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데스리가: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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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황금기는 위기를 극복한 결과물이었다.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 관중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었는데 축구팬들은 낙후된 경기장을 찾아가는 것보다 TV를 통해 시청하는 것을 선호했다. 여기에 1971년에 터진 [[분데스리가-스칸달]]은 치명적이었다. 630만명에 이르렀던 총 관중수는 500만명 수준으로 추락했고 독일축구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그러나 서독 국가대표팀의 선전, 특히 [[1974년 FIFA 월드컵]]의 우승은 축구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불러일으켰고,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개선된 인프라와 높은 수준의 경기들은 이런 바람에 부응했다. 이런 상승세는 꾸준히 이어졌으며 특히 [[UEFA컵]]에서의 활약과 맞물려 80년대까지 전성기를 이어간다.
이런 황금기는 위기를 극복한 결과물이었다.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 관중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었는데 축구팬들은 낙후된 경기장을 찾아가는 것보다 TV를 통해 시청하는 것을 선호했다. 여기에 1971년에 터진 [[분데스리가-스칸달]]은 치명적이었다. 630만명에 이르렀던 총 관중수는 500만명 수준으로 추락했고 독일축구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그러나 서독 국가대표팀의 선전, 특히 [[1974년 FIFA 월드컵]]의 우승은 축구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불러일으켰고,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개선된 인프라와 높은 수준의 경기들은 이런 바람에 부응했다. 이런 상승세는 꾸준히 이어졌으며 특히 [[UEFA컵]]에서의 활약과 맞물려 80년대까지 전성기를 이어간다.


=== 남북전쟁(1979-1990) ===
=== 남북전쟁(1979-1990) ===
1970년대를 풍미했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는 작은 홈구장 탓에 재정적 한계가 있었고, 지속적으로 선수들을 놓치면서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그 자리를 대체한 [[함부르거 SV]]와 재정비를 마친 [[FC 바이에른 뮌헨]]이 분데스리가의 패권을 두고 다퉜으며 이후 [[VfB 슈투트가르트]]와 [[베르더 브레멘]]까지 가세해 1978/79시즌 이후 12시즌 동안 남부와 북부의 팀들만 우승을 차지하는 묘한 구도가 이어졌다.<ref>[[함부르거 SV]]와 [[베르더 브레멘]]의 경기는 북독더비, [[FC 바이에른 뮌헨]]과 [[VfB 슈투트가르트]]의 경기는 남독더비로 불리며, [[FC 바이에른 뮌헨]]과 북독의 두 팀간의 대결은 남북더비로 불린다.</ref>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가 그랬던 것처럼 [[함부르거 SV]] 역시 [[유러피언컵]]과 [[UEFA컵]]에서 큰 족적을 남겼으며, 부활한 [[FC 바이에른 뮌헨]] 역시 유럽의 강호로 손색이 없었다.
1979/80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에 [[함부르거 SV]]가 오르고 [[UEFA컵]] 4강이 모두 서독 클럽으로 채워진 것은 분데스리가의 강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이었다.<ref>그러나 [[함부르거 SV]]는 결승에서 잉글랜드의 [[노팅엄 포레스트]]에게 패했고 3년 뒤에 비로소 트로피를 거머쥐었다.</ref> 1980년대 초반에 분데스리가 클럽들은 유럽 클럽대항전에서 꾸준히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고, [[UEFA 유로 1980]]의 우승과 [[1982년 FIFA 월드컵]]의 우승 등 서독 선수들의 활약도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상승세가 영원하지는 못했는데 이탈리아의 [[세리에 A]]가 막대한 자금을 앞세워 세계 각지의 스타플레이어들을 영입했고, 자금력이 뒤처지는 분데스리가로선 이적시장에서 경쟁하기 어려웠다. [[팔캉]], [[미셸 플라티니]], [[지쿠]] 등 세계적인 선수들이 이탈리아로 향했으며 스타플레이어들을 향한 이탈리아 클럽들의 구애는 계속되었다.
1982/83시즌 [[함부르거 SV]]가 이탈리아의 거함 [[유벤투스]]를 꺾고 [[유러피언컵]]에서 우승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지만 분데스리가는 유럽축구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1984년에는 서독의 아이콘이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마저 이탈리아로 떠났으며 분데스리가는 계속되는 선수유출과 대체할만한 스타의 발굴 실패로 경쟁력을 잃더니 마침내 1985년에 1위 자리를 내주게 된다.<ref>여기에는 축구 외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보리스 베커와 슈테피 그라프라는 테니스 스타의 출현으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축구로부터 멀어진 영향도 있다.</ref><ref>그럼에도 분데스리가가 도태된 것은 아니어서 1990년에 잠시나마 정상을 탈환하기도 했으며 엄밀히 말해 1983/84시즌에 겪은 이례적인 부진만 아니었다면 1위 자리를 더 지킬 수도 있었다. 즉 최고의 리그에서 내려온 것이지 빅리그의 자리까지 내준 것은 아니었다.</ref> 이후 국가대표급 선수들의 이탈이 계속되었는데 월드컵 국가대표팀 명단을 보면 해외파의 비중이 급격하게 늘어남을 알 수 있다.<ref>[[1982년 FIFA 월드컵]]과 [[1986년 FIFA 월드컵]] 명단에는 각각 1명과 2명의 해외파만 있었지만, [[1990년 FIFA 월드컵]]에선 5명, [[1994년 FIFA 월드컵]] 때는 6명까지 늘어났다.</ref> 그러므로 단순히 우승팀의 연고지가 일정하다는 이유만으로 1980년대를 한 시대로 묶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며, 분데스리가가 정상에 위치하던 시기와 쇠퇴를 맞이하는 시기로 구별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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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4월 22일 (수) 00:54 판

분데스리가(Bundesliga)는 독일의 프로 축구리그이다. 직역하면 연방리그(연방Bundes+리그Liga)다. 군대스리가의 어원(...)이기도 하다.

2015년 현재 한국인 선수가 가장 많이 진출한 리그라고 카더라.

개요

원래 분데스리가는 Bundes(연방)과 Liga(리그)의 합성어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여러 프로리그가 사용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독일의 축구리그가 가장 유명하며 특히 1부리그를 의미한다. 1963년 16개 클럽으로 출범하였으며 현재는 18개 클럽으로 구성되어 있다. 20개 팀으로 리그가 구성되는 EPL이나 프리메라리가, 세리에 A 등과 달리 시즌당 경기수가 4경기 적은 34경기이며, 약 한 달간의 겨울 휴식기간이 존재한다. 14/15시즌 현재 UEFA 포인트에서 프리메라리가, EPL에 이어 3위를 기록중이며, 15/16시즌에는 EPL을 제치고 2위로 시작하게 된다.


역사

프로리그의 출범

잉글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럽의 축구강국들이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일찌감치 프로리그를 만든 것과는 대조적으로 독일에는 전국 단위의 프로리그 없이 수십 개의 지역리그와 그 우승팀들의 토너먼트만 존재했다. 2차대전 이후 1.FC 쾰른의 회장 프란츠 크레머를 중심으로 전국 각지의 클럽들이 참여하는 프로리그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왔으나 DFB는 스포츠에 시장경제가 개입하는 것을 우려하여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 최초의 시도는 1958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회의에서 기각되었지만 1962년 FIFA 월드컵에서 서독이 유고슬라비아에게 8강전에서 패하자 여론이 바뀌어 결국 1962년 7월 28일 도르트문트에서 분데스리가의 출범이 결정되었다.

당시 서독에는 오버리가라고 하는 5개의 지역리그가 존재했는데 서부와 남부에서 5팀, 북부에서 3팀, 남서부에서 2팀, 베를린에서 1팀을 뽑아 총 16개 팀으로 구성하기로 했다. 전체 74개 클럽 중 기한 내에 서류를 제출한 46개팀을 대상으로 심사에 들어갔고, 1962년 10월 6일에 12년간의 성적을 계량화한 이른바 12년 랭킹이 공개됐다. 이 자료를 토대로 1도시 1클럽 정책을 적용하여 16개 팀이 선정됐으나 꼭 평가 순위대로 선정한 것은 아니었는데 프로화 이후 클럽들이 재정위기를 겪을 것을 우려하여 경제적 조건을 고려했으며 클럽의 기반시설도 평가대상이었다.

먼저 15개 클럽이 제외되었고, 1963년 1월 11일에 1. FC 쾰른,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FC 샬케 04, 베르더 브레멘,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 1. FC 뉘른베르크, 1. FC 자르브뤼켄, 함부르거 SV, 헤르타 BSC 이상 9개 클럽이 선정되었다. 1도시 1클럽 정책에 따라 베를린의 두 클럽을 제외하고 20개 클럽이 남은 7자리를 두고 다투게 되었는데 이들은 18개 또는 20개 클럽이 참여하는 것으로 바꾸려 노력했으나 수포로 돌아갔다. 결국 1963년 5월 6일, 7개 클럽이 결정되었는데 프로이센 뮌스터, 마이데리허 SV[1],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 TSV 1860 뮌헨, VfB 슈투트가르트, 카를스루에 SV였으며 탈락한 13개 클럽은 2부리그로 합류하게 됐다. 당시 1. FC 자르브뤼켄FK 피르마젠스보루시아 노인키르헨을 제친 것[2]마이데리허 SV알레마니아 아헨을 밀어낸 것, 하노버 96 대신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가 선정되고 FC 바이에른 뮌헨TSV 1860 뮌헨 때문에 제외된 것 등 클럽 선정이 적절했는가를 두고 격렬한 논란이 있었으나 변경사항 없이 확정되어 분데스리가의 막을 열었다.

최초의 16개 클럽을 지역별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초창기(1963-1968)

초창기는 분데스리가의 시작인 1963년부터 1.FC 뉘른베르크가 우승한 1968년까지를 말하며 1967/68시즌까지 매시즌 우승팀이 바뀌고 팀들의 순위가 요동치던 시기다. 혹자들은 1971년까지 초창기로 분류하기도 하는데 1971년에 분데스리가-스칸달이 있었고, UEFA 유로 1972에서 서독이 우승하면서 독일축구의 전성기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우승은 일찌감치 프로화를 추진했던 서부의 강호 1. FC 쾰른이 차지했으며 특혜 논란이 있던 1. FC 자르브뤼켄이 최초의 꼴찌팀이라는 불명예를 얻었다. 그러나 오버리가에서의 실적이 그대로 성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는데 북독일의 제왕 함부르거 SV[3]가 지지부진하는 동안 북부리그의 2인자였던 베르더 브레멘이 2번째 우승 트로피를 가져갔으며 남서부리그 마지막 챔피언이자 최고의 명문이던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이 강등권을 전전하기도 했다.

분데스리가의 출범 이후 독일축구는 목표였던 경쟁력 강화에 성공했는데 서독 국가대표팀은 1966년 FIFA 월드컵에서 준우승[4]을 하며 유럽축구계의 강호로 자리매김했고, 1966년 보루시아 도르트문트가 독일 클럽 최초로 유럽 클럽대항전인 UEFA 컵 위너스컵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이듬해에는 FC 바이에른 뮌헨이 우승을 거머쥐었다. 1965/66시즌부터는 18개 팀으로 리그가 확장되었으며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5][6]

양강시대(1969-1978)

1969년부터 1978년까지 9시즌 동안 분데스리가의 헤게모니는 두 거인이 장악했다. 1968/69시즌 FC 바이에른 뮌헨이 첫 우승을 가져가자 보란듯이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가 분데스리가 최초의 2연패를 달성했고, FC 바이에른 뮌헨은 질 수 없다는 듯이 분데스리가 3연패를 이룩했다.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도 뒤따라 3연패에 성공했으며, 이 두 팀의 우승독식은 1977/78시즌에 1. FC 쾰른마이스터샬레를 차지하면서 겨우 끝났다.[7]

이 두 팀은 단순히 리그 우승을 많이 차지하는데 그치지 않고 유럽 클럽대항전에서도 두각을 나타냈다. FC 바이에른 뮌헨레알 마드리드, AFC 아약스에 이어 3번째로 유러피언컵 3연패를 달성했으며[8],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유러피언컵 우승은 차지하지 못했으나 준우승을 거두고 UEFA컵에서는 4차례나 결승에 올라[9] 당대 축구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강호로 자리매김했다.[10][11] 이런 활약 덕분에 1976년에 분데스리가는 최초로 UEFA 리그랭킹에서 1위에 올랐는데 그렇다고 FC 바이에른 뮌헨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만 강한 건 아니었는데 1976/77시즌에 함부르거 SVUEFA 컵 위너스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게 그 예다.

스타플레이어도 여럿 등장했는데 게르트 뮐러가 1970년 독일인 최초로 발롱도르 수상자가 되었으며[12], 프란츠 베켄바우어요한 크루이프와 함께 유럽축구계를 양분하는 슈퍼스타가 되었다. 국내에서는 서독은 UEFA 유로 19721974년 FIFA 월드컵에서의 연이은 우승을 차지하며 황금기를 보내고 있었고, 1976년 1. FC 쾰른이 벨기에 국가대표 선수 로거 판 훌을 거액으로 영입하면서 선수들의 이적료와 연봉도 급증하기 시작해 해외에서 뛰어난 선수들이 계속 유입되었다.[13]

이런 황금기는 위기를 극복한 결과물이었다. 분데스리가 출범 이후 관중은 꾸준히 감소하고 있었는데 축구팬들은 낙후된 경기장을 찾아가는 것보다 TV를 통해 시청하는 것을 선호했다. 여기에 1971년에 터진 분데스리가-스칸달은 치명적이었다. 630만명에 이르렀던 총 관중수는 500만명 수준으로 추락했고 독일축구에 대한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그러나 서독 국가대표팀의 선전, 특히 1974년 FIFA 월드컵의 우승은 축구에 대한 관심과 기대를 불러일으켰고, 월드컵을 준비하면서 개선된 인프라와 높은 수준의 경기들은 이런 바람에 부응했다. 이런 상승세는 꾸준히 이어졌으며 특히 UEFA컵에서의 활약과 맞물려 80년대까지 전성기를 이어간다.


남북전쟁(1979-1990)

1970년대를 풍미했던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는 작은 홈구장 탓에 재정적 한계가 있었고, 지속적으로 선수들을 놓치면서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와야만 했다. 그 자리를 대체한 함부르거 SV와 재정비를 마친 FC 바이에른 뮌헨이 분데스리가의 패권을 두고 다퉜으며 이후 VfB 슈투트가르트베르더 브레멘까지 가세해 1978/79시즌 이후 12시즌 동안 남부와 북부의 팀들만 우승을 차지하는 묘한 구도가 이어졌다.[14]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가 그랬던 것처럼 함부르거 SV 역시 유러피언컵UEFA컵에서 큰 족적을 남겼으며, 부활한 FC 바이에른 뮌헨 역시 유럽의 강호로 손색이 없었다.

1979/80시즌 유러피언컵 결승에 함부르거 SV가 오르고 UEFA컵 4강이 모두 서독 클럽으로 채워진 것은 분데스리가의 강함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일이었다.[15] 1980년대 초반에 분데스리가 클럽들은 유럽 클럽대항전에서 꾸준히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고, UEFA 유로 1980의 우승과 1982년 FIFA 월드컵의 우승 등 서독 선수들의 활약도 이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상승세가 영원하지는 못했는데 이탈리아의 세리에 A가 막대한 자금을 앞세워 세계 각지의 스타플레이어들을 영입했고, 자금력이 뒤처지는 분데스리가로선 이적시장에서 경쟁하기 어려웠다. 팔캉, 미셸 플라티니, 지쿠 등 세계적인 선수들이 이탈리아로 향했으며 스타플레이어들을 향한 이탈리아 클럽들의 구애는 계속되었다.

1982/83시즌 함부르거 SV가 이탈리아의 거함 유벤투스를 꺾고 유러피언컵에서 우승한 것은 대단한 일이었지만 분데스리가는 유럽축구의 중심에서 밀려나고 있었다. 1984년에는 서독의 아이콘이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마저 이탈리아로 떠났으며 분데스리가는 계속되는 선수유출과 대체할만한 스타의 발굴 실패로 경쟁력을 잃더니 마침내 1985년에 1위 자리를 내주게 된다.[16][17] 이후 국가대표급 선수들의 이탈이 계속되었는데 월드컵 국가대표팀 명단을 보면 해외파의 비중이 급격하게 늘어남을 알 수 있다.[18] 그러므로 단순히 우승팀의 연고지가 일정하다는 이유만으로 1980년대를 한 시대로 묶기에는 어려움이 있으며, 분데스리가가 정상에 위치하던 시기와 쇠퇴를 맞이하는 시기로 구별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통독시대(1991-1999)

현대(2000-)

역대 우승팀

시즌 우승팀
1963/64 Koeln.png 1. FC 쾰른
1964/65 SV-Werder-Bremen-Logo.svg 베르더 브레멘
1965/66 TSV 1860 München.svg TSV 1860 뮌헨
1966/67 Eintracht Braunschweig.png 아인트라흐트 브라운슈바이크
1967/68 1. FC Nürnberg logo.svg 1. FC 뉘른베르크
1968/69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1969/70 Borussia Mönchengladbach logo.svg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70/71 Borussia Mönchengladbach logo.svg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71/72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1972/73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1973/74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1974/75 Borussia Mönchengladbach logo.svg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75/76 Borussia Mönchengladbach logo.svg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76/77 Borussia Mönchengladbach logo.svg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977/78 Koeln.png 1. FC 쾰른
1978/79 HSV-Logo.svg 함부르거 SV
1979/80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1980/81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1981/82 HSV-Logo.svg 함부르거 SV
1982/83 HSV-Logo.svg 함부르거 SV
1983/84 VfB Stuttgart Logo.svg VfB 슈투트가르트
1984/85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1985/86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1986/87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1987/88 SV-Werder-Bremen-Logo.svg 베르더 브레멘
1988/89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1989/90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1990/91 Logo 1 FC Kaiserslautern.svg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
1991/92 VfB Stuttgart Logo.svg VfB 슈투트가르트
1992/93 SV-Werder-Bremen-Logo.svg 베르더 브레멘
1993/94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1994/95 Borussia Dortmund logo.svg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95/96 Borussia Dortmund logo.svg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1996/97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1997/98 Logo 1 FC Kaiserslautern.svg 1. FC 카이저슬라우테른
1998/99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1999/00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2000/01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2001/02 Borussia Dortmund logo.svg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002/03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2003/04 SV-Werder-Bremen-Logo.svg 베르더 브레멘
2004/05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2005/06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2006/07 VfB Stuttgart Logo.svg VfB 슈투트가르트
2007/08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2008/09 파일:Vfl wolfsburg.png VfL 볼프스부르크
2009/10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2010/11 Borussia Dortmund logo.svg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011/12 Borussia Dortmund logo.svg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012/13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2013/14 Logo FC Bayern München.svg FC 바이에른 뮌헨

소속 클럽

추가바람


주석

<references>

  1. 現 MSV 뒤스부르크. 안정환이 뛰었던 그 팀이다.
  2. 훗날 DFB의 회장이 되는 실력자 헤르만 노이베르거가 자를란트 출신이라 주도(州都)를 연고지로 하는 1. FC 자르브뤼켄에게 특혜를 줬다는 의혹이 있었다.
  3. 북부리그 전체 16시즌 중 15번이나 우승을 차지했다.
  4. 연장전에서 서독이 허용한 결승골은 월드컵 역대 최악의 오심 중 하나로 꼽힌다. 훗날 2010년 FIFA 월드컵 16강전에서는 반대로 실점이 무효처리되어 이득을 봤다.
  5. DFB는 시장경제가 스포츠를 좌우하는 것을 우려해 재정규제를 두었다. 당시 정치적인 문제로 선수들이 베를린에서 뛰는 것을 꺼리자 헤르타 BSC는 규정보다 많은 급료를 지불하다 강등당했으며 원래 강등당했어야 할 FC 샬케 04카를스루에 SC는 항의 끝에 1부리그에 잔류해 참가팀이 18개 팀으로 늘어나게 됐다. 그러나 당시 급료 제한을 어기는 팀이 많았고 헤르타 BSC가 희생양이 되었다는 주장도 있다.
  6. 예외적으로 통일 직후였던 1991/92 시즌에는 20개 팀이었다.
  7. 그러나 그 과정이 결코 순탄치는 않았는데 마지막 3경기 동안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 승점이 같았으며 골득실 3점 차이로 결정난 아슬아슬한 우승이었다. 특히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는 마지막 경기에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상대로 12:0이라는 역사적인 승리를 거두는 괴력을 선보였다.
  8. 아이러니하게도 첫 우승 이후 FC 바이에른 뮌헨은 리그에서 부진에 빠졌고, 팀에 영광을 안겨다준 명장 우도 라텍을 경질시키기까지 했다.
  9. 정확히는 이 시기에 1회 우승과 1회 준우승을 차지했고, 1978/79시즌과 1979/80시즌에 연거푸 결승에 올랐다.
  10.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는 1971/72시즌 유러피언컵 16강에서 이탈리아의 인테르나치오날레를 상대로 홈에서 7:1의 승리를 거두고 전설적인 명장 맷 버스비로부터 완벽한 팀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이 경기는 관중의 물건투척으로 무효처리되었고 인테르나치오날레는 재경기를 통해 진출해 결승전까지 올라갔다.
  11.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는 잉글랜드의 리버풀 FC와 3차례 맞붙어 모두 패했지만 이때의 인연으로 최근까지도 두 팀은 친선경기와 서포터 방문 등의 행사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12. 최종 3위 안에 뽑힌 건 1958년에 2위였던 헬무트 란이 최초였고 이후 우베 젤러, 카를-하인츠 슈넬링거, 프란츠 베켄바우어가 순위권에 이름을 올렸다.
  13. 대표적으로 1977년에 함부르거 SV가 영입한 케빈 키건이 있는데 당시 잉글랜드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였고, 분데스리가에서의 3시즌동안 발롱도르 2위-1위-1위를 기록했다.
  14. 함부르거 SV베르더 브레멘의 경기는 북독더비, FC 바이에른 뮌헨VfB 슈투트가르트의 경기는 남독더비로 불리며, FC 바이에른 뮌헨과 북독의 두 팀간의 대결은 남북더비로 불린다.
  15. 그러나 함부르거 SV는 결승에서 잉글랜드의 노팅엄 포레스트에게 패했고 3년 뒤에 비로소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16. 여기에는 축구 외적인 문제도 있었는데, 보리스 베커와 슈테피 그라프라는 테니스 스타의 출현으로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축구로부터 멀어진 영향도 있다.
  17. 그럼에도 분데스리가가 도태된 것은 아니어서 1990년에 잠시나마 정상을 탈환하기도 했으며 엄밀히 말해 1983/84시즌에 겪은 이례적인 부진만 아니었다면 1위 자리를 더 지킬 수도 있었다. 즉 최고의 리그에서 내려온 것이지 빅리그의 자리까지 내준 것은 아니었다.
  18. 1982년 FIFA 월드컵1986년 FIFA 월드컵 명단에는 각각 1명과 2명의 해외파만 있었지만, 1990년 FIFA 월드컵에선 5명, 1994년 FIFA 월드컵 때는 6명까지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