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숙 (18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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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貞淑.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공훈록'에 따르면, 이정숙은 1896년 3월 9일생이며 고향은 함경남도 북청군이라고 한다. 그러나 1919년 3.1 운동 이후 체포된 이정숙의 심문조사기록에 의하면, 당시 그녀의 나이가 22세였다고 한다. 이에 따른다면, 그의 출생년도는 1898년이다. 또한 본적지는 함경남도 북청군 양가면 초리동으로 기재되었다. 그녀의 성장에 관련된 기록은 거의 없다. 단지 남편과 두 아들이 있었다는 것만 알려졌을 뿐이다.

그녀는 서울에 있는 정신여학교에서 수학하다가 1919년 3월 20일 제11회로 졸업하였으며, 졸업 전에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로 재직하였다. 정신여학교를 졸업하지도 않고, 간호교육을 받지도 않았는데도 간호부로 활동했다는 점이 의문이나, 1919년 당시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 양성소 교수였던 러들로우 부인이 "정신여학교 학생들이 부상한 한국인들을 간호하기 위해 즉시 병원으로 달려왔고, 이 중 10명이 간호사 교육을 받기를 희망했다."고 회고한 걸 보면, 이정숙은 이 10인 중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1983년 11월 미국에 살던 안창호의 장녀 안수산 여사의 로스앤젤레스 자택에서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발견되었다. 이 선언서는 1919년 4월 9일에 배포된 것으로, 선언서 작성 시기는 기미독립선언서보다 빠른 2월로 추정된다. 작성자는 김인종, 김숙경, 김옥경, 고순경, 김숙원, 최영자, 박봉희, 그리고 이정숙이다. 이 선언서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1982년 일본정부의 비밀문서 속에서 일본어로 된 ‘대한독립여자선언서’가 발견되었고, 그 후에 순한글 원본이 도산 안창호 선생의 장녀 자택에서 발견되었다. 선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슬프고 억울하다. 우리 대한 동포시여, (우리 여성도) 같은 국민, 같은 양심의 소유자이므로 주저함 없이 살아서는 독립기 아래서 활기 있는 새 국민이 되고 죽어서는 구천에서 수많은 선철을 찾아가 모시는 것이 우리의 제일가는 의무이므로(중략) 때는 두 번 이르지 아니하고 일은 지나면 못하나니 속히 분발할지어다. 동포, 동포시여 대한독립만세.

이정숙은 세브란스 병원의 간호부로서 3.1 운동에 참여하였다가 부상당한 환자들을 치료했다. 이후 1919년 4월 중순 검거된 조선인들과 가족을 돌보기 위한 목적으로 정신여학교 4회 졸업생이자 황해도 재령 명신여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오현주, 역시 정신여학교 4회 졸업생이자 전라도 군산 메리블덴여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오현관, 정신여학교 6회 졸업생이자 정신여학교 교사로 재직 중이던 장선희, 정신여학교 11회 졸업생이자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 이성완과 함께 혈성단애국부인회을 조직했다.

같은 해 4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출신인 김원경과 최숙자 등이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를 조직하는데, 대한청년외교단의 임창준, 이병철 등의 주선으로 혈성단애국부인회의 오현주와 대조선독립부인회의 경하순, 최숙자, 김희열, 김희옥이 만나 두 단체와 통합을 논의했다. 그 결과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로 통합되었는데, 총재에는 오현관, 회장은 오현주가 선임되었으며, 부총재로 김희열, 부회장에 최숙자, 평의원에 이정숙, 외교원에 장서희, 서기에 김희옥, 고문에 이병철이 선임되었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평양, 개성, 대구, 기장, 진주, 밀양, 거창 등지에 지부를 두고 유인경을 거창, 통영, 밀양을 관할하는 대구 지부장에 임명하였으며, 이순길에게 양산, 마산, 울산, 부산의 지부 연락원으로 삼아 각 지부를 순회하게 하였다. 이병철은 애국부인회간사부규칙을 기초하여 회비는 각 회원의 처지에 따라 각자 갹출하며 수금은 지부장이 하되 모인 금액의 3분의 1은 중앙본부에 독립운동자금으로 송부하기로 하였다. 이정숙은 간사부를 설치하고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인 김은도, 장옥순, 박봉남, 박덕혜, 김효순, 이도신, 김여운, 박옥신 등을 입회시켰으며, 회비 26~27원을 취합했다. 특히 간호부 박옥신은 30여 원의 자금을 제공했다.

이정숙은 1919년 7월경 여름휴가로 고향인 함경남도 북청으로 가는 길에 김경도 이원군의 보신여학교 교사 신애균을 찾아가 2번에 걸쳐 27원의 자금을 수령하였고, 함흥의 한일호에게서 60원을 받아 귀경하여 재무 담당자 신정균에게 인도했다. 또한 정신여학교 학생인 김경순에게도 회원 가입을 권유하여 즉석에서 회비 2원을 받았으며, 세브란스 병원에 진찰받으러 온 정신여학교 학생 황희수에게도 회원 가입을 권유했다. 이후 경성 지부장을 맡아 회비 및 성금을 받아내는 임무를 수행했다.

그러나 3.1 운동 이후 이병철 고문이 독립운동에 대한 회의를 품고 활동을 중지하고, 회장 오현주도 그만두면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활동이 저조해졌다. 이때 감옥에서 출감한 김마리아황애시덕이 1919년 9월 19일 애국부인회에 남아있는 인사들을 모집했다. 두 사람의 출옥을 위로, 축하하는 다과회 모임을 명분으로 이정숙, 장선희, 백신영, 이혜경 등 16명이 정신여학교 교내 여선교사 데일의 집 2층에 찾아왔고, 이 자리에서 대한민국 애국부인회 임원을 개편했다.

회장에 김마리아, 부회장 이혜경, 총무 및 편집원 황애시덕, 적십자 회장 이정숙, 윤진수, 결사장 이성완, 백신영, 재무원 장선희, 서기 신의경, 부서기 박인덕, 교제원 오현관이 선임되었다. 또한 이정숙은 세브란스 병원 회원 약 28명의 대표, 신의경은 경기도 지부장, 이성완은 배화여학교내 회원 15명의 대표, 박인덕은 이화학당 내 회원 24명의 대표, 김태복은 동대문병원내 회원 20명의 대표, 성경애는 성서학원성서학원내 회원 18명의 대표로 활동했다.

교제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은 물론 국외에서 밀사로 파견된 이들을 맞아 국내의 지사들과 접선시키는 일을 책임졌고, 적십자부는 투옥된 독립운동가들과 해외에 망명 중인 자들의 유가족들을 위한 원호사업을 맡았다. 결사부는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결사 각오로 투쟁할 전위부대를 책임졌다. 재조직된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주 목적은 구제활동, 모금활동 뿐 아니라 남성과 동등한 독립운동의 전선에서 싸우기 위한 조직의 개편이었다. 이를 위해 적십자부와 결사부를 신설해 보다 강력한 항일투쟁을 꾀했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의 취지문은 다음과 같다.

고어에 말하기를 나라 사랑하기를 내 집같이 하라 하였거나, 가족이 집을 사랑하지 않으면 그 집을 이룰 수 없고, 국민이 나라를 사랑하지 않으면 그 나라를 보전하기 어려울 것은 아무리 어리석은 남편과 부인이라도 밝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아! 우리 부인도 국민 중의 한 분자이다. 인권을 찾고 국권을 회복할 최대의 목표를 향하여 우리에게는 다만 전진이 있을 뿐이요, 추호의 후퇴를 용허할 수 없다. 국민성 있는 주인은 용기를 분발하고 이상을 높이고 사기를 상통함으로써 공고한 단결을 도모할 것이니, 일제히 찬동하여 주기를 천만 희망하는 바이다.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는 각 지부에서 의연금을 모으고 대표를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파견하여 건의서를 제출하였으며, 회원 모집에 힘을 기울였다. 특히 군자금 6천원을 모집하여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러나 애국부인회 회장 오현주가 회원들을 배신하면서 일이 틀어졌다. 오현주는 대구경찰서 형사 유근수를 임시정부 밀사라고 속여 김마리아와 장선희에게 접근해 두 사람이 유근수에게 조직의 내부사정을 털어놓도록 유도했다. 결국 1919년 11월 28일, 애국부인회 전모를 파악한 경찰이 서울과 대구에서 일제히 검거하면서 김마리아, 이정숙, 신의경, 장선희, 황애시덕, 이성완 등 80여 명의 간부와 회원들이 일제히 검거되었다.

이정숙은 동지들과 함께 남대문역으로 이송된 후 대구로 압송되어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애국부인회사건은 사회적으로 매우 큰 이슈가 되어, <매일신보>는 1919년 12월 19일자 3면 전체를 할애하여 구체적으로 그 정황을 기사로 게재했다.

애국부인회는 처음에 재령 명신여학교 교사 오현관과 군산 메리 불덴 여학교 교사 오현주 및 경성 세브란스 병원 간호부 이정숙 등이 만세사건으로 입감된 자와 가족을 구제할 목적으로 4월 상순 경성에 혈성단애국부인회를 조직하고 회령, 정평, 목포, 전주, 광주, 흥수 등지에 지부를 결성하였는데 당시 때마침 임창준, 이병철(청년외교단 총무) 등은 여자고보 졸업생 중 기독교신자를 규합하여 대한독립애국부인회란 것을 조직하려던 중이었는데 5월경 임정에 회원인 김원경을 대표로 파견할 제 혈성단은 혈성단의 대표도 겸하여 달라는 의촉을 받게 되었고 6월중에는 이병철이 동지 경하순, 최숙자, 김희열, 김희옥 4명과 같이 혈성단 대표 오현주와 협의하고 이에 두 단체가 합동하여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하게 된 것이다. (후략)

매일신보는 기사에서 대구검사국으로 송치된 자의 명단을 공개하였는데, 청년외교단 10명과 이정숙, 오현주, 오현관, 김마리아, 장선희, 김영순 등을 포함한 대한민국애국부인회 25명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같은 날 동경판 매일신보에도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경성을 중심으로 조선 각지의 기독교 신자로 조직된 대한독립애국부인회는 올해 4월 설립이후 이른바 상해 임시정부 및 재외 불령선인과 기맥을 통하여 경성에 본부, 각도 요지에 지부를 설치하고 항상 청년외교단이라 칭하는 비밀결사와 연락하며 독립사상의 선전, 불온문서 배포, 회원 모집 및 운동비 징발 등에 종사하였다. 회원은 백 수십명을 상회하며 6,000원을 독립운동 자금으로서 임시정부에 제공하는 등 은밀히 활동하고 있던 것이 바로 청년외교단의 검거, 증거서류의 압수에 의해 발각되었다. 그 이래 경상북도 경찰부에서 엄중 탐색 중 내부 사정이 판명되어 11월 28일 각 도 경찰부가 일제히 검거에 착수하고 지난 7일까지 14명을 체포하였으며, 계속해서 잔당 수색 중인데 그들을 합치면 결국 30명 내외의 검거를 보게 될 것이다.

김마리아와 황애시덕은 경찰국 제 3부에 이송되었고, 이정숙을 비롯한 나머지는 대구경찰서 격검장에 수감되었다. 취조를 받은 사람은 52명이었는데, 43명은 불기소로 풀려나고 이정숙, 김마리아, 김영순, 백신영, 신의경, 유인경, 이혜경, 장선희, 황애시덕만 예심에 회부되었다. 이정숙은 6개월간의 예심을 거쳐 1920년 6월 7일 오전 9시부터 대구지방법원 제1호 법정에 섰다. 이후 6월 29일 선고공판에서, 그녀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해 공소를 제기하였으나, 12월 16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시작된 항소심은 12월 27일 미결기간 100일을 본형의 산입한 것 외에는 1심과 같은 판결로 끝났다.

이후 그녀는 대구형무소에서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다. 1920년 5월 26일자 동아일보 기사는 이정숙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아직 보석되지 아니한 여자 중에도 이정숙은 겨울 동안에 발이 얼어 붙은 것이 그대로 덧나서 촌보도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옥중에서 고통 중이라더라.

1922년 5월 6일, 이정숙은 장선희, 김영순, 황애시덕과 함께 대구형무소에서 가출옥했다. 동아일보 1922년 5월 9일자 기사에 '출옥한 애국부인단 사건의 네 규수, 금번 감옥에서 가출옥'이라는 제목으로 기사가 실렸고, 그녀와 동지들의 사진이 첨부되었다. 기사에 따르면, 이 네 규수는 대구형무소에서 오전 11시경에 출옥하여 즉시 북행하는 열차를 타고 경성으로 돌아왔으며, 황애시덕과 김영순은 경성에 머물고 이정숙은 함경남도 북청으로, 장선희는 황해도 재령으로 출발할 예정이라고 한다. 이때 이정숙은 얼굴에 매우 쾌활한 빛을 띠며 옥중 소감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고 한다.

나는 꿈과 같이 갔다가 꿈과 같이 왔습니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참말로 감옥은 꿈과 같은 별세상입니다. 복역중에는 감옥에 대한 경험을 많이 얻었으며 출옥 후에는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럼으로 사정이 허락하는 대로 이후 공부를 하고자 합니다.

1925년 1월 20일자 조선일보 기사에 따르면, 1925년 1월 17일 이정숙, 이도, 최화장월, 김정숙, 김현제 등 20여 명이 시천교당에서 여성해방을 목표로 신구여성을 망라하는 '조선여성해방동맹' 발기총회를 하였다고 한다. 이후 이정숙은 1925년 2월 21일에 조직된 '경성여자청년회'의 초대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이 극히 제한적이라서 확인하기 어렵다. 조선총독부 소속관서 직원록 1925년자 기록에 따르면, 이정숙의 남편 '궁사ㅇ'은 함경북도 회령의 도립의원인 회령의원이었다고 한다.

6.25 전쟁 발발 후 월남한 유족의 증언에 따르면, 이정숙은 8.15 광복 무렵 북한에 거주했다고 하며 1950년 7월 22일에 사망했다고 한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이정숙에게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