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칠성

양칠성(梁七星, 1919년 5월 29일 ~ 1949년 8월 10일)은 인도네시아한국인 독립운동가다. 양칠성은 한국 이름으로, 일본 이름은 야나가와 시치세이(梁川七星), 인도네시아 이름은 코마루딘(Komarudin)이다.

생애[편집 | 원본 편집]

1919년 5월 29일 전라북도 전주군 삼례면 삼례리에서 태어났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지 5개월이 지난 1942년 5월, 오늘날 부산광역시 부산진구 부산시민공원 자리에 있던 노구치 부대에 입대하여 훈련을 받았다. 이때 양칠성이 자원 입대하였는지 강제 징집된 것인지는 분명히 밝혀지지 않았다. 그해 8월에 인도네시아 자와섬에 있는 미군포로수용소 감시원 자리에 배치되어 3년 동안 복무하였다. 그러다 일본제2차 세계 대전에서 패전한 이후에도 인도네시아에 남아 인도네시아를 다시 식민통치하려는 네덜란드에 맞서 현지 독립군의 일원이 되어 함께 투쟁하였다.

빵에란 빠빡(Pasukan Pangeran Papak, 왕자부대)이라는 부대를 이끌고 게릴라전을 펼쳤으며, 1945년에 반둥과 족자카르타를 잇는 철도와 대로를 공격하여 네덜란드군의 군수물자 수송로를 끊고 무기를 대거 빼앗는 등 1948년까지 여러 전투에서 전과를 올렸다. 그러다 1948년 11월 갈룽궁산(Gunung Galunggung)에 있는 은신처에서 작전을 의논하던 도중 습격한 네덜란드군에게 사로잡혀 이듬해인 1949년 8월 10일 가룻에서 주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총살되었다. 동년 5월 7일에 체결된 룸-로이연 약조(Perjanjian Roem-Roijen)에 따라 자와섬에서 휴전이 발효되기 하루 전이었다.

사후[편집 | 원본 편집]

이후 한동한 세상 속에서 잊혔다가 사후 26년 만인 1975년 11월 고위 장성이 된 옛 동료들의 노력으로 세상에 다시 알려진다. 그해 인도네시아 정부는 양칠성을 외국인 독립영웅으로 추서하였으며, 파시르포고르 공동묘지에 묻힌 시신을 가룻 영웅묘지로 이장하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료들은 양칠성을 일본인으로 알았기에 묘비에는 일본식 성명인 '야나가와 시치세이'가 적혔다.

성명은 1995년 8월에 정정되었는데, 이는 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 게이센여학원대학 명예교수와 남편인 무라이 요시노리(村井吉敬) 전 와세다대학 교수의 공이 컸다. 시신을 이장할 당시 자와바랏주 파자자란대학에서 일본어를 가르치던 우쓰미 아이코와 파견유학생이던 무라이 요시노리는 시신을 이장하는 행사에서 '야나가와'라는 성씨를 보고 의문을 품었는데 일본 성씨라기에는 이상하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양칠성의 동료인 아오키(아부바카르), 하세가와(우스만)는 행사에 맞추어 주인니 일본대사관이 유족을 찾아 유족의 요청대로 분골 의식까지 치렀지만 양칠성은 외면하여 더욱 의문스러웠다고 한다. 그때 누가 무라이 전 교수에게 양칠성이 조선인이라 일렀고, 이를 들은 우쓰미 명예교수는 "인도네시아에는 남북한 모두 대사관을 두고 있는데 왜 유족에게 알리지 않느냐."고 일본대사관에 항의하였다. 이에 일본대사관이 "일일이 알리기 귀찮다."라고 답변하자 부부가 분노하여 양칠성의 신원을 확인하여 일본에 돌아가면 유족에게 꼭 알리겠다고 결심하였다 한다.[1][2]

평가[편집 | 원본 편집]

인도네시아를 다시 식민통치하려는 네덜란드에 맞서 3년 동안 무장투쟁하였고 인도네시나 정부는 그 공훈을 인정하여 독립영웅으로 추서하였다. 한국의 독립운동을 도운 공훈으로 건국훈장이 추서된 호머 헐버트,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어니스트 베델, 후세 다쓰지 등이 한국에서 어떤 평가와 대우를 받는지 미루어 보면 인도네시아에서 양칠성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긴말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인도네시아에서는 독립영웅이어도 한국에서는 일제에 부역한 친일반민족행위자이라는 점 때문에 좋게 평가하기 어렵다. 게다가 입대하여 포로 감시원이 된 것이 자의인지 타의인지는 분명치 않으니 차치하더라도 포로 감시원으로 복무할 때에 포로들을 마구 학대하였으며 네덜란드군에게 총살되기 전 〈기미가요〉를 부르고 '천황 폐하 만세'라고 외쳤다는 증언도 있다.[3] 포로들을 학대한 것은 《제네바 협약》을 위배하는 명백한 범죄이며 〈기미가요〉를 부르고 '천황 폐하 만세'라고 외친 것은 양칠성이 진심으로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위하여 투쟁한 것이 아니라 일본 제국대동아공영권에 동조하여 네덜란드에 맞서 싸운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단, 총살되기 전 인도네시아의 국기가 연상되는 적백색 수의를 입고 '독립'(Merdeka)을 외쳤다는 주장도 있어 섣불리 판단할 수 없다.[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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