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재기

개요[편집 | 원본 편집]

한국의 매스큘리즘 운동가로 남성연대[1] 의 창시자이자 전 대표이다. 자는 임성, 아호는 심헌, 청죽, 필명은 똥발바쓰.

생애[편집 | 원본 편집]

대구 대륜중, 대륜고. 영남다학교 상경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 1988년부터 1991년군에 입대, 철원 11사단 GOP에서 근무했다.

1999년 10월 군가산점 폐지소송에 반대하는 논객으로 활동했으며 그해 11월 26일 대구 효목동에서 운영하던 부동산중개업, 나이트클럽을 매각하고 서울 송파구 석촌동으로 올라와 여성부폐지운동본부 (2008년 남성연대로 개명)를 설립하였다.

안티페미니즘 성향이 있어서 여성부 폐지를 요구했다. 한지환, 정채기와 함께 군가산점 제도 폐지에 대해서는 반대를 했지만 호주제 폐지에도 그는 반대 입장을 갖고 있어서 이들과 마찰이 있었다.

일부 과격한 여성 비하발언(외모 조롱, 된장녀/김치녀 운운)과 소수자, 이주노동자 혐오, 리버럴 남성을 배신자 운운하는 등 극우적인 젠더관/사회관을 지녀서 사회적으로 비판받기도 하였다. 게다가 일베 활동으로 인해 그를 지지하는 시각이 흐려지기도 했던데다 최후에는 억지 주장도 서슴치 않는 바람에 끝에 가서는 남성인권 운동가라는 타이틀에 먹칠을 해버리기도 했다. 다만 국제결혼 다문화가정, 게이 남성에겐 우호적이였다고 한다.

2011년 1월부터 2013년 1월 31일까지는 무료 국제결혼 지원사업을 추진하다가 국제결혼 업체들의 비판을 받고 사업을 잠정 중단하였다.

또 정채기가 이혼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에 대해서 그는 결혼가정의 이름으로 남자들을 구속하는 건 잘못이라며 언제든지 이혼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결국 그는 남성연대의 지지율을 높히고 남성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고자 했지만 논리 오류를 내거나 남성인권과는 관계 없는 지역 갈등 발언들을 하면서 변질되었고 마지막에는 한강 투신을 끝으로 죽음을 맞이한 운동가가 되었다.

하지만 성재기를 시작으로 그동안 사회에 만연해 있던 여성우월이나 여성특권에 대한 남성들의 반성이 서서히 시작되었다.[2] 물론 성재기가 두각을 나타냈던 2010년대 초반에도 이러한 반성을 하는 남성들은 있었으나 2021년 현재에 비하면 확실히 그 수가 적었던 것은 사실이다.

평가[편집 | 원본 편집]

긍정적 평가[편집 | 원본 편집]

  • 남성 인권 공론화

그의 업적 중 가장 큰 업적은 바로 이것이라 하겠다. 그동안 남성 인권이라는 것에 그다지 관심이 없던 사람들을 일깨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해서 그의 발언 모두가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부정 평가로 인해 오히려 프레임이 씌워지고 남성 인권을 위해 뭉친 세력이 흩어져야만 했었다. 그러나 그의 등장 때문에 남성 인권에 대한 사회적 반성을 이끌 수 있었다.

  • 더치페이

더치페이는 여자가 돈을 못 번다는 인식을 바로잡자는 방향으로 시작한 것이다. 따라서 더치페이를 하지 않고 남자가 비용을 부담하는 것은 여성차별적 행동이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성재기는 남성도 육아와 전업주부를 할 수 있고 가정폭력, 성폭력을 당할 수 있음을 주장하기도 했다.

  • 가정폭력 남성 지원

다른 활동들은 '이론'에 의거한 주장이라면 가정폭력 남성 지원책은 실제로 그가 비용을 털어서 지원했던 활동이다. 가출 남편, 가정폭력 피해 남편부터 떠도는 남성 청소년까지 쉴 수 있는 숙소를 마련했다. 그동안에는 여성들에 대해서만 집중되어 있어 남성이 갈 곳이 없었는데 이를 성재기가 돕고자 자비를 털은 것이다. 더 나아가 가정폭력 남성들을 위해 변호사 비용을 지원하기도 했다.

  • 여성 전용 시설 폐지 운동

여성 주차장, 지하철 전용칸, 버스 전용 좌석, 여성 도서관 등 여성 전용 시설에 대해 철폐를 주장했다. 이에 대해서 서울시는 임산부를 위시하여 그들의 편익을 위해 배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만약 그랬다면 '임산부 전용'으로 만들었으면 될 일이었다.

  • 군 가산점 부활 운동

정확히는 군 가산점이 폐지된 이후 이를 살리는 것이 아닌 이와 비슷한 급으로 남성들에게 혜택을 주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런 제도가 군대에는 본인의 결함으로 갈 수 없는 장애인, 여성들에게 차별이 됨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최소한의 혜택이라고 말했다. 만약 여성들이 국방세를 낼 수 있다면 군 가산점보단 낫다는 말도 했었다. 그러나 여성들이 국방세를 내는 것에는 반대를 할 것이기에 군 가산점과 같은 작은 혜택으로 시작하자는 의견이었다.

  • 운영 비용

성재기의 남성연대는 여성 단체들과 같이 정부로부터 시민단체 지원금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여성가족부 아래에서 활동해야 하기 때문에 활동에 제약이 걸리기 쉬웠다. 그렇기에 일베 활동을 한 것이 아니겠느냔 의문이 있다. 실제로 커뮤니티에서 높은 추천을 받아 지원금을 조금이라도 벌 수 있었다면 그 곳이 일베든 네이버든 활동했을 것이다.

실제로 그는 모든 자산을 사용하고 나서도 2억이라는 빚을 졌었다. 결국 그는 1억을 기부해달라는 말과 함께 퍼포먼스를 보이려다 세상을 떠났다.

부정적 평가[편집 | 원본 편집]

  • 진영논리

실제로 좌파 남성은 보호할 의무가 없다고 말했다. 성재기는 이런 주장을 굽히지 않고 계속 이어갔는데 이 때문에 좌파를 지지하는 남성들로부터 반감을 샀음은 물론 관련 커뮤니티에서도 부정적 이미지를 만들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그가 일베를 한다는 이력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반페미 =[3] 우익남성 = 일베' 라는 프레임이 짜여지고 그 프레임으로 공격하고 있다.[4]

또한 이런 프레임을 지속적으로 사용해서 좌와 우, 보수와 진보간 이간질을 통해서 발언력을 얻으려고 했지만 실상은 양가에게 공격 당하거나 지지자들만 인정해주는 등 발언권을 얻지 못했다.

  • 일베옹호

표창원이 일베에 대해서 평가한 글에 답글한 것이 문제가 되었었다.

수백만이 자유의지로 이용하는 커뮤니티를 본인의 정치성향과 다르다고 비겁자,낙오자,변태 등으로 단정하고 인격살해한건 표창원이 먼저죠. 표창원의 표현대로 일베가 열등감에 사로잡힌 점원,배달,자영업 등의 사회적약자라면 남성연대가 대변할 이유, 충분한겁니다

— 오후 11:46 - 2013년 5월 27일

표창원은 범죄학적으로 의견을 제시한 상황에 성재기가 인격 비난을 해버렸다고 평가되어졌다.

  • 아청법 제 2조 5호 선동

성재기는 아청법을 남자를 대상으로 억압하려는 법이라 선동했지만 실상은 성별은 상관 없는 법이었다. 이후 최민희 의원의 아청법 개정 토론회에서도 남녀 갈등으로 몰아가 논지를 흐렸다고 평가된다. 이 때문에 정상적인 토론이 불가해져 궤변론자라는 불명예스런 행동을 하고야 말았다.

사망[편집 | 원본 편집]

2013년 7월 26일 한강 투신 퍼포먼스를 하다가 사망했다. 이로 인해 워마드같은 곳에서는 고인 비하를 하는 의미로 "재기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같이 보기[편집 | 원본 편집]

각주

  1. 성재기가 죽은 후 양성평등연대로 명칭을 바꾸었다,
  2. 한 예로 지금 남자니까 병역 의무를 져야하고 남자니까 가정을 위해 외벌이를 해야하고 남자니까 데이트나 결혼에서 돈을 더 많이 써야한다는 주장은 남성들에게 욕먹기 쉬운 주장이다. 허나 이런 논의가 시작되었던 2000년-2010년 사이에는 이 주장을 하는 성재기를 남녀 모두 찌질한 사람으로 낙인을 찍었다.
  3. 혹은 반페미 = 일베
  4. 남성연대를 이어 받은 신남성연대 역시 같은 프레임으로 공격 받는다. 다만, 신남연의 경우 끝끝내 우익적 발언을 커뮤니티에 해버림으로서 실책을 일으킨 탓이 크다.