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빈 키건

케빈 키건
Joseph Kevin Keegan
Kevin Keegan.jpg
인물 정보
출생 1951년 2월 14일 (73세)
잉글랜드 동커스터 암소프
국적 잉글랜드
신체 173cm, 74kg
프로선수 경력
종목 축구
포지션 공격수[1]
소속팀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1967~1971)
리버풀 FC (1971~1977)
함부르거 SV (1977~1980)
사우샘프턴 FC (1980~1982)
뉴캐슬 유나이티드 (1982~1984)
블랙타운 시티 (1985)
지도 뉴캐슬 유나이티드 (1992~1997)
풀럼 FC (1997~1998)
잉글랜드 (1999~2000)
맨체스터 시티 (2001~2005)
뉴캐슬 유나이티드 (2008)
나는 그들을 이겼으면 좋겠다! 정말로!
스카이스포츠 경기 후 인터뷰에서[2]

킹 케브(King Kev)[3]

마이티 마우스(Mighty Mouse)[4]

클럽 경력[편집 | 원본 편집]

스컨소프(1967-1971)[편집 | 원본 편집]

키건은 어렸을 적에 1부리그 팀이던 코벤트리에서 입단테스트를 봤으나 탈락했고, 4부리그 스컨소프와 계약을 맺고 라이트윙으로 뛰었다. 이때만 하더라도 두각을 나타내는 선수는 아니었으나 리버풀의 스카우트 제프 트웬티맨[5]에게 발탁되어 이적하게 된다.

리버풀(1971-1977)[편집 | 원본 편집]

4부리그에서 1부리그 상위권 팀으로 이적했음에도 불구하고 적응기도 없이 바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줬다. 리버풀의 감독 빌 샹클리는 키건의 재능을 알아보고 라이트윙에서 중앙공격수로 포지션을 바꾸게 하는데 장신공격수 존 토샥과 빅앤스몰 투톱을 이루어 잉글랜드를 뒤흔들었다. 2년차인 1972/73시즌에 리그와 UEFA컵을 우승하는데 클럽 최초의 더블이었으며 최초의 유럽대항전 타이틀이었다. 1973/74시즌에는 리그에서 준우승에 그치지만 FA컵에서는 결승전에서 2골을 넣으며 트로피를 차지했다. 그리고 이때부터 엄청난 경기 수를 소화하게 된다.

1974/75시즌에는 리그 준우승에 그치고 메이저 타이틀을 얻지 못했지만 1975/76시즌에 비상하여 리그와 UEFA컵 더블을 달성했고, FWA 올해의선수 수상과 함께 처음으로 발롱도르 후보에 이름을 올리며 4위가 되었다. 1976/77시즌은 리버풀에서 보낸 커리어의 정점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록 FA컵 결승에서 라이벌 맨유에게 패해 트레블에는 실패하지만 리그 2연패와 함께 분데스리가의 강호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6]를 꺾고 클럽 최초의 유러피언컵 우승에 성공한다. 특히 그 요한 크라위프를 봉쇄했던 전설적인 라이트백 베르티 포크츠를 상대로 페널티킥을 얻어낸 건 새로운 시대의 지배자가 나타났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한편 키건은 시즌 도중 해외진출 도전을 선언했었는데, 공언했던대로 리버풀을 잉글랜드 최고의 클럽으로 만들고 분데스리가함부르크로 떠났다.

함부르크(1977-1980)[편집 | 원본 편집]

명실상부 유럽 최고의 선수였던 키건을 영입했으니 함부르크가 우승후보로 꼽히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1976/77시즌 UEFA 컵 위너스컵 우승팀이었고 리그에서도 그리 나쁘지 않은 성적을 기록했기 때문에 다들 키건 효과를 기대했는데... 문제는 전임 감독 쿠노 클뢰처가 팀을 잘 이끌었음에도 감독을 갈아치워 팀의 기반이 흔들린 상태였다. 일설에 따르면 새로운 감독의 이름이 더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라고.[7] 감독의 멋짐을 알지 못하는 당신이 불쌍해! 그러나 팀은 오히려 중위권으로 떨어졌고, 결국 이름이 매력적인 신임 감독 루디 구텐도르프는 경질당했다. 감독이 경질된 뒤에도 사정이 나쁜 건 마찬가지여서 친정팀 리버풀에게 UEFA 슈퍼컵에서 6:0으로 참패하는 등 영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다. 함부르크의 부진과 전 소속팀 리버풀의 변함없는 질주 탓에 키건의 위상은 크게 흔들렸고, 덕분에 본인이 유러피언컵에서 꺾었던 알란 시몬센에게 발롱도르를 넘겨주고 말았다.[8][9] 여기에 새 감독도 클럽하우스를 장악하지 못해 헤맸고 키건 본인도 징계 때문에 후반기 상당수를 날리게 됐다. 누가 봐도 명백한 이적실패였고 키건 본인도 방황했으나... 신임 단장 귄터 네처 덕에 어느 정도 마음을 돌릴 수 있었고 남은 경기는 맹활약하며 시즌을 마무리했다.[10]

검증된 감독 브란코 제베치가 지휘봉을 잡고 2부리그에서 영입된 호어스트 흐루베쉬 등이 가세하여 함부르크는 1978/79시즌에 완전히 다른 팀으로 되돌아왔고, 키건은 압도적인 기량을 선보이며 월드컵에 나가지 못한 선수로는 최초로 발롱도르 수상자가 되었다. 얼마나 독보적인 활약이었냐면 전반기 17경기 뛰고 주간 베스트11에 8번 선정됐으며, 키커 평점은 1.65였는데 2.5만 찍어도 공격수 평점 1위 먹던 시기였다.[11] 후반기에도 상승세는 이어져서 마침내 함부르크는 분데스리가 첫 우승을 차지했고 다시 한 번 발롱도르를 차지하며 2연패를 달성했다. 그러나 화룡점정에는 실패했는데 1979/80시즌 함부르크는 분데스리가와 유러피언컵에서 모두 준우승에 그치고 말았다. 선수생활의 절정을 달리고 있었지만 키건은 독일생활을 끝내고 잉글랜드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사우샘프턴(1980-1982)[편집 | 원본 편집]

당초 키건은 리버풀로의 컴백을 염두에 두고 이적조항을 삽입했었다. 리버풀을 떠난 것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도전에 대한 열망 때문이지 팀이 싫어서 떠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12] 그러나 리버풀은 케니 달글리시라는 훌륭한 대체자를 구해 키건 없이도 유럽 축구계를 호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적조항의 행사를 포기했고, 리버풀의 동의를 받은 사우샘프턴이 함부르크로부터 키건을 데려갔다. 그런데 사우샘프턴은 당시에도 빅클럽은커녕 썩 규모가 큰 클럽이 아니었다. 지금으로 치면 키건의 이적과정은 맨유에서 정상을 차지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새로운 도전을 해보겠다고 세비야 FC 정도의 클럽에서 뛰다가 스완지 시티 정도의 클럽으로 컴백한 느낌이라고나 할까?

이 이적은 키건의 커리어에 심각한 타격을 줬는데, 키건이 부진하긴 커녕 뛰어난 활약을 했음에도 평범한 중위권 클럽에서 뛴다는 이유로 유럽축구계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게 된 것이다.[13] 마침 분데스리가에서 라이벌이었던 카를-하인츠 루메니게가 완전히 각성하여 유럽축구계의 지배자도 키건에서 루메니게로 바뀌고 말았다. 그럼에도 키건은 사우샘프턴에서 맹활약을 했고, 첫시즌에는 클럽 역사상 최고성적인 6위로 이끌었고 1981/82시즌에는 1월까지 1위를 유지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7위에 그쳤지만 득점왕을 차지했고 PFA 올해의 선수와 함께 4등급 훈장도 받았다. 그러나 승부조작 루머가 나오는 등 팀 분위기가 뒤숭숭했고, 본인도 새로운 도전을 원해 '2부리그' 클럽 뉴캐슬로 이적한다.

뉴캐슬(1982-1984)[편집 | 원본 편집]

뉴캐슬에서 키건은 리버풀 시절 팀동료였던 테리 맥더멋과 재회하고, 크리스 와들, 피터 비어슬리 등 젊고 재능있는 선수들과 함께 팀을 이끌어 마침내 2번째 시즌에 3위로 팀을 승격시킨다. 그러나 1부리그로 함께 하는 대신 은퇴를 선언하고, 가족들과 함께 스페인으로 이주했다. 1985년에는 이벤트로 호주에서 잠깐 뛰기도 했다.[14]

국가대표 경력[편집 | 원본 편집]

키건이 저평가받는 이유로 말년의 행보도 있지만 어찌보면 더 심각한 영향을 준 게 국가대표 커리어다. 키건이 전성기를 보낸 1970년대는 잉글랜드 역사상 최악의 시기였다. 키건이 대표팀에 데뷔하기 전이지만 유로 1972은 서독에게 8강에서 무너졌으며 1974 월드컵은 폴란드에게 밀려 지역예선에서 탈락했고 키건은 웨일스를 상대로 한 2경기에만 모습을 드러냈다. 유로 1976은 체코슬로바키아에게 밀려 역시 예선에서 탈락했으며, 1978 월드컵은 이탈리아에게 골득실 때문에 밀려났다. 다시 말해 메이저대회 4연속 지역예선 탈락이다.[15] 그나마 유로 1980은 8팀 참가로 확대되어서 본선에는 나갔는데 스페인을 이기고 벨기에와 무승부, 이탈리아에게 지며 조 3위로 탈락.

마지막 무대인 1982 월드컵에서 본선 진출에 성공하지만 그것도 24개팀 참가로 확대개편된 덕분이었고, 만약 예년처럼 조 1위만 지출하는 거였다면 헝가리에게 밀려 나오지 못할 뻔했다. 어쨌든 천신만고 끝에 올라온 월드컵인 만큼 본신의 실력을 보여주면 되는 거였는데... 문제는 정작 키건 본인이 부상을 당해버렸다. 그래도 키건 없이 잉글랜드가 3전 전승으로 12강에 진출했고 용케 서독과도 무승부를 기록했다. 서독이 스페인을 2:1로 이겼기 때문에 스페인을 2골 이상 넣고 이긴다면 4강에 진출할 수 있었다.[16] 이 경기를 승리로 이끈다면 영웅이 될 수 있었고, 실제로 경기가 0:0으로 흐르자 키건이 후반 64분에 투입되었는데... 결정적인 헤딩 찬스를 놓치는 등 아쉬운 모습만 보여준 채 무승부로 끝나 탈락하고 말았다. 결국 유럽축구계 최고의 스타플레이어에게 허락된 월드컵은 단 26분이었다. 월드컵 이후 대표팀 신임감독 바비 롭슨과 싸우면서 국가대표 커리어도 끝났다.

그렇다고 키건의 국가대표 활약이 아예 시원찮았던 건 또 아니어서 친선경기나 각종 소규모 대회에서는 잉글랜드의 에이스로 맹활약했었다. 사실 단순히 잉글랜드가 약했다기보다는 운이 많이 안 따라주기도 했다. 키건이 데뷔하기 직전에 있었던 1972년의 유로는 상대가 우승팀 서독이었고 역대 독일 중 최강으로 꼽힌다. 폴란드는 동유럽 팀들의 격전장인 올림픽에서 우승한 팀이었고, 월드컵에서도 3위에 올랐다. 1976년의 체코슬로바키아는 승부차기 끝에 서독을 제압하고 유로에서 우승했고, 1978년의 이탈리아도 개최국 아르헨티나를 꺾는 등 4강까지 오른 강팀이었다. 물론 최고의 선수는 강팀들을 꺾고 정상에 오르기 마련이고 키건은 1976년부터 은퇴하기 전까지 잉글랜드의 주장이자 에이스였기에 비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다. 덕분에 그렇게 빛나는 전성기를 보낸 선수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역대 레전드들 사이에서 키건의 위치는 낮은 편이다. 국적이 잉글랜드라는 걸 생각하면 더욱 슬퍼진다.[17]

감독 경력[편집 | 원본 편집]

뉴캐슬(1992-1997)[편집 | 원본 편집]

1982년, 키건이 처음 뉴캐슬에 왔을 때 팀을 2부리그에서 올려줄 구원자였다. 10년이 지난 뒤의 키건도 역시 구원자였다. 이번에는 사정이 더 나빴다. 팀은 3부리그로 강등당하기 직전이었고 소방수로 투입된 키건은 아슬아슬하게 팀을 잔류시키는데 성공했다. 시즌이 끝나고 로버트 리를 데려왔고, 겨울에는 앤디 콜을 클럽 이적료 신기록으로 데려왔다. 그리고 20위로 마쳤던 팀이 우승팀이 되었다. 승격 첫시즌, 데이비드 켈리와 게빈 피콕을 팔고 피터 비어슬리를 컴백시킨 뉴캐슬은 3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UEFA컵 티켓을 따낸다. 성공적인 첫 시즌 덕분에 착실히 선수들을 영입해 전력을 강화할 수 있었고 1994/95시즌에는 겨울에 앤디 콜을 팔고도 6위를 차지했다. 시즌이 끝난 뒤 샤카 히슬롭, 다비드 지놀라, 레스 퍼디난드를 영입하며 전력을 강화한다.

1995/96시즌에는 큰 격차로 1위를 질주하며 우승에 도전했고 실제로 많은 이들이 우승이 가능하리라 생각했다. 11경기를 남긴 상황에서 12점 차이면 어느 정도 가시권에 들어온 상황이었다. 그런데 경쟁팀 맨유의 감독 알렉스 퍼거슨이 '다들 뉴캐슬을 상대로는 적당히 한다.'라는 인터뷰를 했고, 이에 흥분한 키건은 인터뷰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나는 그들을 이겼으면 좋겠다! 정말로!(I will love it if we beat them! Love it!)'라고 외쳤다. 이 영향인지 뉴캐슬은 급격한 부진을 겪었고, 결국 맨유가 승점 4점 차이로 우승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실제로 심리전의 효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심리전의 대표적 사례로 언급되고, 이 인터뷰는 EPL 역사상 가장 유명한 발언으로 꼽힌다.

1996/97시즌을 앞두고 당시 잉글랜드 최고의 선수였던 앨런 시어러를 세계 최고 이적료로 영입하며 우승에 대한 열망을 불태운다. 그러나 시어러의 맹활약에도 불구하고 선두에서 밀려났고, 결국 1997년 1월 사임을 발표한다. 당시에 이 사임을 두고 앤디 콜의 이적, 퍼거슨과의 설전으로 인한 우승실패 등으로 보드진과 불화가 있는 게 아니냐는 루머가 많았지만 공식적으로 이를 부인했고 여기서 뉴캐슬과의 인연이 끝나게 된다. 공교롭게도 그 후임자는 리버풀의 에이스를 계승했던 케니 달글리시였고, 달글리시는 뉴캐슬을 준우승으로 이끌어 역사상 첫 UEFA 챔피언스리그 티켓을 따내지만 이후 추락하고 만다.

풀럼(1998-1999)[편집 | 원본 편집]

가을이 되자 키건은 감독 대신 단장으로 축구계에 복귀한다. 그해 여름 이집트의 대부호 모하메드 알-파예드가 3부리그에 있던 풀럼을 인수하고 5년 안에 1부리그로 승격하겠다고 선언한 풀럼으로 가게 된 것. 감독은 레이 윌킨스[18]에 단장으로 케빈 키건이라는, 3부리그에는 지나치게 화려한 조합이었고 언론들은 드림팀이 결성됐다고 외쳤다. 그러나 이 조합은 1시즌만에 무너졌는데 시즌 막판 3연패로 6위에 그치자 플레이오프가 시작하기도 전에 윌킨스가 경질당했고, 키건이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1무 1패로 탈락의 고배를 마시지만 이듬해 3부리그 우승을 차지하고 글렌 호들의 뒤를 이어 잉글랜드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임명된다. 여담으로 키건과 윌킨스는 가까운 사이였는데 풀럼에서의 일 때문에 사이가 멀어졌다고.

잉글랜드(1999-2000)[편집 | 원본 편집]

당시 잉글랜드는 유로 2000 지역예선을 치르고 있었는데 1승 1무 1패에 그쳤고 그 1승도 룩셈부르크에게 거둔 것이었다. 키건은 팀을 수습해서 남은 5경기 동안 2승 3무를 거둬 조 2위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고 숙적 스코틀랜드를 꺾고 본선 티켓을 따냈다. 하지만 본선에서 기대 이하의 경기력과 운영으로 8강 진출에 실패했고, 이후 2002 월드컵 예선에서는 잉글랜드의 심장 웸블리에서 펼쳐지는 마지막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독일에게 1:2로 패하며 결국 경질당하고 만다. 승률 40%를 넘기지 못하는, 잉글랜드 역사상 손꼽히는 끔찍한 성적이었다. 이때 FA가 얼마나 애가 탔는지 잉글랜드 역사상 최초로 외국인 감독인 스웨덴의 스벤-예란 에릭손을 선임했으며, 키건에게 60세의 수석코치는 너무 늙었다며 거부해놓고서 에릭손에게는 64세의 수석코치를 불러오게 해줬다.

맨시티(2001-2005)[편집 | 원본 편집]

불명예스럽게 물러났지만 아무래도 명성이 있다보니 금방 맨시티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한다. 역시 사람은 유명해야돼 프리미어리그에서 강등당한 팀을 추스려 바로 우승시켰고 프리미어리그 역사상 최초로 다른 팀으로 2부리그를 2번 우승한 감독이 됐다. [19] 첫시즌 리그 9위에 페어플레이로 UEFA컵 티켓을 따는 등 성공적으로 1부리그에 연착륙한다. 네임밸류 높은 베테랑을 대거 영입했고 새로운 홈구장의 개장으로 팬들의 기대가 한껏 높아졌으나 겨울부터 심각한 부진을 겪으며 강등을 겨우 면했고, 그 다음 시즌도 기대에 못 미치는 모습으로 결국 사임과 함께 은퇴를 발표한다. 후임자는 2부리그 우승을 이끌었던 스튜어트 피어스였고 피어스는 팀을 반등시키는데 성공한다. 이후 2008년에 갑작스레 뉴캐슬의 소방수로 복귀하나 역시 놀라운 기복을 보여줬고, 구단주 마이크 애쉴리와 불화를 겪으며 물러났다.

우승 경력[편집 | 원본 편집]

선수[편집 | 원본 편집]

리버풀 FC

함부르거 SV

잉글랜드

  • 브리티시 홈 챔피언십 : 1973, 1975, 1978, 1979, 1982

감독[편집 | 원본 편집]

뉴캐슬 유나이티드

풀럼 FC

  • 잉글랜드 3부리그 : 1998-99

맨체스터 시티

  • 잉글랜드 2부리그 : 2001-02

수상 경력[편집 | 원본 편집]

선수[편집 | 원본 편집]

감독[편집 | 원본 편집]

통산 기록[편집 | 원본 편집]

시즌 클럽 리그 [20] 대륙 총계 비고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경기 득점
1968-69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33 2 2 0 - - 35 2 잉글 4부
1969-70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46 6 8 3 - - 54 9 잉글 4부
1970-71 스컨소프 유나이티드 45 10 7 1 - - 52 11 잉글 4부
1971-72 리버풀 FC 35 9 4 2 3 0 42 11 EPL[21]
1972-73 리버풀 FC 41 13 12 5 11 4 64 22 EPL
1973-74 리버풀 FC 42 12 15 7 4 0 61 19 EPL
1974-75 리버풀 FC 33 10 6 1 3 1 42 12 EPL
1975-76 리버풀 FC 41 12 5 1 11 3 57 16 EPL
1976-77 리버풀 FC 38 12 11 4 8 4 57 20 EPL
1977-78 함부르거 SV 25 6 4 4 6[22] 2 35 12 분데스
1978-79 함부르거 SV 34 17 1 0 - - 35 17 분데스
1979-80 함부르거 SV 31 9 3 0 9 2 43 11 분데스
1980-81 사우샘프턴 FC 27 11 5 1 - - 32 12 EPL
1981-82 사우샘프턴 FC 41 26 3 2 4 2 48 30 EPL
1982-83 뉴캐슬 유나이티드 37 21 4 0 - - 41 21 잉글 2부
1983-84 뉴캐슬 유나이티드 41 27 3 1 - - 44 28 잉글 2부
종합 잉글랜드 500[23] 171[24] 85 28 44 14 629 213
종합 독일 90 32 8 4 15[25] 4 111 40

각주

  1. 최전방 공격수라기보다는 공격형 미드필더를 겸하는 처진 공격수였다.
  2. 뉴캐슬 감독시절 항목을 참고.
  3. 주로 뉴캐슬 팬들이 부르던 별명으로 언론에서는 '킹 키건'이라고 불렀다. 프랑스 풋볼은 '케빈 1세'로 표현한 적도 있다.
  4. 함부르크에서 불린 별명으로 유명 만화영화의 주인공 이름에서 따왔다.
  5. 키건뿐만 아니라 후에 이안 러시, 필 닐, 앨런 핸슨을 리버풀로 데려왔다.
  6. 첫 UEFA컵 우승의 상대였으며 유럽 클럽대항전에서 3번 붙어 3번 다 리버풀이 이겼다. 그래도 사이는 좋아서 최근까지도 두 클럽간 친선교류가 이어지고 있다.
  7. 아이러니하게도 이 삽질의 주인공 페터 크론은 회장과 단장을 역임하며 함부르크를 성장시킨 인물로 현대 스포츠마케팅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8. 당시 1위표를 가장 많이 받은 건 키건이었으나 단 3점 차이로 2위에 머물렀고, 이에 분노한 영국언론 월드사커가 잘못된 투표라고 맹비난했었다.
  9. 흥미롭게도 잉글랜드 대표인 BBC의 맥스 마퀴는 키건의 이름 없이 투표했다.
  10. 네처는 당시의 키건과 비슷한 길을 걸었는데 '뵈켈베르크의 왕'이라고 불리던 세계적인 플레이메이커였으나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뒤 적응에 실패하여 급격히 몰락했고 은퇴한 직후에 단장으로 부임했었다.
  11. 실제로 이 시즌 공격수 평점 2위가 2.5였다. 1위는 당연히 1.94의 키건
  12. 키건은 리버풀을 열렬히 사랑했는데 콥이 그 유명한 'You'll Never Walk Alone을 부르기 시작하면 자신도 눈물이 흘렀다고...
  13. 1976년부터 키건의 발롱도르 순위는 4-2-1-1였으나 사우샘프턴 이적 후 이름이 언급되지 않았다.
  14. 우베 젤러, 푸슈카시 페렌츠, 바비 찰턴 등의 선수들도 이런 식으로 말년에 이벤트성 경기에 뛰어준 적이 있다.
  15. 1972년에는 4강부터 유로 본선으로 쳐줬기 때문에 지역예선 탈락이다.
  16. 당시 12강은 3팀이 1조로 구성되어 1위가 4강에 진출하는 방식이었다.
  17. 그래도 잉글랜드 언론들은 역대 최고의 100인에 뽑아주기도 한다. 그 외의 언론들이 무시해서 그렇지.
  18. 첼시 팬들에게 수석코치로 친숙한 그 윌킨스다.
  19. 프리미어리그 출범 이후 기준이다. 잉글랜드는 이렇게 프리미어리그로 이름이 바뀐 뒤의 기록을 따로 집계하는 경우가 많다.
  20. 리그컵 포함
  21. 당시에는 프리미어리그가 출범하기 전이나 잉글랜드 1부리그이기에 편의상 EPL로 기재
  22. UEFA 슈퍼컵 포함
  23. 하부리그 포함
  24. 하부리그 포함
  25. UEFA 슈퍼컵 포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