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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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세계 사상 최악의 테러
오늘 수많은 생명의 불이 꺼졌습니다...
— -ABC 뉴스보도-

2001년 9월 11일 미국에서 테러범들에 의해 하이재킹 당한 여객기들이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빌딩과 펜타곤에 충돌한 사건.

이 테러로 사망자는 2996명, 부상자는 6291명 이상으로 집계되었었으며 테러의 배후는 오사마 빈 라덴이 지휘한 알카에다였다. 이들이 미국의 무역센터, 펜타곤 국회의사당 또는 백악관을 노린 이유는 각각 미국의 경제, 국방, 정치를 상징하는 건물이고 테러에 성공하면 미국에게 커다란 충격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입장에선 자존심 상하는 일이 되는 거고 실제로 그렇게 되버렸다.

문서 열람 전에 충격적인 장면이 포함되어 있으니 원치 않는다면 가급적 영상 재생을 삼갈 것.

상세[편집 | 원본 편집]

2001년 9월 11일 화요일, 당일 오전 총 4대의 여객기가 잠입한 테러범들에 의해 공중 납치되었다. 이 중 여객기 2대는 뉴욕의 세계무역센터로, 1대는 버지니아 주 앨링턴의 펜타곤으로 갔다. 당시 날씨는 맑고 화창했는데 이날 미국이 공격 받으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이다.

1차 공격 1번 타워 충돌[편집 | 원본 편집]

1번 타워 (남쪽) 에 갑작스레 항공기가 충돌하는 영상


9월 11일 오전, 프랑스 출신의 영화감독 쥘 노데는 신참 소방관과 함께 소방관의 관한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있었는데 촬영 도중 항공기 소리가 점점 커지는 것이 낌세가 이상해서 카메라 앵글을 돌리다가 8시 46분에 항공기가 난데없이 날아와서 충돌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충돌한 항공편은 아메리칸 항공 소속의 AA 11편 보잉 767기로 1번 타워 건물 93층 ~ 99층에 10도 정도 기울여 충돌했다.

당시 현장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순간을 목격한 인근의 사람들은 충격에 빠졌다. 미국의 평범했던 아침의 일상은 이것으로 한순간에 깨지게 된다.

AA 11편은 당시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LA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던 국내선이였으며 이 테러로 인해 테러범을 포함한 92명과 북쪽타워에 있던 수백명이 사망하였다.

사고 당시엔 항공기의 조종 실수로 일어난 사고라고 생각 되었지만... 테러 이후 관제탑의 교신기록에서 하이재킹에 의해 일어난 테러였음이 밝혀진다.

2차 공격 2번 타워 충돌[편집 | 원본 편집]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된 2번 타워 충돌영상

17분 뒤인 오전 9시 3분, 1번 타워 충돌의 충격이 체 가시기도 전에 세계무역센터 2번 타워 (남쪽) 에 갑작스레 여객기가 날아와 충돌한다. 충돌한 항공기는 유나이티드 항공 소속의 보잉 767기 UA 175편 이다. 사람들은 두번째 충돌이 일어난 뒤 이것이 미국에 대한 테러라는 걸 알아차렸다. 2번 타워는 1번 타워보다 낮은 77 ~ 85층 부분이 40도 각도로 피격 당했으며 빌딩의 가장자리에 충돌한데다 피격 면적이 1번 타워에 비해 넓어서 나중에 충돌했는데도 1번 타워보다 일찍 무너지는 원인이 되었다.

해당 항공편은 보스턴 로건 국제공항을 출발하여 LA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던 국내선으로 이 테러로 인해 테러범을 포함한 60명과 2번 타워 상주자 수백명이 사망하였다.

3차 공격 펜타곤 건물 충돌[편집 | 원본 편집]

펜타곤 건물에 항공기가 충돌하는 영상


한편, 오전 9시 37분 46초에 아메리칸 항공 소속의 보잉 767 여객기 AA 77편이 미국 국방부 중심이라 할 수 있는 펜타곤 건물 서쪽편을 들이받아 건물 일부가 무너졌다. 이 테러로 인해 총 125명이 사망 하였다.

2번 타워 붕괴[편집 | 원본 편집]

2번 타워가 붕괴되는 순간

비행기가 세계무역센터 빌딩과 충돌해서 생긴 화재에 건물을 지탱하는 철근들이 녹아내려 오전 9시 59분에 세계무역센터 남쪽 빌딩이 무너졌다.

1번 타워 붕괴[편집 | 원본 편집]

다양한 각도에서 촬영된 1번 타워 붕괴영상 뾰족하게 솟은 송신탑을 보면 1번 타워임을 확인할 수 있다.

2번 타워가 붕괴된지 29분 뒤 오전 10시 28분, 세계무역센터 1번 (북쪽) 빌딩도 완전히 붕괴되었다. 그 큰 건물들이 차례대로 무너지면서 상대적으로 작은 주변의 건물들인 세계금융센터, 버라이즌 빌딩에도 피해가 갔으며 근처에 있는 코틀랜트가역도 천장이 무너져 내려 폐쇄 되었다. 이 지하철 역은 철로가 복귀되었지만 한동안 방치되어 유령역이 되었고 복구까지는 십수년이 걸렸다. 붕괴로 인해 세계무역 센터 일대는 초토화가 되었으며 3000여명이 사망하였다. 붕괴 이전에 화재의 열기를 피할 수도 없는 상황에다 죽음의 공포를 느낀 이들이 투신하는 끔찍한 장면이 뉴스에 포착 되었다.


쌍둥이 빌딩이 무너진 원인은 건물을 튼튼하게 짓기 위한 철근 구조물 공법 때문인데 결국 이것이 독이 되고 말았다. 화재의 열기 때문에 철근이 녹아내려 건물을 지탱할 수 없게 되자 힘없이 무너져 내린 것이다. 10여년간 지은 건물이 무너져 내리는건 불과 13초에 지나지 않았다.

UA 93편 테러 실패[편집 | 원본 편집]

마지막 여객기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은 오전 10시 3분 펜실베이니아 주 인근에 추락했다. 이 여객기는 백악관이나 미국의 국회의사당이 목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승객들이 자신들이 탄 비행기가 납치된 걸 알고 반란을 시도했으며 비행기를 조종하던 테러범은 자살 추락을 했다. 승객들이 맞서지 않았다면 미국은 더 피해를 입었을 게 분명하여 오늘날 이 승객들은 미국 내에서 영웅으로 추앙받고 있다 . 영화 <플라이트 93>이 이 민항기의 테러 사건을 다루었다.

테러 직후 미국의 전체 영공이 폐쇄 되었다. 당시 미국 내의 국내선들은 모두 강제로 착륙을 해야했으며 미국으로 오는 국제선들은 전부 회항시켰다.

테러 배후[편집 | 원본 편집]

배후는 당시 알 카에다 수장인 오사마 빈 라덴으로 미국의 대 아랍 정책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이 테러를 직접 기획한 사람은 알 카에다의 조직원인 칼리드 셰이크 모하메드이다.

테러범[편집 | 원본 편집]

아메리칸 항공 11편[1]의 납치범[편집 | 원본 편집]

  • Mohamed Atta(모하메드 아타) - 이 팀의 지휘자
  • Abdulaziz al-Omari(압둘아지즈 알 오마리)
  • Wail al-Shehri(와일 알 셰흐리) - 왈리드 알 셰리의 형.
  • Waleed al-Shehri(왈리드 알 셰리) - 와일 알 셰리의 동생.
  • Satam al-Suqami(사탐 알 수콰미)

유나이티드 항공 175편[2]의 납치범[편집 | 원본 편집]

  • Marwan al-Shehhi(마르완 알 셰히) - 이 팀의 지휘자. 모하메드 아타의 사촌.
  • Fayez Banihamed(파예즈 바니하메드)
  • Mohand al-Shehri(모한드 알 셰리)
  • Ahmed al-Ghamdi(아메드 알 감디) - 함자 알 감디의 형.
  • Hamza al- Ghamdi(함자 알 감디) - 아메드 알 감디의 동생.

아메리칸 항공 77편[3]의 납치범[편집 | 원본 편집]

  • Hani Hanjour(하니 한주르) - 이 팀의 지휘자
  • Khalid al-Mihdhar(칼리드 알 미드하르)
  • Majed Moqed(마제드 모퀘드)
  • Nawaf al-Hazmi(나와프 알 하즈미) - 살렘 알 하즈미의 형.
  • Salem al-Hazmi(살렘 알 하즈미)] - 나와프 알 하즈미의 동생.

테러에 실패한 유나이티드 항공 93편의 납치범[편집 | 원본 편집]

  • Ziad Samir Jarrah(지아드 자라) - 이 팀의 지휘자
  • Ahmed al-Nami(아메드 알 나미)
  • Saeed al Ghamdi(사이드 알 감디)
  • Ahmed al-Haznawi(아메드 알 하즈나위)

영향[편집 | 원본 편집]

미국 내 항공 보안 체계가 매우 엄격해졌다. 전 세계 민항기들의 조종실 문은 잠그는 게 원칙이 되었다. 하지만 이 규정으로 인해 저먼윙스 9525편 추락사고라는 비극을 만드는 원인이 되었다. 외부의 침입은 차단되지만 조종사 한명이 불손한 마음을 품고 문을 잠가버릴 경우 대응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미국 입장에서 9·11 테러는, 진주만 공습 이래 최초로 본토가 피해를 입은 사례이다. 비록 미국은 전쟁을 체험한 나라이고 패전의 경험도 있기는 했지만,[4] 미국 독립전쟁 이래 본토가 피해를 입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진주만 공습을 제외하고) 이 테러는 미국인들에게 공포심을 주기 충분했으며, 반전 여론이 위축되면서 조지 부시 대통령이 대외 강경책을 펼칠 명분을 제공했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대외 정책을 전환했다.[5] 당시 미국의 분노는 엄청나서 미국과 적대 관계에 놓인 나라들 조차 서로 자기들이 벌인일이 아니라고 적극 해명할 정도였고 북한 역시 애도를 표했다.

9·11테러가 있었던 해 10월에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해, 당시 아프가니스탄에 집권 중이던 탈레반 정권을 11월에 무너뜨렸다. 탈레반이 오사마 빈 라덴을 숨겨주고 있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2003년엔 이라크 전쟁을 일으키고 당시의 이라크 대통령 후세인을 체포했다. 그러나 (산악지대로 퇴각한)탈레반의 저항은 물론이고 미군 주둔에 반대하는 세력들의 게릴라식 공격이 이어지면서, 전쟁은 10년 이상 지속되었다. 미국은 계속하여 막대한 재정을 쏟아부어 군을 지원해야했다. 그리고 미국이 전쟁의 수렁에 빠져 국력을 손실하는 동안, 러시아와 중국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전투에서는 이겼으나 전쟁에서는 패배한 셈이다.

2011년 9월 11일, 테러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테러 10주년에 맞춰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진 자리에 9.11 메모리얼이 개장했다.


각주

  1. 세계무역센터 북쪽 빌딩 피격
  2. 세계무역센터 남쪽 빌딩 피격
  3. 펜타곤 피격
  4. 제 2차 세계대전은 물론이고 한국전쟁(6·25), 베트남 전쟁 등에도 참전한 나라이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남베트남을 지원했으나, 국내의 여론이 악화되는 등 상황이 여의치 않아 군을 철수했다. 결과적으로 이 전쟁은 북베트남 군의 승리로 끝났다.
  5. Patriot act 법도 이 때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