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석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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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錫海. 호는 서산(西山). 대한민국독립운동가, 민주운동가, 철학자, 교수. 4.19 혁명 때 교수들의 집단 시위를 이끈 인물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899년 음력 3월 15일(양력 4월 24일) 평안북도 철산군 여한면 문봉리에서 부친 정주언(鄭伷彦)과 모친 광주 노씨 노신언 사이의 5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하동 정씨 한림공 정림의 21세손으로, 호는 서산이다. 정림은 세종대왕 초기 한림학사로, 국사에 직언을 하다가 철산에 유배된 뒤 그곳에 터를 잡았다. 그의 후손은 철산에서 크게 번성하여 1현 6충이 났고, 1서원 6정려가 내려졌다고 한다. 정묘호란정봉수, 정기수 형제가 후금군에 맞서 의병 활동을 벌였고, 병자호란 때 정기남, 정순남 형제가 청나라 군대에 맞서다 전사했다. 정석해가 태어날 무렵, 철산군민의 40%가 정씨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철산군에서의 하동 정씨의 위세는 상당했다.

그의 집안은 어느 정도의 재산을 보유하고 있는 중산층이었고, 대대로 서당 훈장을 맡았다. 부친 정주언 역시 훈장을 맡아 문봉리에서 5리 떨어진 덕화동 화천리에 '인화재'라는 서당을 세우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정석해는 6살 때 이곳에 들어가 천자문을 읽었고, 이듬해 십팔사략 초권을 몇 달 배웠다. 얼마 후 인화재가 신식학교로 변하면서 부친이 그곳의 교장 겸 교사를 담당하였고, 한학만 가르치던 인화재는 서양의 학문도 다루었다. 정석해는 학교에 초빙된 서양 교사들로부터 신식 학문을 익히며 세상의 흐름을 차츰 파악했다. 몇년 후, 부친이 온 가족과 함께 개신교로 개종하면서, 그 역시 개신교인이 되었다. 그는 집에서 10리 쯤 떨어진 교회에 다녔고, 1907년 장로회 철산교회 장관선 목사가 설립한 명흥학교로 옮겨 소학교 교육을 받은 뒤 13세 때인 1911년 4월에 졸업했다.

1914년 11월 부친 정주언이 선천 사경회에 다녀온 뒤 "신성학교 교장 윤산온 씨가 학기 도중이지만 너를 받아주겠다고 하니 가자"라고 하여 곧장 집을 떠나 1학년 마지막 학기에 입학했다. 그는 중간에 들어갔지만 모든 과목을 다 따라갈 수 있을 정도로 총명했으며, 처음 대하는 과목인 영어에 흥미를 강하게 느꼈다고 한다. 그가 제일 자신있는 학문은 수학으로, 1학년에는 산술, 2학년에는 기하, 3학년은 물리를 배울 때 탁월한 수학 능력을 발휘해 최우등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3학년 마지막 학기 때 선생들의 수준에 불만을 품은 동창생들과 함께 '다까회'를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동맹 휴학을 벌였다가 출학 명령을 받았다. 학교 측은 잘못을 시인하고 뉘우친다면 다시 받아준다고 했지만, 정석해는 학교를 아예 그만뒀다.

그렇게 1916년 8월 신성학교를 그만둔 정석해는 평북도청에서 열린 교원자격 시험에 입시해 8명 중 3등으로 합격했다. 이때 창성군 동창면 대유동에 있는 프랑스인 금광에 교회가 마련한 소학교에서 아이들을 지도할 교사가 되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이를 수락하고 1년간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하지만 더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뿌리칠 수 없어서 이듬해 3월 교직을 그만두고 경성으로 향했다. 1917년 연희전문학교 입학시험을 통과하여 문과 3회 입학생이 된 그는 백상규 교수로부터 논리학을 전수받고 그때부터 논리학에 대해 흥미를 느꼈다. 이후 연희전문학교에서 공부에 매진하다가 1918년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신문을 통해 접하고, 조선독립을 꿈꾸기 시작했다.

그러던 1919년 1월 고종이 붕어했다는 소식이 조선 전역에 전해지고, 뒤이어 고종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에 민중은 배일의식이 강렬해졌고, 1919년 3월 1일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이 거행되면서 3.1 운동이 촉발되었다. 이때 정석해도 독립만세시위에 가담했고, 3월 2일 연희전문학교에 일찍 등교해 동창생들과 함께 앞으로 어찌할 지를 논의했다. 그 결과, 3월 3일은 고종의 장례일이니 장례를 엄숙히 치러야 하는 만큼 이날만은 소요를 피하기로 하고, 4일에는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 서울 구경을 하고 선물도 사가지고 5일에야 귀향할 터이니, 5일 아침에 서울역에서 거사하여 독립운동을 지방에도 파급시키도록 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3월 5일 아침에 서울역 광장에 모이도록 시내 각 학교의 대표들과 연락하기로 했다. 이때 정석해는 시골 귀향객들에게 독립선언문을 주어 보내야겠다고 판단하고, 박승렬, 계병호와 함께 학교의 등사판과 종이를 가지고 북아현동 산길을 통해 하숙집으로 가서 기미독립선언서를 등사했다. 이후 철산군 출신의 인사 유봉영에게 등사한 선언서 일부를 전달하기 위해 서대문 우편국 옆에 있는 우체통에 넣어 우송하였다. 3월 3일 고종의 장례에 참여한 뒤, 다음날 연희전문학교에 다시 모여 구체적인 시위 계획을 논의했다. 3월 5일 아침 서울역에서 발발한 독립만세시위에 참가했다. 이때 그는 일제 헌병들이 군중을 잔혹하게 짓밟는 광경을 목격했다. 1969년 3월 <신동아>에 기고한 '남대문 역두의 독립만세-기미년 34.1 운동의 증언'에서, 그는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왜 순사들이 칼로 학생들을 마구 내려쳐서 길 복판에는 유혈이 낭자하였다. 왜경들은 머리를 맞은 이, 팔 맞은 이, 이들을 구호하러 나온 간호원들까지도 마구 체포하는 판이었다.(중략) 나는 건너편으로 피신하여 한고물상으로 들어갔다. 물 한 모금 얻어 마시고 한참 쉰 후 다시 거리로 나섰다. 한복을 입은 덕택에 거리로 나와도 일경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거리에서 학생들이 몇 명만 몰려 있기만 해도 모조리 체포하는 것이었다. 조선은행을 돌아서니 얼굴에 칼 맞은 학생 하나가 피를 흘리며 왜경에게 붙잡혀 가는 것이 보였다. 치가 떨렸다. 대한문 모퉁이에 이르니 또 흰옷을 입은 여학생 4, 5명이 마구 얻어맞으며 일경에게 붙잡혀가고 있었다.


이날의 왜놈 경찰의 잔인한 소행은 필설로 다 형언할 수 없었다. 맹수요, 독사이지 인간은 아니었다. 남녀 학생을 칼로 찌르고 총개머리로 때리고, 마구 잡아가는 것은 인간의 정으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울 정도로 극악했다. 그때 잡힌 학생들이 받은 악형은 얼마나 참혹하였던가! 왜놈은 잔인무도한 귀축이었다. 3월 5일 학생데모 이후로는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고 거리가 살벌한 가운데 어디를 가나 무시무시하였다. 학교는 물론 폐쇄되었다. 학생들은 어디서나 모일 수 없었다.

이후 하숙집에 돌아온 그는 일제 형사의 수색에 시달리다 3월 13일 고향으로 돌아갔고, 3월 18일에 압록강을 건너 만주로 망명했다. 이듬해인 1920년 5월 말, 정석해는 만주에서 베이징 또는 상하이로 가기 위해 봉천에 들렀다. 이때 그곳에서 유봉영을 만났는데, 유봉영은 "누가 그랬는지 몰라도 나한테 독립선언서를 보냈더라."고 말했다. 정석해는 그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는 걸 짐작했지만, 괜히 밝힐 필요 없다고 여기고 자신이 그랬다고 하지 않았다. 그후 유봉영은 선언서 사본을 고이 간직하다가 8.15 광복 후 한국연구도서관에 기증했다. 후에 정석해가 사본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을 알아낸 한국연구도서관이 정석해와 유봉영을 초청하여 정석해가 유봉영에게 사본을 넘겨주는 광경을 사진으로 남겼다. 이후 선언서 사본은 독립기념관에서 현재까지 보관되고 있다.

만주로 망명한 정석해는 1920년까지 단둥, 길림, 국내를 오가며 무기의 전달, 요원의 잠입 안내, 국내 인사의 망명 등 독립운동 조직의 비밀 연락원 임무를 수행했다. 하지만 정석해 본인은 이에 대해 자세히 밝히지 않았고, 정작 자신이 속한 그룹이 어떤 조직과 연계했는지 알지 못했다. 따라서 이 기간 그의 활동상을 밝혀주는 직접적인 자료는 많지 않다. 그의 대략적인 증언에 따르면, 김동평, 김진제로 이어지는 조직에 속해 있었고, 김동평이 정석해에게 육혈포 넉 자루를 건네주고 국내로 운송하게 하는 등 실질적으로 작전을 주도했다고 한다.

정석해의 회고에 따르면, 김동평은 충남 연산 출신으로, 한학을 공부한 의병장이었으며, 신흥무관학교를 졸업한 뒤 윤세복이 무송현에 설립한 백산학교를 근거지로 활동한 독립군의 일원이었다고 한다. 또한 이극로의 회고에 따르면, 김동평은 김석현이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다고 한다.[1] 1916년 김동평이라고도 하는 김석현은 환인현의 조선인 독립운동을 감시하던 일제 경찰보고에 자주 등장했다. <불령단 관계 잡건-조선인의 부-재만주의 부 5>, 기밀문서 제43호(1916.8.5)에 따르면, 김석현은 1916년 8월 부민단의 일원으로 환인현을 담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일제 정보기관들은 30세의 충청도 출신 김석현이 김백단, 김동평이라는 이명을 사용한다는 것까지 파악했다. 김석현은 윤세복의 형인 윤세위의 집에 머무르면서 부민단 활동을 하였고, 1917년 환인현 조선인 조합 지부를 찾아가 간부들을 사무실에서 쫓아내고 일본민단장이라고 써서 성내를 끌고 다니는 등 큰 망신을 주기도 했다.[2]

부민단의 간부로 활동하던 김동평은 3 1운동 이후 북간도 길림시와 서간도 안동현을 연결하며 무장투쟁을 위한 무기와 군자금 확보 투쟁을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간도의 대한군정서나 서간도 한족회의 무장세력(서로군정서)와 모두 연계되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김동평, 김진제 그룹은 러시아 혁명군에서 흘러나온 무기를 확보해 독립군에 전달하는 한편, 이를 활용하여 국내에서 군자금을 확보하고 국내 운동 세력들과 만주 지역 무장세력간의 연락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석해는 이 조직에서 운반과 연락, 안내 등의 임무를 맡았다. 그가 처음 맡은 임무는 김동평이 확보한 무기를 단둥현을 거쳐 국내로 반입하는 것이었다. 1919년 5월 소형 마우저 권총 4정과 총신이 긴 리볼버 2정을 인수해 단둥으로 운반한 후 이륭상회에 잠시 보관했다가, 다시 압록강을 건너 국내로 잠입해 박정건, 김규형 등 선천 지역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전달했다. 그는 경찰의 감시망을 뚫고 무기를 전달한 뒤 성공적으로 귀환했다.

그는 뒤이어 조직원들을 국내로 잠입시키는 안내 역할도 수행했다. 김동평의 도강증을 마련하여 그가 안전하게 국내로 들어와 박정건 등과 접촉할 수 있도록 안내했다. 정석해는 이외에도 안동과 상주의 유림을 서간도로 모셔 오라는 밀명을 받아 다시 국내로 잠입하여 유만식, 조수연 등을 성공적으로 모셔오기도 했다. 이후 1920년 5월 말 독립운동 조직의 후원을 받으며 상하이로 가서 이광수, 안창호를 만났고, 안창호에게서 큰 감화를 받아 흥사단 원동지회에 가입했다. 가입 순번은 233번이었다고 한다. 안창호는 그에게 "민족을 염두에 두더라도 장래를 위해 늘 자아의 성장을 이뤄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공부해야 한다."고 충고했다. 그는 중단한 학업을 계속하기로 마음먹고, 이 일을 이광수와 상의했다. 이광수는 자기도 학문을 다시 할 생각이 있어 조사를 해봤더니, 어디서 세웠는지는 모르나 성 요한 대학이란 곳이 있다고 했다. 그곳에 미국 유학을 다녀온 중국 학자들이 많이 있으며, 특히 사회학에 이름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이광수의 조언에 잠시 성 요한 대학을 갈까 생각했다가, "여기서 뭐 대학 다닐 것이 아니라 아예 서양에 가는 게 옳지 않겠는가. 여기까지 와서 서양인에게 배워 온 중국 사람 교수의 지도를 다시 받을 게 뭐냐. 밖에 나온 바에야 아예 본고장 서양에 가서 공부하자."라고 판단하고 서양행을 결심했다. 정석해는 중국의 학자 리스쩡이 설립한 '유법검학회'에 가입한 뒤, 임시정부 발행의 여행권을 받고, 다시 강서성 교육부에서 내준 호조를 가지고 200명 가량의 청년들과 함께 서양 유학길에 올랐다. 1920년 11월 7일 상하이를 출발하여 그해 12월 4일 파리에 도착하였고, 유학길 때 친구가 된 이정섭과 함께 파리에 있는 외교위원부장 황기환을 찾아가 프랑스어를 가르칠 학교를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황기환은 알아보겠다고 답했으나, 5.6일이 지나도 아무 소식이 없자 답답한 나머지 황기환을 찾아가 따졌다.

황기환이 "무슨 연락이고 있을 테니 돌아가 기다리시오."라고 답했지만, 그는 이정섭과 함께 직접 황기환이 알아보고 있다는 '보베'라는 학교를 찾아가기로 결의했다. 그러나 막상 보베라는 시골에 오니 학교가 보이지 않아 어찌할 바 모르다가, 한 친절한 가톨릭 신부의 안내로 어느 콜레주에 찾아갈 수 있었다. 이후 6개월간 공부했으나 학비가 다 떨어지자 1921년 6월 보베를 떠나 파리로 가서 노동 소개소의 도움으로 어느 약국에 취직했다. 그러나 생활비가 비싸서 곤경에 처했다가, 독일에서는 생활비가 적게 든다는 소식을 듣고 독일로 가기로 결정했다. 1922년 봄 뷔르츠부르크에 도착한 그는 어느 김나지움의 교수로부터 독일어와 문화를 전수받았고, 그해 10월 뷔르츠부르크 대학에 입학했다.[3]

이후 1년간 적응하러 애썼지만 생활고에 시달리다 1923년 9월 하이델베르크 대학으로 전학을 시도했지만, 준비해야 할 서류가 많고 심사가 까다로워 입학을 포기하고, 베를린 대학으로 눈길을 돌렸다. 그해 가을 베를린에 가서 대학 입학에 관해 문의한 결과, 독일어 한 과목을 시험보라는 대답을 듣고 이에 따라 시험에 응시해 겨우 통과하고 베를린 대학에 입학하여 정치경제학을 전공했다. 그는 이 시기 베르너 좀바르트 교수의 강의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당시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정이 영 좋지 않았고, 그 역시도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은 채 입학했기 때문에 대학 적응을 힘들어 했다. 결국 1924년 4월 독일 생활을 마감하고 파리로 돌아갔다.

파리에 도착한 정석해는 이용제의 소개로 부알로가 보탱병원에 취직했다. 이때 김법린도 그와 함께 병원 허드렛일을 했다고 한다. 그들은 오전에 병원에서 일하고 오후 5시에는 파리 대학에서 공부했다. 정석해는 철학과를 전공하면서 앙리 들라크루아 교수의 강의를 받았다. 그러나 파리 유학생 사이에서 내분이 일어나고, 일제 정보원들의 감시에 시달리고, 조선의 친지로부터 돌아와달라는 편지를 받는 등 일련의 시련을 겪으면서, 그는 차츰 유학 생활에 회의를 느꼈다.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어릴 때부터 무척 좋아했던 수학 과목에 몰두해 고뇌를 잊곤 했다고 한다. 한편, 정석해는 파리 대학에 다니면서 앙리 베르그송의 직관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고, 앙드레 랄랑드 교수, 레옹 브룅슈비크 교수의 가르침을 받기도 했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종목에서 우승한 손기정이 조선으로 귀환하던 중 파리에 들렀다. 이때 한인 유학생들이 그를 위해 환영회를 열었는데, 이 자리에 참석한 정석해는 손기정에게 인상적인 말을 했고, 손기정은 이를 평생의 지침으로 삼았다. 손기정은 훗날 그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정석해 씨는 내 손을 움켜잡으며 반겼다. "나는 손 군을 단순한 운동선수로만 생각지 않는다. 오늘 일인들의 축하 파티가 있었는데도 마다하고 피를 나눈 형제들의 모임에 나왔으니 얼마나 대견한 일이냐"는 것이었다.

- 손기정, <나의 이력서, 한국일보 1980년 5월 15일자 기사.

정석해는 1929년 파리 대학을 졸업한 뒤 10년 내내 파리에서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다 1939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조선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이용제로부터 배값을 지원받은 뒤 19년만에 조선으로 가는 배에 탔다. 그는 이때 만 19년을 소지하던 중국인 여권을 폐기하고, 일본 공관이 발행한 여행권을 휴대했다. 이옥의 증언에 따르면, 정석해는 배가 인도양 상에 이르렀을 때 일본 공관이 발행한 여행권을 찢어 바다에 던졌다고 한다.

이후 고향에 도착한 그는 일제의 감시를 받아야 했고, '불온인사'로 낙인찍혀서 직장을 구할수도 없어 매일 불우하게 지냈다. 그러다 44세 때인 1943년 개성 출신이며 유치원 보모로 일하고 있던 진상길과 결혼했다. 이후 1944년 5월부터 개성에서 지내던 정석해는 1945년 7월 30일 부친과 모친을 뵙고자 고향에 내려왔다. 1945년 8월 15일 다시 개성으로 돌아가려 할 때, 천황이 옥음방송을 통해 항복을 선언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8.15 광복 후, 정석해는 허헌, 김성수, 여운형 등 여러 정치 인사들과 만나 정치에 관여해보려 했다. 그러나 해방 정국이 무척 혼란스러운 것을 보고 회의를 느끼다 김윤경, 최규남으로부터 연희전문학교의 교직을 맡아달라는 부탁을 듣고 즉시 수락하였다. 1945년 10월 20일 연희전문학교 개강식에 참석한 뒤 학생들을 상대로 철학 뿐만 아니라, 수학, 논리학, 물리학, 프랑스어 등을 가르쳤으며, 고려대의 이상은, 김경탁, 성균관대의 임창순, 서울대의 조윤제 등과 깊은 친분을 다졌으며, 연세대에서 한학을 전공한 권오돈 교수를 초빙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최석규는 그와 처음 대면했을 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논리학 시간에 김윤경 선생의 소개로 등단한 정 선생님은 처음부터 동경의 대상이었습니다. 독어, 불어로 철학을 했다고 하니까 더욱 그런 느낌이 들었습니다. 선생은 뒷짐을 지고는 교단을 왔다갔다 하다가는 "여러분, 모든 것을 의심하십시오"하는 데카르트적 명제로 강의를 시작했습니다.

정석해는 교수 직임을 맡아 학생들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행정보직도 성심껏 수행했다. 성인교육심의위원, 학생처장, 교무처장, 철학과장직 등이 연이어 맡겨졌는데, 특히 학생처장과 교무처장 일은 대학행정의 핵심이었기에 부담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는 일을 원칙대로 수행하는 과정에서 학생과도 마찰을 빛고, 학교 측과도 충돌을 여러 차례 빚었다. 김윤경은 자신의 일기에서 이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3시에 교무회의를 열었다. 정석해 학생과장이 학력 속이고 들어온 31명 학생을 쫓아냈다고 보고했다.(1949.3.2.)


학생과장 정석해 씨 이름으로 익명의 투서가 왔다. 내용은 "너희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라. 너희는 우리의 진정을 막았다. 탕 소리 한방의 총으로 너희를 처치할 것이다. 먼저의 전례를 보았지? 이번이 너희의 차례다. 정석해, 김윤경에게." "전정을 망친 30명" 이란 이름으로 씀... '먼저의 전례'는 원 박사 부인 죽인 것을 가리키는 모양.(1949.4.6.)

'원 박사 부인 죽인 것'은 연희대학교 학생이 원한경 교수의 부인을 저격한 사건을 가리킨다. 정석해는 이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학문이나 좀 하고 조용히 살려고 했는데, 내 운명이 그런지 자꾸 보직을 맡기고 해서...... 학생들이 좌우파로 갈려 싸우고 아주 격돌이 심했어요. 내 교무처장 들어가는 첫날에 원한경 씨 부인이 총에 맞아 쓰러지지를 않나. 그 집에서 교수 부인회를 열러고 하는데, 어떤 청년이 들어오니까 문을 열고 나가다가 일을 당한 모양이더군요. 그래 원 박사네 집으로 달려가고.... 정말 웬 사단이 그리 많은지......

또한 좌익 학생단체 관련 사건으로 교수들이 잡혀가 학사 업무가 크게 지장받는 경우도 빈번했다. 정석해는 그때마다 관계기관의 장을 찾아가 "학교 일이 바쁠 때 교수 검거는 좀 너그럽게 하고 범위를 확대하지 말아달라"고 진정하는 등 사태 수습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한편, 그는 강직한 성격 탓에 윗 사람과도 마찰이 심했다. 한번은 총장의 그릇된 처사를 준엄하게 따지고 폭로한 뒤 직위를 내던지려던 적도 있었다. 김윤경은 1949년 5월 23일자 일기에서 이날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백 총장과 이야기하는데 정석해 씨가 들어와서 "김 선생도 계신 자리에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하고 열쇠꾸러미를 내어놓으면서 교무처장 일을 절대로 못 보겠어서 사면한다고 결심함을 밝힌다. 철학과장도 내놓겠다고 한다. 학생과장실에서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니 19일에 문교부에 교수 채용 허가 간청 문제로 갔더니 최광선이라는 이에게 열한 명의 불허가를 학교 책임자가 청하였는데, 여덟은 별 문제 없이 되고 세 명은 허가할 수 없다 했다고 한다. 백 총장이 이들을 숙청하려는 방침이었는데 자기는 모르고 어리석게 경찰서로, 관공서로 다섯 번이나 돌아다녔다고 한다. 백 총장은 결단을 소이려 하고 미루어 가므로 도저히 일할 수 없다. 학생과장, 재무과장, 총장 비서를 두어 학교 일이 민활하게 하여야겠는데 혼자 하게 되니까 일이 밀리기만 한다.

이렇듯 온갖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정석해는 연희대학교(1946년 연희전문학교의 명칭이 연희대학교로 변경되었다)를 어렵게나마 이끌어갔다. 그러나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면서, 연희전문학교는 북한군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후 정석해는 죽음의 위기에 봉착했다. 일전에 학생증을 위조하여 연희대학교에 입학하려다가 정석해에 의해 불발되었던 조영식이 북한군에게 가담하여 서울시장에 임명된 후 정석해를 인민재판에 회부하려 든 것이다. 그런데 조영석은 연희대학교 내 텅 빈 선교사네 집에 들어가 도둑질하려다가 북한군에게 즉석에서 사살되었고, 정석해는 그 덕분에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고 한다. 또 한번은 라디오를 몰래 구입하여 전황이 어떻게 되는 지 알아보려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그렇게 3개월간 북한군 치하에서 숨죽이고 살던 그는 9월 28일 국군이 서울을 수복하면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러나 1.4 후퇴로 서울이 또다시 중국군에게 함락되게 되자, 그는 일가족을 데리고 부산으로 피난갔다. 이후 부산에서 가교사를 마련한 뒤 전쟁 기간 내내 학생들을 가르친 그는[4] 종전 후인 1954년 교환교수의 자격으로 미국으로 가서 하버드대, 예일대, 프린스턴대, 시카고대, 노스웨스턴 대 등을 시찰하였다. 귀국 후에도 학장 직을 맡았으나 거듭된 마찰로 인한 스트레스를 견딜 수 없어 사임을 청원했고, 1957년 3월 학장직을 조의설 교수에게 넘기고 평교수로 돌아왔다. 이후 한불문화협회 이사장(1956~1958), 한국철학회 부회장(1958), 회장(1959)을 맡았다.

1960년 4월 19일, 연세대학교(1957년 연희대학교가 연세대학교로 통합되었다.) 학생들이 3.15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정석해는 이에 참가했다가 군인들이 학생들을 향해 총탄을 퍼붓고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실려가는 광경을 목도했다. 그는 이 광경을 보고 '너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는 양심의 소리에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어찌해야 할지 고민하던 그는 4월 21일 오후 서울대학 교수회관에서 몇몇 교수들과 함께 대책을 의논하자는 이야기를 듣고 즉시 갔다. 자리에 모은 다섯 교수들은 각 학교 마다 따로 성명하자, 교수들의 공동명의로 성명을 발표하자, 좀 더 정세를 관망하자 등 여러 의견으로 갈랐으나 끝내 의견 합의를 이루지 못했다.

모임을 마치고 작별 인사를 나눌 때, 정석해는 이종우와 이상은 교수에게 다시 만나 의논하기를 청했다. 다음날 조용한 집에서 두 사람과 만난 그는 점심을 함께 먹으며 오랫동안 토의했다. 세 사람은 이승만 대통령이 병원을 찾아다니며 부상한 학생들을 어루만지는 수작이 자기가 물러날 생각이 없는 거라고 판단하였고, 자유당이 되살아나게 되면 학원에 큰 보복이 올 것이라고 예견했다. 그들은 모든 정세가 유리하니 국민이 한 번 더 궐기하기 위해서는 우리 교수들이 먼저 어떤 행동을 취해 열이 식기 전에 독재 정권 타도의 목표를 이끌어가기로 결의했다.

4월 24일 밤 이종우 교수댁에 고려대학 교수 몇 명과 성균관대학 교수 몇 명이 합석하여 교수들의 궐기대회를 열기로 의견을 모았다. 장소는 서울대학 교수회관을 빌리기로 하였고, 국립대학 봉급일인 4월 25일을 기해 궐기하기로 했다. 또한 각 학교 연락책임은 그날 모인 사람이 각각 분담했다. 성명서 내용에 대해서는 여러 의견이 나왔고, 이상은 교수는 여러 의견을 종합 정리하여 한 조목씩 적었다. 정석해는 각 대학 교수 궐기대회의 임시의장을 맡았고, 4월 25일 오전 연세대학교 교수회의를 진행해 교수들의 지지 서명을 받고, 오후 서울대학 교수회관에서 궐기대회의 의장으로서 회의를 진행했다. 선언 초안이 낭독한 뒤, '시국선언문'의 기초위원으로 이종우, 이정규, 이희승, 조윤제, 한태수, 이종극, 김영달, 김증한, 정석해 등 9명이 기초의원을 맡았다.

이날 오후에 열린 궐기대회에서 성명서 원안이 수정되었다. 즉, 원안에는 "현 정부와 집권당"의 퇴진으로 되어 있었으나, 25일 회의 중 9인의 기초위원들이 수정하면서 "대통령을 위시하여 국회의원 및 대법관" 등을 명확히 지목했다. 또한 "이번 4.19 거사"라고 적혔던 문구를 "이번 4.19 의거"로 정정하였다. 한편, 정석해는 동국대 김영달 교수에게 선언서 채택이 끝나면 바로 시위에 나설 것을 긴급동의하도록 당부했다. 이윽고 선언서 채택이 끝난 뒤 김영달 교수가 시위 행진을 주장하자, 그는 이 긴급동의를 받아들이며 크게 외쳤다.

우리 교수가 피를 흘려서라도 데모를 하자!

그러자 어느 교수가 이의를 제기했다.

긴급동의한 교수의 데모 제의는 평화적인 것으로 아는데, 의장은 왜 피를 흘려서라도 데모를 하자고 제의에 주석을 다느냐.

이에 정석해가 사회 할 줄 모르는 본인의 실책이라고 사과하였고, 좌중이 폭소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오히려 회중의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였고, 데모 동의가 순순히 가결되었다. 이후 "각 대학 교수단,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는 문구가 적힌 플랜카드가 만들어졌고, 정석해 교수를 선두로 교수들의 가두 시위가 서울 종로 5가에서 개시했다. 교수들이 행진하는 동안, 학생들이 모여들어 양 편에서 호위하였고, 지나가는 시민들이 손뼉을 치며 호응했다.

원래 교수들만으로 시작한 시위 행렬은 학생들이 이들을 호위하고 군중들이 참여하면서 국회의사당 앞에 이르렀을 때는 4~5만명으로 늘어났다. 교수단은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고 "이 대통령 하야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화신 앞을 돌아 을지로 사거리를 지나 국회의사당까지 행진했다. 이항녕 교수가 의사당 앞에서 시국선언문을 낭독하고 정석해가 선창하여 대한민국 만세 삼창을 외친 뒤, 교수단은 해산했다. 이 일은 4.19 혁명의 결정적인 장면 중 하나가 되었다.

정석해는 1961년 4월 19일 1.49 혁명 1주년을 기려 경향신문에 '사월혁명의 의의'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국민들이 자력으로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4월 혁명은 외세에 의뢰하지 않고 자력으로 역사적 과업을 성취한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런 투쟁의 역사적 기반은 3 1운동의 정신이지만, 특히 4월 혁명이 독재정권과 싸워 “국민의 주권을 회복한 것”에 주목했다. 그는 혁명은 대중이 스스로의 힘으로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자유의 권리를 도로 찾아온 것이며, 이 민권을 신장시키는 것이 향후의 과제라고 주장했다. 이를 위해서는 기성의 정객이 아닌 유능한 인물이 나올 수 있는 새로운 선거제도가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석해와 동료 교수들은 4월 25일의 시위 이후에도 정치적 민주화를 위해 계속 활동하려 했다. 1960년 5월 29일 시위 참가 교수들을 중심으로 한국교수협회를 결성했다. 이들은 “민주주의란 헌법의 제정과 대의원의 선출만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요 주권자의 부단한 감사가 병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주장하면서 한국교수협회가 그 감시를 실천할 것이라 선언했다. 조윤제를 회장, 정석해와 이상은을 부회장으로 선출한 한국교수협회는 4월 25일 시국선언문에 이은 시국선언 2호를 발표했다. 시국선언 2호는 “이승만 전대통령은 12년 간의 악정의 책임을망명으로써 면할 수는 없다. 국민은 계속하여 그 죄책을 추궁할 것”이며, 정부에게 “혁명정신을 철저히 시책에 반영시켜 부패잔재를 청산하고 청신 세력의 진출을 꾀하라"고 요구했다. 또 국회에게는 헌법과 선거법을 개정하고 해산할 것, 정당들에게는 정강정책을 밝힐 것, 학원 민주화를 침해하던 세력의 반성 등을 촉구했다.

대한민국 제2공화국 출범 후, 정석해는 주프랑스 대사 후보로 거론되었다. 공보실장을 맡았던 서석순이 이를 제안했지만, 정석해는 거절했다고 한다. 박상규는 <철학자 정석해 - 그의 시대, 그의 사상>에서 이 때의 일화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이런 소문이 있을 때 한 번 선생에게 농담조로 물었다.


"선생님께서 그런 자리를 맡으셔야 저희도 외국공관 문화관 따위라도 얻어 가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선생은 대답했다.

"다 본 유럽은 무얼 또 가나. 서장(티베트)이나 간다면 몰라도."

한 번은 학생들이 외국 공관의 대사는 그 나라 언어와 문화에 통하는 이가 적임이 아니겠냐며, "정 선생님이 주불대사를 하셔야 옳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정석해는 경직된 표정으로 아래와 같이 답했다고 한다.

학생들 말입니다. 그건 안 됩니다. 일국의 대사란 그 나라의 얼굴입니다. 한데 내가 그곳에 유학하던 30년 전엔 내가 거지였쇠다. 아니 30년 전의 거지가 대사가 되어 왔다고 그때 날 알던 사람이 말한다면 무슨 꼴이 되겠소?

이렇듯 4.19 혁명에 참여하여 명망이 높아진 그였으나, 곧 시련이 닥쳤다. 1960년 8월 24일 연세대학교 이사회가 정법대의 장경학, 문과대의 장덕순, 박두진 등 세 교수를 파면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이 세 사람은 학원민주화운동을 진두지휘해 대학 민주체제의 완비를 촉구했기에, 재단으로부터 반감을 사고 있었다. 이에 반발한 교수단이 재단을 상대로 농성하면서, 상황은 극단적으로 치달았다. 정석해는 이 상황에 무척 괴로워하며 직위를 사직하려 했지만, 김윤경이 "선교사들(재단)이 교수고 학생이고 물러가려면 다 물러가라고 하는 판이니, 희생된 이를 구하는 최선의 방법이 못 된다. 끝까지 싸우기 위해서라도 양심 있는 이가 더 남아 있어야 한다. 민영환같은 정신보다는 화랑정신을 가집시다."고 부탁하자 남아있기로 했다.

그러나 이사회가 교수단 간의 단합을 와해시키기 위해 정석해를 대학원장에 임명하자, 정석해는 즉각 사퇴했다. 이후 전체 학생의 학원 민주화 추진체인 <연세대학교 학원민주화 투쟁위원회>의 요구에 따라 교수단 대표로서 학교 측의 원일한 총장 서리와 더불어 학교 노천극장에서 사태 발생의 경위와 해명을 했다. 그리고 오천석 문교부 장관을 방문하여 진상을 보고했다. 그러나 이사회가 교수와 학생, 각계의 항의에도 끝까지 고집을 꺾지 않으면서, 시위는 장기전으로 흘러갔다. 사우어 이사장은 "공산당의 조종이 배후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하였고, 원일한 총장 서리는 "할아버지가 세운 학교인데 학생들의 소요가 계속되면 학교 문을 닫고 고아원이라도 하겠다."는 망언을 했다가 수많은 비난을 받았다.

1960년 가을, 교수단은 중재에 나선 이들의 권고를 받아들여 다음 3개항을 결의하고 10월 7일 농성을 철회했다.

1. 이사회는 세 교수의 파면을 재심사할 것.


2. 신분보장 세칙을 곧 제정, 실시하고 그 위원은 이사 2명, 동문 2명, 교수협의회 2명으로 구성할 것.

3. 신분보장 세칙이 제정되기 전에는 교수를 파면하지 못함.

그러나 10월 27일과 28일에 걸쳐 열린 이사회에서 세 교수의 파면을 재확인했다. 교수협의회, 신분보장 세칙 제정위원회 등이 설치되긴 했지만 제 기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이리하여 학원 민주화운동은 재단과 이사회의 고집을 끝내 꺾지 못하고 흐지부지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 발발하면서, 연세대학교는 또다시 시련에 직면했다. 김윤경, 권오돈, 오화섭, 장덕순, 이군철, 김상겸, 박두진은 서대문서에, 그리고 정석해와 김형석은 중부서에 연행되었다. 그는 당일에 풀려나 귀가하였으나 곧 서대문경찰서에 다시 불려가 조서를 꾸미고 석방 보증 형식을 갖추고서야 돌아올 수 있었다. 이후 군사정권은 9월 2일 교육에 관한 임시특례법을 발표했다. 교원의 정년제는 65세에서 60세로 줄였고, 종래 교수회의 동의를 필요로 하던 총, 학장 및 교수의 임면 절차를 개정, 교수회의 동의권을 삭제했다. 당시 62세였던 그는 이로 인해 연세대학교 교수 직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1962년 3월, 정석해는 숙명학원 관선 이사장으로 선임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연세대학교에서 경험했던 일이 또다시 일어났다. 이종우 장관의 천거에 따라 김순식을 새 총장으로 선임하자, 총장 반대파 교수들과 지지파 교수들 간의 분규가 일어난 것이다. 양측에서 상대방을 헐뜯는 보고와 진정이 잇달았고, 심지어 반대파 인사가 총장의 얼굴에 가래침을 뱉기도 했다. 이에 총장은 자신을 반대하는 교수들을 정리하지 않는다면 자기도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정석해는 이 일로 며칠간 밤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괴로워하다, 학교 질서의 확립을 위해 7명의 교수를 해임하기로 했다. 그러자 교수들은 정석해에게 항의했다.

이사장님께서는 어째서 연세대 분규에서는 교수단에 서서 이사진에 대항하셨으면서 이젠 입장을 달리하는 것입니까?

한편, 정석해는 숙명학원의 재단 사정이 매우 좋지 않은 것을 보고 재원을 확보하고 흑자 운영을 하는 등 만고의 노력을 기울였으며 학교의 역사를 재정립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일자, 그는 극도의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1964년 9월 2일 고혈압으로 쓰러져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했다. 이후 이사장 활동을 사실상 중단하고 연세대, 서강대, 동국대, 성균관대에 시간강사로 출강하다 1965년 4월 이상작 직을 사임했다.

이렇듯 여러 시련을 겪으며 건강마저 악화되었으나, 1965년 한일협정 반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정치 활동을 재개했다. 그는 1965년 7월 한일기본조약의 국회 비준을 앞두고 전국 17개 대학 전현직 교수 354명이 "한일협정 비준반대 교수단"을 결성하는 데 참여했으며, 7월 31일에는 교수단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8월 14일 비준안이 통과되자 교수단 대표로 이를 성토했다. 그는 한일기본조약의 반민족적 성격보다 절차의 반민주성을 문제 삼았다. 의회정치는 정당 간 합의와 민주적 의사 절차를 통해 수행되어야 하는데, 한일기본조약 같은 중차대한 문제를 집권당인 공화당이 단독으로 비준하여 통과시킨 것은 “불법이요 의회 정치를 무시한 독재주의 하에서만 가능한 무서운 사실”이라는 것이다.

정석해는 박정희 정권의 반민주적 폭거가 국민의 주권을 근본적으로 침해한 것이므로 기왕에 통과된 비분안을 무효화시키거나 폐지시키는 투쟁을 통해 주권을 도로 찾아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박정희 정권의 폭거에 대항하여 국민의 주권을 회복하는 이 투쟁에 참가하는 것을 “재차 항일 투쟁의 대열”에 합류하는 것이라고 했다.[5] 이에 중앙정보부는 1965년 8월 30일 정석해를 체포하여 며칠간 취조했고, '1호 정치교수'로 분류했다.

1969년 민주수호회 결성에 참가하여 부회장을 맡았으며, 1972년 2월 25일 대성빌딩에서 민족통일촉진회가 결성되었을 때 참가해 김지환, 이인, 유석현, 김재호, 정화암, 이상은과 더불어 7인 최고위원에 지명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건강이 좋지 않아서 대외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지 못했다.

말년의 정석해는 연세대 시간 강사로서 학생들과 만나 강의하고 담화하는 일과 외엔 독서 및 친지 접견하는 것으로 소일했다. 이 무렵 연세대 문과대학의 <인문과학>지의 후원 하에 "도상과 형상", "인식으로서의 역사", "서양인의 인간관" 등 여러 서양 철학서적을 번역 및 해석하였고, 이런 글들을 모아서 1981년 <진리와 그 주변>을 출간했다.

1974년 일본을 여행한 이래, 정석해는 여러 나라를 여행하며 여생을 보냈다. 그러다 1981년 7월 4일 20년간의 특별 강사 생활을 마무리하고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1985년 4월 연세대학교 창립 100주년 기념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일시 귀국한 것 외에는 미국에서 쭉 지내다 1996년 8월 14일 미국 로앤젤레스에서 병사했다. 향년 97세. 그의 유해는 로즈 힐 기념공원 묘지에 안장되었다.

외부 링크[편집 | 원본 편집]

  • 박상규, <철학자 정석해 - 그의 시대, 그의 사상>, 사월의 책, 1989년 초판, 2016년 재판.[1]
  • 이기훈, <서산 정석해의 민족운동과 민주화운동>, 연세사학연구회, 2019.[2]
  • 정현철, <정석해의 자유이념과 역사성>, 역사실학회, 2018.[3]
  • 도현철, <정석해의 교유관계와 연희대학교>, 연세사학연구회, 2019.[4]

각주

  1. 이극로, <고투사십년>, 을유문화사, 1947, P.17~18.
  2. 재안동현통사관 통화분관 주임 이치카와 스에사쿠, <환인현에서 배일선인 폭행에 관한 건>(1917.4.10)한국사데이터베이스
  3. 정석해는 <압록강은 흐른다>의 저자인 이미륵이 신과대학장에게 소개해준 덕분에 학장의 보증으로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4. 김윤경의 일기에 따르면, 이 시기 정석해는 자신에게 연세대학교를 맡겨놓고 피난간 뒤 돌아와서는 고압적인 태도로 대하는 백낙준과 여러 차례 마찰을 빚었다고 한다.
  5. 동아일보 1965년 8월 15일자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