, 그녀는 그때마다 식사를 제공했다고 한다.

1932년 4월 훙커우 공원 의거가 결행 된 후, 임시정부 요인들은 일제의 탄압을 피해 상하이를 떠나 항저우와 가흥으로 피신했다. 이때 정정화는 엄항섭의 가족과 함께 가흥으로 갔고, 매만가(梅灣街)의 목조건물에 머물며 이시영, 이동녕, 차이석, 박찬익, 조성환 등의 요인들을 모셨다. 이후 가흥에 있던 임시정부 요인들이 난징으로 향할 때 그녀는 남편을 따라 강서성 무령현에 있다가 김구의 부탁을 받아들여 김구의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러 난징으로 향했다.

1938년 2월, 정정화는 후난성 창사에서 임시정부와 다시 합류했다. 일본군이 창사 지역을 공격해오자, 임시정부는 또다시 피난을 떠나 1938년 7월 광둥성 광저우로 이동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임시정부 사무소에 거주하면서 국무위원들을 모셨다. 그러다가 일제가 광둥성을 공격해오자, 임시정부는 1938년 10월 다시 피난길에 올라 광시성 류저우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4달 정도 머물다 다시 쓰촨성 기강으로 옮겼으며, 1940년 9월 충칭에 최종적으로 정착했다. 정정화는 이렇듯 정신없이 이동하는 임시정부를 항상 따라가며 안살림을 맡았고, 홀로 지내는 국무위원들을 모셨다. 1940년 3월 이동녕이 기강에서 숨을 거뒀을 때 마지막까지 그를 간호하며 임종을 지킨 이는 바로 그녀였다.

한편, 그녀는 임시정부에서 일시적으로 직책을 맡기도 했다. 1940년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을 때 당원이 되었고, 차이석, 신환과 함께 당원 및 가족의 생계를 지도, 보호하는 생계위원회 위원을 맡아 활동했다. 또한 그녀는 한국혁명여성동맹에 참여해 조직부장을 맡아 임시정부를 후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녀는 여성동맹에 이어 각 당파의 부녀 50여 명이 김순애의 주도하에 결성한 대한애국부인회에 가담하여 훈련부 주임으로 선출되었다. 대한애국부인회는 . 광복군을 후원하기 위한 모금활동을 비롯하여 중국의 포로수용소에 있는 한인들 위문, 자녀들에 대한 교육, 그리고 중경방송국을 통해 국내외 한인여성들의 단결과 각성을 촉구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8.15 광복 후, 정정화는 임시정부 요인들이 떠난 뒤에도 충칭에 남아 임시정부 가족들의 귀국을 위한 준비와 뒤처리를 마쳤다. 그리고 이듬해인 1946년 1월 충칭을 떠나 상하이로 갔고, 그해 5월 9일에 미군이 제공한 LST 수송선을 타고 부산에 도착하면서 마침내 조국에 귀환했다. 그 후 그녀는 일체의 정치활동을 피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부통령에 취임한 이시영은 그녀에게 감찰위원회의 감찰위원으로 추천했지만, 그녀는 이를 거절하고 자택에 은거했다.

6.25 전쟁 발발 후, 정정화의 남편 김의한이 북한군에게 잡혀 납북되었다. 그 후 그녀는 두 번이나 옥살이를 하는 고초를 겪었다. 그녀는 감옥에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는 시 '옥중소감'을 지었다.

아직껏 고생이 남아 옥에 갇힌 몸 되니


늙은 몸 쇠약하여 목숨 겨우 붙었구나.

혁명 위해 살아온 반평생 길인데

오늘날 이 굴욕이 과연 그 보답인가.

국토는 두 쪽 나고 사상은 갈렸으니

옥과 돌이 서로 섞여 제가 옳다 나서는구나.

철창과 마룻바닥 햇빛 한 점 없는데

음산한 공기 스며들어 악취를 뽑는구나.

- 장강일기

이후 어떠한 사회 활동을 하지 않고 묻혀 지내던 그녀는 1982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받았다. 그녀는 이에 대해 1987년에 출판한 회고록 <녹두꽃> 서문에서 자신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내가 임시 망명정부에 가담해서 항일 투사들과 생사 존몰(存沒)을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나의 사사로운 일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민족을 대표하는 임시정부가 내게 할 일을 주었고, 내가 맡은 일을 했을 뿐이다. 주어지고 맡겨진 일을 모르는 체하고 내치는 재주가 내게는 없었던 탓이다. 그러니 나를 알고 지내는 주위 사람들이 나를 치켜세우는 것은 오로지 나의 그런 재주 없음을 사 주는 까닭에서일 것이다.

정정화는 1991년 11월 2일에 서울특별시 양천구 신정동 효창연립 자택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1세. 그녀의 유해는 그해 11월 6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1묘역에 안장되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