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장벽

Mykim5902 (토론 | 기여)님의 2022년 3월 29일 (화) 10:29 판 (→‎최후)

베를린 장벽(독일어: Die Berliner Mauer)은 1961년 독일 베를린에 세워진 통행 제한용 장벽이다.

배경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이미 제1차 세계 대전까지 합쳐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을 일으킨 독일을 위험하다 여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은 독일의 힘을 분산 시키기 위하며 독일을 각각 4등분하여 대리 통치하였다. 분할 작업은 순조로웠지만 단 한 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수도 베를린. 지리 상으로는 소련이 관리할 동부 지역에 있어 베를린도 소련이 관리해야 마땅했지만, 베를린은 프로이센 시절부터 독일의 수도로 오랫동안 기능해온 만큼 강한 상징성이 있어 미영프 3국도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결국 협의 끝에 베를린만은 독일 국토와 마찬가지로 미영프 또한 일정 부분을 관리하는 쪽으로 협의 되었고 덕분에 베를린은 소련의 공산 정부의 관리 구역 내에 존재하는 자유진영 정부의 땅으로 남게 되었다. 이렇게 이념으로 나뉜 탓에 당시의 베를린은 이른바 '육지의 섬'으로 불리웠다.

문제는 이 이후의 일. 연합국이 독일을 100% 전면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했던 고로 결국은 현지인들로 구성된 정부를 수립시켜 통치를 일임하는 것이 더 편했기에 연합국들은 각지의 점령지를 통치할 정부를 수립시키는데, 소련을 제외하고 똑같은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국가였던 미영프 3국은 이해관계가 일치하여 결국 3국의 관할지를 동시에 통치하는 통합 정부를 만들게 되었다. 결국 독일은 독일 서부를 통치하는 민주 정부가 다스리는 독일연방공화국(통칭 서독)과 독일 동부를 통치하는 공산 정부가 다스리는 독일민주공화국(통칭 동독)으로 나뉘었고 베를린도 이에 맞추어 서 베를린과 동 베를린으로 나뉘게 되었다.

이후 공산 국가들의 지나친 억압에 거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자유 진영 국가로 탈출하는 일이 왕왕 있었는데, 이 중 동독의 거주민들은 이웃 국가인 서독으로 향하였고 특히 자유 진영의 영토 중 가장 동쪽으로 뻗어있던 서 베를린은 동독 거주민들에게 있어 가장 이상적인 탈출로였다. 동독 정부도 당연히 그걸 모를 리 없어 나름대로 살벌하게 경계하였지만 그럼에도 탈출자는 점점 늘고만 있었고, 결국 탈출자들을 제한한 목적으로 장벽을 세우게 되었다.

사실 동독은 처음에는 자국민들의 탈출을 적극 장려(?)하였다. 그 이유는 초창기 탈출자들이 고령의 노인층들이라는 점 때문이었는데, 노인층은 생산성은 극히 떨어지고 이들을 부양할 사회 복지 비용을 지속적으로 소모하는 집단이라 이들을 서독으로 내보내면 결과적으로 사회 복지 비용을 아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탈출자들이 생산성이 높은 젊은 층으로 옮겨가면서 생산력 저하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한 동독은 검열을 강화하였고 그 끝이 바로 장벽이었던 것이다.

구조

장벽의 위치 자체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동독의 영토 내에 위치하고 있다. 즉 서독의 경계선으로부터 약간 동독 쪽으로 들어간 위치. 서독과의 경계선에 딱 맞추어 건설할 수 없었던 것은 장벽을 유지 보수할 인력도 동독 사람들이니만큼 장벽의 반대편도 보수해야 했고 그러자면 본의 아니게 서독의 영토를 밟게 될 텐데 그러려면 서독 정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여러 문제가 산적해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유지 보수를 할 때는 우선 서독의 영토 경계선에 임시 바리케이트를 설치하고 군인들을 먼저 배치시킨 다음 기술자들을 들여보내 보수하였다.

처음에는 그저 한낱 벽돌로 만든 담에 불과 했으나 탈출자들이 이에 맞추어 더욱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탈주를 시도하자 점점 개량하고 보수하여 구조가 바뀌었다. 우선 처음 벽돌로 만든 장벽은 탈출자들이 차를 타고 그대로 들이받아 벽을 부수고 탈출함으로서 폐기되고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재건축 되었으며, 탈출자들이 인근의 높은 구조물들을 타고 탈출하자 주변의 높은 구조물들을 없애고 장벽의 높이를 더욱 올리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잘 알려진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한 가운데에 크고 높은 콘크리트 장벽의 모습이 완성되었다.

물론 서 베를린을 실질적으로 100% 틀어 막으면 도시가 고사할 테고 그러면 미영프 3국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 일부 도로와 그에 맞춘 검문소는 존재하는데 종종 이 검문소를 노리고 탈출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례로 소련군 장교인 척 하여 검열을 무력화 시키고 장교라는 이유를 들먹이며 반대편으로 슬쩍 넘어가 탈출하거나, 검문소를 공격하거나(...) 등등 여러 방법이 있었다.

베를린 장벽 구조.jpeg

경제적으로 형편이 좋은 서베를린 주민이 동베를린으로 넘어갈 리가 없기 때문에 서독은 장벽 옆에 경비 초소 몇 개만 세워 두었지만 동베를린은 위 개요에서 말한 것처럼 탈출이 빈번하게 일어났기 때문에 철조망 넘어에는 또 다른 철조망 그다음은 차량 방해 도량, 그다음 감시탑 302개, 20개의 벙커 그리고 평당 약 30개의 지뢰가 깔려있는 지뢰밭, 끝으로 높이 3.6m의 콘크리트 장벽이 있다. 사실 동베를린 쪽을 보면 비무장지대보다 더 심한 구조....

최후

점차 공산주의 국가들이 몰락해가고 이로 인해 그동안 정부로부터 보장 받던 많은 혜택들의 미비로 불만이 쌓일대로 쌓인 공산 국가 거주민들은 폭발하기 시작했다. 이에 1989년 말 당대 동독의 서기장 에리히 호네커는 큰형님 소련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나 소련은 소련 나름대로 자기 발등의 불 끄기에도 바빠 별 도움이 안되었고 결국 호네커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에 호네커는 임시방편으로 자유주의 진영의 국가를 대상으로 한 여행 규제를 완화하겠다는 카드를 꺼내 들어 국민들을 달래려고 했으나, 해당 정책을 발표하는 기자 회견장에서 중대한 사건이 터지고 만다. 당시 휴가철(발표일은 11월 9일이었다)이라 대부분의 관료들이 휴가를 나간 사이였고 게다가 호네커가 세운 방침도 소련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세우다 보니 미비하기 짝이 없어 동독 지도부에선 아직 이거다 하고 결정한 게 거의 없는 상태에서 동독 정부는 그냥 적당한 하급 관료 하나를 기자 회견장에 세워 그 자리에서 '이러이러한 정책을 시행할 것이다'라는 발표만 하고 끝낼 생각이었는데, 기자 회견장에서 한 이탈리아 기자가 언제부터 개방할 것이냐고 묻자 기자회견을 담당한 귄터 샤보스키는 당황한 나머지 '지체없이 당장'("Sofort, unverzüglich.")이라는 답을 내놓았다(틀린 말은 아닌 게 발표 다음날부터 정책을 시행할 생각이긴 했다.).

사실 이 발언을 할 때까지만 해도 일단 독일 측 기자들은 이 발언의 의도를 알아채서 별로 달라진 게 없다는 사실을 파악해 그냥저냥하게 넘어갔지만, 문제의 질문을 한 이탈리아 기자는 독일의 정서와 언어를 잘 몰랐기에 뜻을 약간 오해해서 받아들여 '양국이 지금 당장 개방한다'는 식으로 기사를 써버렸고, 이 사실이 알려진 직후 바로 동독과 서독의 국민들은 양국이 바로 지금 개방한다고 받아들여 흥분한 채로 장벽으로 몰려가 장벽을 때려 부수었다.

사실 이 때도 당연히 수비대가 장벽을 지키고 있었지만 문제는 이들도 정부로부터 어떠한 지시도 듣지 못했던 지라 그냥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온갖 장비로 무장(?)한 시민들에 의해 장벽은 바로 해체되었고, 지금은 역사를 보존하는 목적으로 일부의 검문소와 장벽 조각만 남아 있고 다른 조각들은 기념품처럼 여겨져 사적으로들 보존되고 있다.

기타

사실 동독 측 높으신 분들 사이에서는 장벽 건설에 회의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장벽을 건설한다는 것은 곧 거주민들이 탈출하고 싶어한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꼴이 되기 때문.

실질적으로는 그냥 콘크리트 덩어리이건만, 그 조각이 지닌 정치적 상징 때문에 베를린 장벽의 조각은 수집품으로 취급되어 거래되고 있다. 단, 상술한 대로 그냥 콘크리트 쪼가리라서 짝퉁도 많은 모양.

베를린은 사실 장벽 말고도 봉쇄된 적이 있긴 했다. 베를린 봉쇄 참고.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