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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許蔿. 호는 왕산(旺山). 대한민국독립운동가, 의병장.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받았다.

1 생애[편집]

1854년 4월 2일 경상북도 선산군 하고면 임은동(현 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서 아버지 청추헌(聽秋軒) 허조(許祚)와 어머니 정부인 진성 이씨 사이에서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3명의 형을 두었으니, 맏형은 허훈이고, 둘째 형 허신(許藎), 셋째형 허겸이다. 요절한 허신을 제외한 이들 형제들은 허위와 함께 훗날 독립운동가로 활약했다.

그는 성장한 뒤 첫째 아내로 박팽년의 후손인 박독현(朴毒鉉)의 딸 순천 박씨를 맞이했고, 아내와 사별한 뒤엔 신재영(申在英)의 딸인 평산 신씨를 두번째 아내로 맞이했다. 평산 신씨 사이에서 아들로 장남 허학, 차남 허영(許瑛), 삼남 허준(許埈), 사남 허국(許國)을 두었고, 딸은 4명을 두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유학을 숭상하며 퇴계(退溪) 이황의 학통을 이어온 전형적인 유학자 가문이었다. 그는 가풍을 따라 어릴 때부터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5살 때 이미 글을 읽을 줄 알았고, 7살 때 한시를 지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달은 대장군이 되고(月爲大將軍)

별은 만병이 되어 따르노라(星爲萬兵隨)

또한 10살 때에는 다음과 같은 한시를 지었다.


꽃을 꺾으니 손에 봄이요(折花春在手)

물을 길으니 달빛이 집 안에 드네(汲水月入家)

15살 때 이미 삼경을 독파했고, 시경의 동복악기(東服樂器)의 제도와 서경(書經)의 천명의 이치 및 역경(易經)의 하도락서(河圖洛書)의 심오한 뜻에 관심을 보였다. 그의 학문적 욕구는 춘추, 자치통감 강목과 같은 사서는 물론, 고대의 전술과 천문, 지리 등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은 데가 없었다고 한다.

허위는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예도에 어긋남이 없었고, 형제간에는 우애가 두터웠다고 한다. 또한 유학의 기본 정치이념과 윤리관을 항상 숙지하여 자신의 생활을 검소하게 꾸렸고, 늘 굵은 베옷을 입으며 선비의 자세를 유지하고자 했다. 흉년이 들어었을 때 경상감사 이용직을 찾아가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을 구제하겠다며 2만냥이라는 거금을 받아낸 뒤 농민들에게 모두 나눠줬다.

1895년 을미사변단발령이 잇달아 발발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킬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때 허위는 이기찬(李起燦)과 이은찬, 조동호(趙東鎬) 및 이기하(李起夏) 등 인근의 지사들과 협의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정하고 1896년 2월 10일 김천 장날을 기해 김천읍으로 들어가 수백 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허위는 이기찬을 대장으로 추대하고, 자신은 참모장을 맡았다.

이기찬 부대가 정식으로 의병을 일으킨 것은 3월 10일로, 참모장인 허위는 금산군 금릉에 있는 무기를 습격하여 무기를 압수한 후 무장을 갖추었다. 이후 부대를 둘로 나눠서 각각 김산과 성주에 진을 치고 인근 지역에 격문을 발하여 의병을 모집했다. 허위가 중심이 된 이기찬 부대는 서울과 부산을 연결할 수 있는 요충지인 추풍령에 주둔하면서 그 일대에서 가장 많은 병력을 갖추고 있었다.

지례군수는 이 의병을 격파하기 위하여 군내의 자위군(自衛軍)을 소집하는 한편, 의병 봉기 사실을 대구관찰사에게 급히 보고하였다. 지례군에는 이른바 토비보방단(土匪保防團)이 조직되어 있어 동학농민전쟁 때는 동학군을 격파하기도 하였다. 이기찬 부대는 지례의 자위군을 쉽게 격파하였으나, 이어 대구로 진군했다가 공주와 대구에서 출동한 관군의 급습으로 고전 끝에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성주와 금산은 의병대는 모두 참패했고, 이은찬, 조동호 등 의병 주모자들은 관군의 포로가 되었고, 허위는 잔여 의병 가운데서 포군 1백여 명과 유생 70~80명을 모아 상주 및 금산의 지사들과 함께 직지사(直指寺)에서 다시 의병을 일으켰다. 이후 북상을 계속하여 충북 진천, 영동, 황간, 문경으로 진군했다.

그러나 허위에게 속히 의병을 해산하라라는 고종의 조칙이 근신 전경운(田慶雲)을 통해 전해졌다. 허위는 아관파천 후 친일내각이 붕괴되고 단발령이 철회되었으니 목적을 달성했다고 판단하고 어명에 따라 의병을 해산시는데 동의했다. 이후 맏형 허훈에게 가서 학문에 열중했다. 그러던 1899년 3월 신기선의 추천으로 45세에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그는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 주차일본공사수원(駐箚日本公使隨員), 중추원 의관(中樞院議官), 평리원 수반판사(平理院首班判事)를 두루 거친 뒤, 1904년 8월에는 평리원 서리 재판장(平理院署理裁判長)에 임명되었다.

그는 법관의 직무를 맡았을 때 세도가의 청탁을 배척하고 공정하게 판결했다. 한번은 김태식이 토지로 소송을 일으켰을 때 그의 집안 사람들이 허위에게 긴요하게 부탁했다. 그러나 허위는 이를 듣지 않고 김태식으로 하여금 소송에 지게 하고 엄하게 가둬버렸다. 그러나 김태식의 집안은 세력가였기에, 결국 판결을 뒤집었다. 이에 허위는 출근하지 않고 말하기를, "법관이 법률을 행치 못하니 마땅히 그 직책을 사퇴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그의 뜻을 전해듣고 소송을 허위의 뜻대로 재판결하게 한 뒤 허위에게 출근하기를 권했다.

또한 허위는 밀린 송사를 신속하게 처리하여 백성들이 억울하게 당하지 않도록 애썼다. 평리원 수반판사를 맡았을 때는 문란한 관기를 바로잡기 위해 엄정하게 재판했으며, 부정하게 기결된 사건일시 번복시키기도 했다. 그는 평리원의 기강 확립에도 힘써 법질서를 바로잡고 법관들의 품위 유지에도 노력했다.

이 시기, 그는 장지연 등과 교류하면서 자주적인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그는 유학자였지만 신학문도 두루 섭렵하면서 변화하는 세계사조에 대응하려면 '개신유학'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그는 유교정신에 바탕을 두면서 근대화를 지향하여 만민평등과 부국강병을 주장했다. 1904년 8월 10일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었을 때 구국방안으로 10개조 개혁안을 제출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르며, 재주가 우수한 자를 골라서 외국에 유학시킬 것.


2. 군정을 닦아서 불시의 변에 대비하고, 군사는 농사에서 나오고 농사는 군사에서 나오는 것이니 춘추로 무술을 연습하고 출입하면서 농사군과 교환할 것.

3. 철도를 증설하고 전기를 시설하여 교통과 산업에 이바지할 것.

4. 연탄을 사용하여 산림을 보호, 양성할 것.

5. 건답에는 수차를 써서 물을 대도록 할 것.

6. 뽕나무를 심어 누에를 치고, 못을 파고 물고기를 기르며, 또 육축을 기르도록 힘쓸 것.

7. 해항세와 시장세를 날로 더하고 달로 증가시켜 장사꾼들에게도 공평한 이익을 얻도록 할 것.

8. 우리나라 지폐는 폐단이 심해서 물가는 몹시 놉고 화폐는 지극히 천하여 공사의 허다한 재용이 고르지 못한즉, 은행을 설치하여 금, 은, 동전을 다시 통용시킬 것.

9. 노비를 해방하고 적서를 구별하지 말 것.

10. 관직으로 공사를 행하고, 실직 이외에는 차함하는 일을 일체 없앨 것.

고종은 이를 가상히 여겨 상소를 가납하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허위는 이내 소를 올려 사직의 뜻을 밝혔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은 풀 속에 묻힌 천한 물건으로 재주와 식견이 얕고 짧아서 높은 벼슬에 오를 수 없사옵고, 또 이름이 드날릴 수도 없사옵니다. 두 글자가 있는 것을 알 뿐이옵고, 성패와 이해는 돌아다보지 않고, 이에 감히 풀 위에 잠자고 창을 잡아 한 마음으로 적을 쳐서 나라를 회복할 생각을 먹었습니다. 혹 괘효하고 의병을 규합하며, 혹 글을 올려 대궐 앞에 부르짖었사오나 마침내 털끝만한 보답도 되지 못하옵고 한갓 폐하의 조심만 끼친 것이 이미 1년이 지났사옵니다.


그러하온데 폐하께서 신을 죄주시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발탁하시어 1년만에 승진하여 재상의 반열에까지 이를 줄 알았겠습니까. 신의 용렬함을 생각하오면 만에 하나도 이럴 수가 없사옵니다. 신이 만일 오랫동안 어진 사람들의 길을 막고 있사오면 이는 더욱 죄를 다할 뿐이옵고, 위로는 우리 성상께서 종시 보전해주시는 은택을 보답하는 것이 되지 못하겠나이다. 이에 감히 마음 속의 간절함을 아뢰오니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급히 신의 맡은 바 책임을 갈으시고, 주석의 신하를 골라 나라를 광구하는 효험이 있게 하시옵소서.

그리하여 의정부 참찬을 사임했으나, 고종은 1904년 10월 27일 허위를 이정소의정관에 임명했다. 그리고 1905년 3월 1일 비서원승에 배하고 가선 칙임관 2등으로 승진시키며 허위에 대한 신임이 두터움을 드러냈다.

1904년 2월, 일본은 러일전쟁을 벌이면서 한국 침략을 가속화하기 위해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조인시켰다. 이로서 일본은 한국의 군사요충지를 ‘합법적으로’ 확보하게 되었다. 이후 황무지 개척권까지 요구하자, 허위는 이상천(李相天)·박규병(朴圭秉) 등의 관료들과 함께 전국에 배일통문을 돌려 일제 침략상을 규탄하고 전국민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백성들에게 삼가 대의를 통고한다. 우리는 춘추라는 역사 책에서 복수를 중요시하고 왕은 강토를 지키기에 힘써야 한다고 들었다. 원수가 있으되 복수가 아니라면 사람이 사람노릇을 할 수 없고, 국토가 있으되 지키지 못하면 나라가 나라노릇을 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고금에 통하는 뜻이다.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하여 전번에 두 번이나 왕릉을 욕보였고, 근래 을미사변으로 국모를 죽여 우리의 원수가 되었으니, 저들과 같은 하늘 밑에 살 수가 없음은 어린 아이와 부녀자도 모두 아는 사실이다.


저들은 최근 용암포 사건으로 러시아인을 내쫓을 구실을 삼아서 의로운 깃발을 올린다고 하여 돌연히 출병하여서 우리의 외부를 위협하고 협약을 맺었다. 첫째, 시정을 개선하고 충고를 받아들인다. 이것은 언뜻 보기에 좋은 것 같으나 실은 우리 내정을 간섭하려는 것이다. 둘째, 대한의 황실 및 영토가 위험한 경우에는 필요한 임기응변의 조치를 빨리 취한다. 이것은 겉으로는 우리를 위하는 것 같으나 실은 우리의 국권을 빼앗으려는 것이다. 셋째,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사용한다. 이것은 말과 행동이 어긋남을 나타내는 것이요, 우리나라를 집어삼키려는 뜻을 부드럽게 나타낸 것이다.

이 협약은 구절마다 공법에 위배될 뿐만 아니라 전국의 이(利)를 취하는데 털끝하나 놓치지 않았다. 서북지방의 고기잡이와 철도는 이미 저들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말이 뛰달리듯 우리 땅에 들어와 섞여 사니 국내가 황폐하게 되었는데, 여기에다 또 이 조약을 인정하였으니 일국의 강토는 어찌 되는가. 의리로 보더라도 악독한 원수는 꼭 보복해야 하고, 시세로 보더라도 강토는 꼭 보전해야 한다. 앉아서 망하기를 기다르니보다 온갖 힘을 다하고 마음을 합하여 빨리 계책을 세우자. 진군하여 이기면 원수를 보복하고 국토를 지키며 불행히 죽으면 같이 죽자. 마음이 단결하여 한 소리에 서로 응하면 용기가 백배하고 충신의 갑옷과 인의의 창이 분발되어 곧 나아가니 저들의 강제와 오만은 꺾일 것이다.

여러 동지에게 원하노니 이 피 쏟아지는 원한을 같이 하자. 비밀히 도내 각 동지에게 빨리 통고하여 옷을 찢어 깃발을 만들고 호미와 갈구리를 부셔 칼을 만들고, 곳곳에 모여서 형세가 서로 돕고 머리와 끝이 서로 닿으면, 우리는 의군을 규합하여 순리에 좇게 되니 하늘이 도울 것이다. 저들과 러시아 군대가 서로 싸우니 병사가 전쟁 때문에 피곤하고 백성이 보급품 옮기기에 응접할 틈이 없다. 또 저들의 정당, 민당이 서로 갈등하여 국론이 미정되니 이러한 난국은 틀린 전략을 가져 올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필스이의 기회인 때를 놓치지 말고 지지부진한 의심을 말자. 5월 30일 일시에 거사하면 종사가 다행이며 백성과 신하가 다행이다.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1940년도분.

각지에서 이러한 격문에 자극되어 항일투쟁이 전개되었다. 평안도 연변에서는 군인들이 일본군대를 습격했고, 보안회는 일본의 황무지 개관권 요구를 규탄하는 민중시위를 전개했다. 이에 일본은 보안회를 급습하여 해산을 강요하고 간부들을 체포했다. 허위는 1904년 10월 일본의 재정고문 취임과 한국에 대한 내정간섭을 반대하는 활동을 전개했고, 12월에는 일진회와 공진회 등 매국단체를 분쇄하기 위해 정우회라는 단체를 조직했다. 그리고 동지들과 함께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고 백성의 분투를 호소하는 격문을 전국 각지에 다시 발송했다.

이에 일본은 1905년 1월 허위를 일본 헌병대에 구금하고 한국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의정부 참찬을 사직케 한 뒤 석방시켰다. 얼마 후 허위가 비서원승으로 임명을 받자, 일본은 한일의정서를 배척한 최익현의 상소 사건을 조사하면서 허위도 연루시켜 조사했다. 이때 일본 공사는 허위를 불러 배일운동을 중단할 것을 강압적으로 요구했다. 이에 허위가 답했다.

우리나라를 위하여 국권과 독립을 보전하고자 열심히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 황성신문 1905년 3월 14일자 기사.

그러자 일본 당국은 1905년 3월 11일 한일의정서를 반대하는 배일운동을 전개했다는 이유로 허위, 최익현, 김학진 등 3명을 헌병대에 구금했다. 다음날 최익현과 김학진은 석방되었지만, 허위는 4개월간 석방되지 않았다. 동년 7월 13일에야 일제 헌병의 감시하에 석방되었고, 7월 19일 강제 귀향 조치되었다. 허위는 고향에 돌아온 뒤 경상·충청·전라 3도의 접경인 지리산 삼도봉(三道峰) 밑의 지례 두대동(頭岱洞)에서 일제 관헌의 감시를 받으며 은거했다.

1905년 11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허위는 격분했다. 그는 경상, 전라, 강원, 경기도 각지를 돌며 동지·지사들과 앞으로의 대처방안을 모색하면서 의병을 다시 일으킬 준비를 하였다. 이때 만났던 인물들로는 곽종석과 이학균(李學均), 그리고 유인석 등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의병을 일으키는 데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또한 정환직이 의병을 일으키자 2만 냥을 지원하기도 했다.

1907년 7월 고종이 강제 퇴위하고 정미7조약이 강제 체결되어 대한제국군이 강제해산되었다. 이에 대한제국군 장병들은 각지에서 봉기하여 의병과 합류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했다. 이에 허위는 본격적인 항일의병투쟁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1907년 9월 경기도 연천, 적성, 양주, 파주, 이천 등지에서 의병을 모집한 뒤 해산된 강화진위대의 연기우 부대를 합류시켰으며, 강원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김규식 의병부대를 포섭했다.

이후 허위의 부대는 일본군과 여러 차례 교전했다. 1907년 9월 철원읍을 점령하고 연천군 우편취급소장을 비롯한 다수의 일본인을 포살했고, 포천군 외북면에서 일본군 70여 명과 교전하여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 동년 10월에는 포천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와 교전하였고, 병력 300명을 투입하여 안현읍을 점령한 뒤 일진회 회원들을 색출, 포살했다. 이어 동년 11월에는 포천군 고자촌에서 일본군 1개 소대와 교전하여 소탕했고, 철원읍을 다시 점령하여 우편취급소를 불태우고 일본인 순사와 친일파들을 처형했다.

1907년 12월 수천명의 의병을 모은 그는 지평·가평 등지에서 활약하고 있던 이인영 의병부대와 긴밀히 연락하였으며, 철원에서 활동하던 김규식 의병부대를 통하여 황해도 장단의 김수민(金秀敏) 의병부대와도 긴밀한 연락을 주고받았다. 이들은 보다 효과적인 의병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연합 작전을 모색했고, 그 결과 이인영 등과 함께 13도 창의군을 구축하고 통합군 사령부를 설치하여 서울 진공을 하기로 합의하고 이인영을 총사령으로 추대했다.

이인영은 1907년 12월 평안도,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의 의병대에게 격문을 보내 경기도 양주로 집결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발송했다. 대한매일신보는 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용병(用兵)의 요체는 그 고독을 피하고 일치단결하는 데 있은 즉 각도의 의병을 통일하여 궤제지세(潰堤之勢, 둑을 무너뜨리는 기세)를 타서 근기(近畿)에 범입(犯入)하면 천하를 들어 우리의 가물(家物)이 되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한국의 해결에 유리함을 볼 수 있을 것이다.

- 대한매일신보 12월 1일자 기사.

이리하여 각지에서 몰려온 의병 수는 약 8천에서 1만명에 이르렀고, 의병장들은 13도 의병 통합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총대장에 이인영, 군사장에 허위를 추대했다. 그리고 각 도별 부서를 다음과 같이 편성했다.

관동창의대장 민긍호


호서창의대장 이강년

교남창의대장 박정빈

진동창의대장 권중희[1]

관서창의대장 방인관(方仁寬)

관북창의대장 정봉준

13도 창의군이 결성된 뒤, 허위는 이인영 등과 함께 서울진공작전을 계획, 추진했다. 그는 연합부대가 서울 진공작전을 결행하기에 앞서 한국 주재 각국 영사관에 선언문을 보내어 항일전의 합법성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그는 의병전쟁을 광무황제의 칙령에 따른 한국의 독립전쟁임을 강조하고, 의당 국제법상 교전단체이므로 전쟁에 관한 모든 법규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제 헌병의 기밀보고에 따르면, 이인영 명의로 된 이 선언문의 한 부는 영국 정부로 보내졌다고 한다. 이 격문 외에도 「해외동포에게 보내는 격문(Manifesto to all Coreans in all Parts of the World)」도 이 때 발표되었는데, 여기서는 다음과 같이 의병전쟁의 당위성을 천명했다.

동포 여러분, 우리는 일치단결하여 조국에 몸을 바쳐 우리의 독립을 회복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또 야만적인 일본인의 잔혹한 행실과 불법행위를 전 세계에 호소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들은 교활하고 잔인하여 진보와 인간성의 적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여 모든 일본인과 그 주구들과 야만적인 군대를 격멸하는 데 힘을 모아야 할 것입니다.

이후 13도 창의군 선봉대를 맡은 허위는 각 부대별로 서울 동대문 밖에 집결토록 조치한 뒤, 3백명의 선발대를 거느리고 1908년 1월 말 동대문 밖 30리 지점까지 깊숙이 진공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이를 사전에 감지하고 서울 외곽 방비에 만전을 기했다. 그들은 의병의 진출로를 차단하는 한편, 한강의 선박운항을 일체 금지하고,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했다. 결국 동대문 밖 30리까지 진군한 300명의 선발대는 미리 대비하고 있던 일본군의 공격을 받아 화력과 병력 등 전력의 열세로 말미암아 패주했다.

설상가상으로, 총대장 이인영이 도중에 부친상을 당하여 모든 임무를 그에게 맡기고 떠났다. 이후 그는 서울로 진군하는 걸 포기하고 의병부대들이 각자의 근거지를 중시믕로 유격전을 전개하는 전략을 채택했다. 그는 임진강 유역을 근거지로 삼아 군율을 정비했고, 인근 마을에 민폐가 없도록 조치하여 지역민들의 호응을 이끌었다. 또한 일본군의 진지를 기습하여 전선을 절단해 통신을 마비시키려 했으며, 각지의 일본 관공서를 습격하여 일본군과 친일파를 포살했다.

이에 일본 당국은 장박(張博)을 보내 의병을 해산시키도록 회유햇으나, 허위는 듣지 않았다. 신기선이 허위의 부하 이병채에게 투항을 권고했으나, 이병채는 이를 거부하고 죽을 때까지 항쟁하겠다고 답했다.[2]허위는 수천 명의 의병을 적성 감박산에서 매일 훈련시켰고, 양주 등 인근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수비대를 기습해 큰 피해를 입혔으며, 무기의 구입을 위해 국내에 밀사를 파견하는 한편 무기를 제조하는데도 힘을 쏟았다.

1908년 4월 21일, 허위는 이강년, 이인영, 유인석, 박정빈 등과 함께 전국 각지에 통문을 발송하여 의병 항일투쟁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그해 5월에는 박노천(朴魯天)과 이기학(李基學) 등의 부하들을 서울로 보내어 통감부에 다음과 같은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1.태황제(고종)를 복위할 것.


2. 외교권을 환귀시킬 것.

3. 통감부를 철거할 것.

4. 일본인의 서임을 시행치 말 것.

5. 형벌권의 자유를 회복할 것.

6. 통신권의 자유를 회복할 것.

7. 경찰권의 자유를 회복할 것.

8. 정부조직의 자유를 회복할 것.

9. 군대시설의 자유를 회복할 것.

10. 의관을 복고할 것.

11. 을미, 을사, 정미의 국적을 자유로이 처참케 할 것.

12. 내지의 산림, 천택, 금, 은, 동광을 침해하지 말 것.

13. 내지의 부동산을 매매하지 말 것.

14. 항해권을 환귀시킬 것.

15. 어채의 이익을 침해하지 말 것.

16. 교육권의 자유를 회복시킬 것.

17. 출판권의 자유를 회복시킬 것.

18. 군용지를 환귀시킬 것.

19. 일본인의 거류지를 환귀시킬 것.

20. 철도를 환귀시키고 물러갈 것.

21. 확회 이외를 자유롭게 해산시킬 것.

22. 해관세법의 자유를 회복할 것.

23. 일본인의 상업 물품을 제한할 것.

24. 일본인의 상업 물품을 제한할 것.

25. 일본인의 상륙을 제한할 것.

26. 국채를 시행하지 말 것.

27. 인민의 손해를 배상할 것.

28. 일본 은행권을 시행하지 말 것.

29. 지방의 일본군 병참을 철거할 것.

30. 일본에 있는 망명객 등을 속히 체포하여 국내로 송환할 것.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융희 2년 5월 19일.

그는 이 30개조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끝까지 항전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13도 의병연합부대를 재구성해 다시 한 번 서울 진공작전을 시도하려 했다.

허위는 경기도 영평군 서면 유동의 박정연의 집에서 은신하면서 제2차 서울진공작전을 구상했다. 그러나 일본군에게 체포된 뒤 고문을 이기지 못한 의병의 실토로 그의 은신처가 발각되고 말았고, 오오타 일본군 헌병대위 이하 12명의 일본 헌병대가 1908년 6월 11일 급습하면서 끝내 체포되었다. 1908년 6월 17일 서울로 이송된 그는 오오타 대위의 취조를 받을 때 자신의 뜻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한국의 부흥을 꾀하는 이유는 결코 한국인만을 위함이 아니라 실은 동양평화에 입각해서이다. 만일 일본이 한국을 병탄한다면 중국은 필히 일본을 능멸할 것이어서 중일 양국의 교의는 원만치 못할 것이니 어떻게 동양평화를 유지하겠는가. 그러므로 먼저 일본은 성심 성의껏 한국을 돕고 다시 진심으로 중국을 돕는다면, 이에 일본은 맹주로서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다.

오늘 내가 한국의 부흥에 힘을 다하는 것은 실로 세계의 대세를 보고 일본을 위해서나 또는 한국민을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오늘 잡혀가는 욕을 당한다고 해서 조금도 슬퍼하지 않는다. 바라건대 하루 속히 경성에 가서 일본 당국의 대관에게 이 소회를 말하겠으며, 만일 기회가 된다면 일본정부의 당사자에게 극언할 생각이다.

서울로 압송된 허위는 일본군 헌병사령부에 구속되어 일본 헌병사령관 아카시의 심문을 받았다. 그는 의병을 일으킨 동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일본이 한국의 보호를 부르짖는 것은 입뿐이요, 실상은 한국을 멸할 흑심을 가졌다. 우리들은 결코 이를 좌시할 수 없어 미력하나마 의병을 일으킨 것이다.

이에 아카시는 다음과 같이 설득했다.

일본의 한국에 대하는 것은 비유하자면 병자를 안마하는 것과 같다. 팔다리의 몸둥이를 주무르고 두드리면 일견 병자를 고통에 떨어뜨리는 것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병자를 치료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며, 마침내는 병자의 병은 낫게 될 것이다.

허위는 책상 위의 연필을 가리키며 대답했다.

이 연필을 보라. 일견 붉은 색이지만 그 내면은 남색이지 않은가. 귀국이 한국을 대하는 것이 이와 같다. 그 껍질과 내면이 크게 다름은 다툴 것도 없이 명백한 것이다.

훗날 아카시는 허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몇백, 몇천의 의병장 가운데에서도 성망이 뛰어나고 한학에 조예가 깊으며, 특히 역학에 밝아 중민의 섬기는 바 되어 이르기를 선생의 경칭으로 대한 사람이다. 생각컨대 폭도 토멸기 최후의 비괴 허위의 체포로 말미암아 폭도의 세력은 거의 궤멸하고 그 성질은 일변하기에 이르렀으니, 곧 암살의 시대가 온 것이다.

허위는 재판을 받던 중 한국인 판, 검사들로부터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밝히라는 요구를 받고 다음과 같이 답했다.

너희들은 비록 한국에서 났으나 한결같이 교활한 왜적의 주구이니 이런 말을 할 것이다. 나는 대한국의 당당한 의병장이다. 너희들과 변론하고자 하지 않으니 다시는 묻지 말라.

일본인 재판관이 물었다.

의병을 일으키게 한 것은 누구이며, 대장은 누구냐?

허위가 웃으면서 대답했다.

의병을 일어나게 한 것은 이등박문(이토 히로부미)이요, 대장은 바로 나다.

재판관이 어찌하여 이등박문이냐고 묻자, 허위가 답했다.

이등박문이 우리나라를 뒤집어 놓지 않았다면 의병은 반드시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의병을 일으킨 것은 이등박문이 아니고 누구이겠느냐?

1908년 7월 7일 평리원으로 회송되어 경성공소원에서 많은 이들이 방청한 가운데 심문을 받았다. 이때 재판관이 본인이 허위가 맞느냐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나는 허위이지만 그대들의 심문에 대답하지 않겠다. 그대들은 모두 일본인이요, 나는 한국인인즉 일본인의 재판을 받을 수 없다.

이에 재판관이 말했다.

우리는 미록 일본인이나 한국정부에 고빙되었은즉 한국의 사법관일 뿐만 아니라 또 사법관은 한국 황제폐하의 어칙에 따라 법률에 준거하여 재판하는 것이다.

허위가 반박했다.

{[인용문|그것은 결코 태황제 폐하의 참뜻이 아니시다. 한일협정도 일본이 강력으로 압박하여 성립한데 불과하며, 소위 법률이란 것도 그대들이 마음대로 제정한 것이니 우리들 한국인은 그 법률에 복종할 의무가 없다.}}

재판관이 물었다.

그러나 그대가 포박되었을 때는 일본 헌병의 취조에 대답하지 않았는가?

허위가 답했다.

그때는 서로 담화였지만 그대들의 심문에는 대답하고 싶지 않다.

재판장이 분노하여 그를 위협했다.

대답하고 싶지 않다면 대답하지 않아도 상관없다. 헌병의 조서에 따라 판결할 테니 어떠한가?

허위는 당당하게 답했다.

그것 또한 그대들의 마음대로이다. 한번 죽음은 본시 각오한 바 있다.

결국 1908년 9월 18일 일본 재판장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았고, 9월 22일 그의 가족이 상고를 신청했으나 기각되었다. 허위는 죽기 전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서를 보냈다.

너희들은 우둔하기가 나보다 심한 것 같으니 지금의 시국과 정책을 말할 필요는 없으나, 만약에 박아한 대군자를 만나 학업을 닦아서 그 빼내지 못한 것을 빼내고 밝혀서 세상을 위한 좋은 양재가 되어 우리의 국권을 만회하고 동양평화를 유지하게 된다면 후생이 두렵다는 것을 어찌 알게 될 것이겠느냐. (중략) 나라 일이 이에 이르렀으니 죽지 않고 어찌 하겠나. 내 지금 죽음의 자리를 얻었으니 너희 형제는 와서 보도록 하라.

사형이 집행되기 전, 일본인 승려가 불경을 외어주려 했다. 그러자 허위가 나무랐다.

충의의 귀신은 스스로 마땅히 하늘로 올라갈 것이요, 혹 지옥으로 떨어진대도 어찌 너희들의 도움을 받아 복을 얻으랴.

대한매일신보 1908년 10월 22일자 기사에 따르면, 한국인 검사가 "시신을 거둘 사람이 있는가?"라고 묻자 다음과 같이 답했다고 한다.

사후의 거둠을 어찌 괘념할 것인가. 이 옥중에서 썩어도 좋으니 속히 형을 집행하라.

1908년 10월 21일 오전 10시, 허위는 경성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향년 54세.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허위에게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했다.

2 평가[편집]

허위는 본래 철저한 유학자 가문에서 성장한 전형적인 유생이었다. 그는 근왕적 충의 사상이 투철하여 을미의병 때 위정척사에 의한 춘추대의론을 명분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하지만 관직에 나아간 이후에는 장지연 등과 교류하면서 서양의 학문을 받아들였고 유교 정신을 바탕으로 하되 서양의 앞선 문물과 기술을 두루 익혀야 한다는 '개신유학'을 주창했다. 의정부 참찬으로 재직할 때 10개조 개혁안을 정부에 건의했는데 그 내용은 철도, 연탄, 은행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등 진보적인 성격을 보인다.

1905년 이후 국권 회복을 위해 의병 투쟁을 전개한 그는 13도 창의군을 주도하여 서울 진공 작전 때 군사장으로서 일본군과 직접적으로 교전했으며 각국 영사관에 통문을 돌려 일본을 규탄하고 한국의 독립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했다. 그는 의병 투쟁을 단순한 무력 투쟁이 아닌 국제 사회를 인식한 항일 투쟁 노선으로 발전시켰으며 자신의 의병 투쟁이 비단 한국을 위해서뿐만 아니라 일본을 위해서도 좋은 일이라며 한국이 독립되어야 동양 평화가 유지된다고 하는 동양평화론을 강조했다. 허위는 을미의병과 정미의병 때 주도적 역할을 전개하는 한편 관리로서 한국의 부국강병을 위해 개혁안을 제시하는 등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구국 정신은 가문에도 이어져 그의 형제 및 친척 다수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3 각주

  1. 독립유공자로 지정된 권중희와 동명이인이다.
  2. 대한매일신보 1908년 2월 8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