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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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義敬. 대한민국독립운동가.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받았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신의경은 1898년 2월 21일 한성부 동서 건덕방 경이계 과목동(현재 서울특별시 종로구 연건동)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부친은 알려지지 않았고, 모친은 신마리아이다. 그녀는 어린 시절 몸이 약해 할머니와 모친의 간호를 받았으며, 가마솥에 소뼈를 갈아 먹기도 했다고 한다. 이후 정신여학교와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유학가서 도호쿠제국대학 문과를 졸업했다.

1918년 정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그녀는 1919년 비밀결사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에 가입하여 항일독립운동을 폈다. 대한애국부인회는 김마리아, 황애시덕을 중심으로 결사부(決死部)·적십자부(赤十字部)를 신설하고 항일독립전쟁에 대비한 체제로 조직을 전환하였는데, 이때 신의경은 서기 및 경기도지부장을 맡았다.

대한애국부인회는 본부와 지부를 통해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내 연통부(聯通府)와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 대한총지부(大韓總支部)의 역할을 대행하였다. 또한 독립운동자금 모집에 힘써 6천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 그러나 1919년 11월 일본 경찰이 이러한 활동을 적발하는 바람에 동지들과 함께 체포되었고, 1920년 6월 29일 대구지방법원에서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출판법위반 혐의로 징역 1년형을 언도받았다.[1] 이에 불복해 공소했지만 1920년 12월 27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되었다.[2] 모친 신마리아는 딸이 대구형무소에 수감 중이던 1921년 6월 24일 4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신의경은 출옥 이듬해인 1922년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YWCA) 창설에 참여해 서기로 일했다. 1924년에는 이화여자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호쿠제국대학 문과를 졸업했다. 이후 이화여전 교원으로 부임해 역사과목을 가르쳤다. 1931년 도호쿠제국대학에 재학하던 시절 만났던 박동길(朴東吉)과 결혼했으며, 피어선 기념 성경학교의 교사와 부원장, 1937년에는 연동교회 여전도회 회장, 경기노회 여전회 회장 등 목회 활동에 열성을 기울였다. 1930년대 말부터는 신사참배 강요에 응하지 않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 은둔 생활을 했다.

8.15 광복 후, 미군정이 1946년 12월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발족시켰다. 이때 신의경은 여성 의원으로 참여해 의원 선서를 하면서 “오늘을 못 보고 일찍 가버린 애국여성동지들을 어떻게 위로할 수 있을까”라며 감회에 젖었다. YWCA대표 자격으로 의원이 된 신의경은 국가 건설과 여성계몽을 가장 시급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과도입법의원의 보통선거법 심의 과정에서 신의경은 황신덕과 함께 여성할당제, 즉 여성의 의원 참여를 보장하는 ‘특별취급안’ 실시를 주장했으나 관철되지 못했다. 또한 과도입법의원에서 ‘공창제도 폐지령’이 통과되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신의경은 이 시기 김규식의 정치노선을 지지하였다. 1947년 대한적십자사(총재 김규식) 창립위원과 집행위원, 민족자주연맹(주석 김규식)의 부녀국장으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피어선성경학교, 정신여자중학교, 정신여자고등학교, 서울여자대학교에서 교육 활동과 이사 활동, 그리고 여전도회 활동에 주력했다.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 서울에서 말년을 보내다 1988년 1월 9일에 소천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3년 신의경에게 대통령표창을 수여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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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