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훈

許薰. 호는 방산(舫山).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독립유공자 허위, 허겸의 형이다.

1 생애[편집]

허훈은 1836년 4월 14일 경상도 선산도호부 하구면 임은동(경상북도 구미시 임은동)에서 허조(許祚)와 부인 진성 이씨의 4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허훈 가문은 일찍부터 근기 지방의 남인들과 인연을 맺고 있었다. 입향조 허돈(許暾)은 허목의 문인이었고, 허훈의 증조부 허임(許恁)은 채제공의 문인들과 교유하였다.

허훈은 어렸을 때 증조부 허임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했고, 29세 때 김해부사로 부임한 허전(許傳)의 문인이 되어 허목과 이익으로 이어지는 근기 남인의 학풍을 계승하였고, 나아가 유성룡의 학통을 계승한 유주목(柳疇睦)의 문인이 되어 영남학파의 학문도 섭렵하였다. 따라서 허훈은 근기학파의 실학을 받아들인 가운데 영남학파의 성리학적 분위기도 수용할 수 있었다.

허훈은 국가 재정·국방 등의 현실적인 분야에 관심을 기울였고, 한편으로는 이기론에서 주리적인 측면을 강조하여 사회 문제를 원칙적인 수준에서 접근하고자 하였다. 허훈의 이러한 학문적 경향은 조선 말기의 상황에서 현실 개혁적 성향으로 기울지 않을 수 없었고, 안동 유림의 의병 투쟁에 맞추어 기꺼이 의병 부대를 조직하는 데 이르렀다. 또한 두 아우 허겸과 허위의 의병 투쟁과 장지연의 계몽운동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허훈은 아우 허위와 함께 1894년 동학농민항쟁을 피하여 흥구(현 청송군 진보면 흥구리)로 이거하였다. 1894년 여름부터 동학농민군의 읍성 점령과 양반 지주층에 대한 보복이 각처로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1895년 허훈은 진보에서 피난 생활을 하고 있던 중 을미사변단발령 공포의 소식을 들었다. 또한 1896년 1월 20일 안동을 필두로 각처에서 의병이 창의하였다는 소식도 들었다.

마침 허훈의 형제들이 고향인 선산 임은에 돌아와 있던 중에 안동의진 의병장 권세연의 창의를 독려하는 편지를 받게 되었다. 허훈 형제들은 창의를 결심하였고, 허훈은 진보에서, 허위는 김산에서 창의하기로 하였다. 허훈은 고향에서 진보 흥구로 귀가하여 1896년 4월 초순 창의하였다.

진보의진(眞寶義陣)의 창의장은 허훈이고, 부장은 신상익(申相翊)이었다. 1896년 청송의진의 진중일기인 <적원일기(赤猿日記)>에 의하면, 진보의진은 창의 후 어천, 남면 화마리 등지로 진영을 옮기며 안동·청송·영양·의성 등 주변 의병진과 사통(私通)을 교환하며 협조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특히 청송의진의 감은리 전투 후 진보의진은 영양·청송의진과 합세하여 의성의진을 지원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였고, 안동의진 배후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다.

을미의병 이후 진보 흥구에 우거하고 있던 허훈은 1905년에 아우 허겸허위에게 전답 3천여 두락을 군자금으로 제공하였다. 1907년 봄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의 원장에 추대되었지만 그 해 8월 23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0년 허훈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2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